매일성경 묵상
손바닥 뒤집듯이 하나님의 언약을 가볍게 여기는 유다 [렘 34:8-22]
 – 2024년 07월 20일
– 2024년 07월 20일 –
바벨론에게 포위된 멸망의 위기를 모면하려고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한가지로 노예 해방 계약을 맺고 시행했지만, 바벨론이 잠시 물러나 눈앞의 어려움이 사라지자 곧 그 뜻을 돌이킨 유다를 향해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신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히브리 종의 해방에 관한 율법적인 가르침은 출애굽기 21:2~11; 레위기 25:39~46; 신명기 15:12~18에 기록되어 있다. 출애굽기 규정에 따르면 여섯 해 동안 종살이 하면 일곱째 해에는 자유롭게 풀려 난다. 신명기 규정의 경우 면제년 규정(신 15:1~6)과 함께 묶어 7년마다 종의 해방이 된다고 본다. 하지만 이 규정을 분리해서 이해하면 출애굽기 규정처럼 6년의 종살이를 다 채운 자에게 개별적으로 선포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레위기 규정에서는 종살이 기간이 거의 평생으로 확장된다. 50년째 해에 선포되는 희년에 해방되기에 49년 동안 종살이를 한다. 본문에서 시드기야가 주도한 종의 해방이 율법적인 배경을 갖는다면 종의 해방을 공동체적으로 선포하는 신명기와 레위기의 규정을 따라 가능하다. 학자 대부분은 신명기의 규정을 따라 시드기야가 시행했을 것으로 본다.
    
    
    
1. 예루살렘 백성의 불순종(8~11절)
본문은 시드기야 왕 때 있었던 종의 해방과 관련된 특별한 사건을 다룬다. 시드기야 왕의 주도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이 자유를 선포하기로 계약을 맺었다(8절). 계약의 내용은 “사람마다 각기 히브리 남녀 노비를 놓아 자유롭게 하고 그의 동족 유대인을 종으로 삼지 못하게”하는 것이었다(9절). 이 계약은 곧 실행에 옮겨졌다(10절). 그런데 얼마 후 계약에 참여한 자들이 마음을 바꾼다. 이들은 자신들이 자유롭게 놓아준 종들을 도로 데려다가 다시 종으로 부렸다(11절). 왜 이렇게 되었을까?
    
본문의 21~22절을 통해 추론할 수 있는데,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다가 물러났음을 전제한다. 37:5에 따르면 바로의 군대가 출정했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에서 일시적으로 물러났음을 알 수 있다. 종의 해방 계약이 바벨론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포위와 관련됐다면, 이 일의 동기와 목적이 분명해진다. 먼저 군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종은 징집 대상이 아니지만, 해방된 종은 자유민으로 징집 대상이 되기에 병력을 확충하기 위해 해방했을 수 있다. 또,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주인은 종의 먹거리를 책임져야 했다. 평시에는 노동으로 되갚을 수 있지만, 전시에 종은 주인에게 무거운 짐이었다. 아무런 노동을 하지 않는 종에게 자신의 부족한 양식을 나눠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종교적인 측면에서는 여호와만이 바벨론 군대의 포위 공격으로부터 예루살렘을 지켜주실 수 있기에 그분의 도움을 기대하며 계약을 맺었을 가능성이다. 당시 상황이라면 이 세 가지 요인을 모두 고려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계약에 참여했던 자들이 목적이 달성되자 종을 해방하는 계약을 없었던 일로 하고 만다. 애굽의 개입으로 바벨론 군대가 철군하는 것을 보고 이제는 예루살렘의 안전이 확보된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즉, 바벨론 군대의 철군으로 노동력이 필요해졌기에 자신들이 풀어주었던 종들을 다시 데려와 일을 시켰다.
    
    
    
2. 예루살렘을 향한 고발과 심판선포(12~22절)
계약을 헌신짝처럼 내던진 백성들의 파렴치한 행태를 여호와께서 자신에 대한 불순종으로, 특히 여호와 신앙의 초석에 해당하는 출애굽과 언약의 시각에서 고발하신다(13절). 출애굽이 종을 해방하는 사건이라면 종의 해방이 곧 ‘너를 애굽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출 20:2; 신 5:6)’께 대한 순종이었다. 출애굽을 “언약을 맺으며 이르기를”이라고 표현 하시면서 마치 종의 해방과 관련하여 언약을 맺으신 것 같은 인상마저 준다. 이는 많은 율법 가운데 하나인 종의 해방에 관한 규정이 언약 준수의 척도가 된다는 의미다. 일곱째 해에 종을 자유롭게 놓아주라는 명령을 어긴 것이 곧 여호와께 대한 불순종이요 언약 위반이었다. 조상들은 종의 해방에 관한 규정을 준수하지 않음으로써 언약을 파기했다. 더 나아가 출애굽 전통마저 무시하고 했다(14절).
    
15~16절은 과거에서 현재로 시선을 옮긴다. 여호와께서는 먼저 “너희의 돌이킴”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신다(15절). 시드기야의 계약에 따른 종의 해방이 여호와 보시기에 “바른 일”이었다. 또한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라는 표현을 통해 계약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체결되었음을, 즉 여호와께서도 이 계약에 참여하셨음을 암시한다. 여호와께서는 ‘너희의 선조’로부터 돌이켜 바른길을 가려는 듯했지만, ‘너희’도 결국 다르지 않았다고 고발하신다. 예루살렘 백성은 여호와 앞에서 맺은 계약을 폐기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더럽힌 것이다(16절). 이들은 신실함이 없는 거듭 “돌이키는” 자들이었다. 조상들의 불순종에서 “돌이켜(슈브)” 여호와 보시기에 바른 일을 행한 자들이 이제는 바른 일에서 “돌이켜” 자유롭게 놓아준 종들을 끌어다가 “다시” 종으로 부린 것이다. 이에 여호와께서 자신의 이름을 더럽힌 “너희”의 불순종에 책임을 물으신다.
    
17절에서 “자유를 선포하다”를 두 번 사용하여 이에 상응하는 징벌을 선언하신다. 제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하라는 명령을 듣지 않은 자들에 맞서 여호와께서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선포하신다. 동포에게 자유를 주지 않은 자들을 칼과 전염병과 기근이 자유롭게 치도록 허락하신 것이다. 세상 모든 나라에 공포의 대상이 될 정도로 혹독하게 심판이 집행될 것이다.
    
계약 체결에 따른 제의적 의식과 언어유희를 활용하여 계약을 어긴 자들에게 멸망의 심판을 선언하신다(18~19절). 송아지를 둘로 쪼개고 그 사이로 지나가며 맺은 계약을 내버린 자들을 여호와께서 모두 쪼개진 송아지처럼 만드실 것이다. 계약 체결 의식을 위해 두 조각으로 가른 송아지의 운명이 계약을 파기한 자들의 운명이 되는 것이다. 시드기야가 주도한 계약이 15절에서는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집에서 내 앞에서” 맺은 계약으로, 18절에서는 “내 계약”으로 나온다. 즉, 여호와께서 계약의 증인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계약의 당사자가 되시는 것으로 표현한다. 그러므로 시드기야의 주도로 이루어진 계약 위반은 여호와의 계약을 위반한 것이기에 그분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된다.
    
20절은 징벌의 방식과 멸망의 철저성에 초점이 맞춰져 심판을 선언한다. 여호와께서 계약을 어긴 자들을 “그들의 원수의 손과 그들의 생명을 찾는 자의 손”에 넘겨 “그들의 시체가 공중의 새와 땅 짐승의 먹이”가 되게 하신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심판의 도구로 활용하셔서 “내 계약”을 어긴 자들을 남김없이 진멸하신다. 전면적인 파국이다. 들판에 버려진 수많은 시체를 날짐승과 들짐승이 뜯어먹지만, 그것들을 쫓아내고 시체를 지켜줄 사람이 없다. 21절은 “시드기야 왕과 그의 고관들”에게 주어지는 심판의 말씀으로 일부를 제외하고 20a 절과 거의 일치한다. 계약을 주도한 시드기야도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진다.
    
“너희에게서 떠나간 바벨론 왕의 군대”는 주전 599년에 유다를 돕기 위해 애굽의 군대가 출정한 사건과 관련된다(37:5). 당시 애굽 왕 호프라가 원정에 나섰다는 소식을 듣고 바벨론 군대는 일시적으로 예루살렘의 포위를 풀었다. 결과는 물론 바벨론 군대의 승리였다. 22절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선포한다. 이제 중도에 바벨론 군대가 철군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은 불길에 휩싸이고(39:8) 유다 성읍들을 폐허가 된다.
    
    
    
나는?
-이스라엘은 임박한 심판을 피해 볼 요량으로 왕의 주도 아래 노예해방을 단행한다. 히브리 노예를 7년마다 풀어주도록 정해놓은 율법을 내내 지키지 않다가 하나님의 환심을 사기 위해 시행한 것이다. 나라가 멸망하여 땅을 빼앗기면 노예도 소용없다. 하지만 눈앞에서 대적이 사라지자마자(21절) 곧 언약을 번복하고 해방한 노예들을 다시 잡아들였다.
    
-예루살렘 백성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도 없고 이 법을 주신 진정한 의도도 무시하는 오만함이 넘쳐났다. 탐욕에 젖어 동족들에 대한 최소한의 자비마저 저버린 것이다. 이런 악한 자들이 또 있을까?
    
-하나님은 애굽의 종노릇 하던 데서 이스라엘을 자유롭게 하셨다. 이제 이스라엘도 안식년이 되면 동족 히브리 노예들을 모두 해방해야 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종 되었던 데서 해방되어 한 형제가 된 운명 공동체였기에 소유의 많고 적음으로 지체를 착취하거나 차별 대우를 하거나 이용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두 사랑하시지만, 특히 약자들에 대해 관심과 돌봄을 베푸셨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맹세를 깨고 변심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도 변심하신다. 돌려보냈던 바벨론을 다시 돌아오게 하셔서 이 성을 쳐서 불사르고 황무지가 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이 형제들에게 선포한 자유를 실행하지 않으니, 하나님도 이 백성에게 행할 언약적 의무도 이행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 대신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어 이 백성을 마음껏 유린하게 허락하시고 그들을 열방 중에 흩어지게 하실 것이다.
    
*두 요새만 남고 다 점령당했다. 예루살렘마저 포위되어 상황이 위급해지자, 유다는 노예해방 규정을 지키겠다고 언약하고(18절) 시행했다(8~11절). 하나님 보시기에도 정당한 조치였다(15절). 하지만 호브라가 이끄는 애굽 군대가 자신들을 지원하기 위해 당도하고 바벨론이 잠시 철수하자(22절); 44:30) 언약을 철회하고 풀어주었던 노예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어려움이 닥쳤을 때는 회개했다가 상황이 해결되자 곧 말씀에 귀를 막고 무시해 버린 경험이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이런 무뢰함이 반복되지 않아야겠다.
    
*언약을 철회한 행동은 “종 되었던 집”에서 해방시켜 준 은혜를 망각한 선조들의 죄악과 다름없는 것이었다(12~14절). 민족 전체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같은 민족을 노예로 삼고 있는 예루살렘 주민들의 잔혹성은 결국 그들이 바벨론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마음을 돌이켜 정당히 행하였던 그들이 곧 마음을 돌이켜(변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결정을 내린다(15~16절). 나의 순종이 상황과 감정에 따라 변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일관성 없는 일상의 태도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이 더럽혀질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언하고도 번복한 백성에게 자유를 선언하신다(17절). 더 이상 하나님께서 간섭하지 않으시겠다는 의미다.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이제는 유기하시겠다는 것이다. 하나님께 독립을 선언하면 재앙이 기다리나,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면 진정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쪼갠 송아지 사이로 지나는 것은 언약을 어기면 자기 몸이 둘로 쪼개져 죽어도 좋다는 뜻이다(창 15:10). 하나님은 그들이 언약한 대로 시행하시겠다고 하신다. 연약하다는 핑계로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너무 쉽게 어기지는 않았을까? 손바닥 뒤집듯이 언약을 가볍게 여기는 이들에게 주는 준엄한 하나님의 경고를 마음에 새겨야겠다.
    
    
    
*주님, 상황과 감정에 따라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세가 변치 않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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