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 낭독된 말씀 [렘 36:1-19]
 – 2024년 07월 22일
– 2024년 07월 22일 –
여호야김이 통치한 지 4년째 일어난 일이다. 여호야김 시대의 불순종은 일반 백성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었다. 여호야김 왕은 한걸음 더 나아가 대놓고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했다. 여호야김은 예언자의 선포 행위는 왕권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유다 백성은 위부터 아래까지 한결같았다.
 
 
1. 말씀의 기록(1~8절)
‘여호야김 제사년(주전 605년, 25:1)’은 바벨론의 왕위 계승권자였던 느부갓네살이 갈그미스에서 애굽을 대파하고 시리아와 팔레스티나의 통치권을 수중에 넣은 해이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오래전부터 선포했던 북쪽에서 내려오는 재앙(1:13~14)이 구체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해이기도 하다. 바로 이 시점에 예레미야는 “두루마리 책”을 가져와 그에게 이른 모든 말을 기록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는다(2절). 문맥상 기록하라는 말씀은 ‘요시야의 날부터 오늘까지 이스라엘과 유다와 모든 나라에 대하여’ 예레미야에게 이르신 것이다. 25:3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했고, “오늘”은 여호야김 왕 넷째 해이다. 즉, 예레미야가 예언자로 부름받은 주전 627년부터 605년까지 선포한 말씀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것이다. 예레미야의 현재 구조에 따르면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말씀이 1~20장에서, “모든 나라”에 대한 말씀은 46~51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3절은 유다가 돌이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아시지만, 그럼에도 당신 백성을 끝까지 포기하실 수 없는 그분의 절망적 안타까움의 표현이다. 유다의 “악과 죄”를 용서해주고 싶으신 여호와께서 재앙을 내리시기로 했다는 말을 듣고 유다가 마지막 가능성을 뿌리치지 않고 당신께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시는 것이다. “길”을 수식하는 “악한”과 “재난”은 “하라아”라는 동일한 히브리어를 사용한다. 재난은 한편으로는 악한 길에 대한 여호와 징벌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악한 길의 필연적인 결말이다. 악한 길은 운명처럼 재난을 초래하는 길이다. 말씀을 기록하라는 여호와의 명령을 받은 예레미야는 네리야의 아들 바룩을 불러 자기가 불러주는 대로 두루마리 책에 받아 적게 한다(4절). 네리야의 아들 바룩은 예레미야의 동역자로서 끝까지 그와 함께한다(43:3, 6). 26절과 32절은 바룩을 서기관으로 부른다.
 
5~7절은 기록의 배경과 동기를 보여준다. 성전에 들어갈 수 없게 된 예레미야가 바룩에게 대신 성전에 가서 그의 구술에 따라 두루마리에 기록한 여호와의 말씀을 금식일에 낭독하게 한다. 여호와의 성전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기에 최적의 장소였고 더구나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금식일은 최상의 시점이었다. 금식을 위해 ‘유다의 모든 성읍에서 온 자들’에게 그들이 들어야 할 말씀을 바룩이 대신 낭독한 것이다. 7절은 내용상 3절의 반복이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유다 백성의 회개는 예레미야에게도 막연한 희망 사항이었다. 가능성이 없음을 아시면서도, 여호와께서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예레미야도 실낱같은 소망에 자신을 던진다. 예레미야는 여호와의 크신 노여움과 분에서 회개의 동인을 찾는다. 여호와의 타오르는 진노를 누그려뜨리기 위해서는 속히 악한 길에서 떠나 그분께 간구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바룩은 예레미야의 명령을 그대로 수행한다(8절). 
 
 
 
2. 왕궁 고관들의 반응(9~19절)
9~10절은 내용상 6절의 구체적인 설명이다. “여호야김의 제오년 구월(주전 604년 11/12월)”에 예루살렘에서 금식이 선포된다. 특이하게도 왕이 아니라 “예루살렘 모든 백성과 유다 성읍들에서 예루살렘에 이른 모든 백성”이 주도하여 자발적으로 금식이 거행된다. 금식이 선포된 시기의 국제 정세는 심상치 않았다. 주전 605년 9월 7일 바벨론의 왕위에 오른 느부갓네살은 곧 시리아로 돌아와 주변을 종속시키고 주전 604년 12월에 아스글론을 점령한다. 예루살렘과 유다는 아스글론까지 진출한 바벨론의 군대를 보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졌을 것이고 이에 백성들은 금식을 선포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예레미야는 아스글론의 멸망에서 예루살렘의 위기를 보고 특히 예루살렘 왕궁이 긴박한 현실을 직시하도록 호소하기 위해 두루마리를 성전에서 낭독하게 한 것 같다.
 
바룩이 성전 위뜰에 있는 ‘사반의 아들 서기관 그마랴의 방’에서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을 모두 백성에게 낭독한다(10절). 참고로 26:24에 따르면 그마랴와 형제인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여호야김 왕의 손에서 지켜주는 것으로 보아 사반의 집안은 예레미야에게 우호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예레미야의 선포는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한다(31절). 그러나 자발적으로 금식을 선포한 백성은 말씀에 무관심했으나 일부 서기관들이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백성의 귀에 낭독된 두루마리의 말씀이 그마랴의 아들 미가야에 의해 고관들의 귀에 알려지고, 왕의 귀에도 들려지게 된다.
 
두루마리에 적힌 “예레미야의 말”의 중요성을 인지한 미가야는 지체하지 않고 행동한다(11절). 서기관 엘리사마의 방으로 가서 그곳에 모인 고관들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12~13절). 그들중에 다섯 사람의 이름이 소개된다. “서기관 엘리사마와 스마야의 아들 들라야와 악볼의 아들 엘라단과 사반의 아들 그마랴와 하나냐의 아들 시드기야”이다. 이들중 세 사람의 이름은 25절에 다시 등장한다.
 
한편 미가야의 보고를 들은 고관들도 즉각적으로 반응한다. 이들은 여후디를 바룩에게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오게 하고 두루마리를 손에 들고 온 바룩에게 낭독해주기를 청한다(14~15절). 그런데 ‘유다 사람’을 의미하는 ‘여후디(14, 21, 23절)’의 경우 특이하게도 삼 대에 걸쳐 집안을 소개한다. 한편 미가야가 바룩의 낭독을 듣고 상황의 위중함을 감지했던 것처럼 고관들도 두루마리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알아챈다. 바룩이 읽어주는 말씀을 다 들은 고관들은 놀라 서로를 쳐다보다가 왕에게 보고하기로 한다(16절). 두루마리의 내용은 누구보다 왕이 알아야 할 말씀이었다. 두루마리의 내용에 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는다(29절). 그리고 왕께 보고하기 전에 이 두루마리 내용의 출처를 묻자(17절), 바룩은 예레미야가 직접 입으로 불로 주는 것을 받아 자신이 먹으로 기록했다고 말한다(18절). 말씀의 기원이 예례미야인 것을 강조하며 밝힌 것이다(10절).
 
이에 왕의 폭력적 성품을 잘 알고 있던(22:13~19) 고관들이 바룩에게 예레미야와 함께 아무도 모르는 곳에 숨어 있도록 충고한다(19절). 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26절). 26:21~31에 따르면 “예레미야의 모든 말과 같이 이 성과 이 땅에 경고하여 예언한” 예언자 우리야가 애굽으로 피신하자 여호야김은 사절을 보내 그를 애굽에서 데려다가 처형할 정도로 여호야김은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했다.
 
 
 
나는?
-요시야 때부터 이제껏 이스라엘과 유다, 열방을 향해서 하신 말씀을 두루마리 책에 낱낱이 기록하라고 하신다. 말씀의 권능을 보여주시려는 뜻이다. 그 말씀대로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이 멸망했고 그 말씀대로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앗수르 제국이 무너지고 애굽도 패하고 바벨론이 새롭게 중동의 패권을 차지하였다(주전 605년). 그러니 유다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 말씀대로 바벨론에 붙이실 것임을 깨닫게 하고 싶으셨던 것이다. 유다라도 악한 길에서 돌아서서 죄 사함을 받으라 하셨다. 오늘 우리에게 기록된 말씀을 주신 뜻도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나는 날마다 말씀의 은혜를 기록한다. 이렇게 기록한지 벌써 수년째다. 말씀의 은혜를 기억하기 위해 기록한다. 말씀의 은혜를 남기기 위해 기록한다. 묵상이 주는 큰 선물이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입이었다면 예레미야의 손과 입이 되어준 이가 바로 신실한 동역자 “바룩”이다. 그는 예레미야가 불러준 대로 두루마리에 받아 적었다. 그리고 성전에 출입할 수 없는 선지자를 대신하여 약 1년뒤 금식일에 유다 모든 백성 앞에서 두루마리의 말씀을 낭독하였다. 기록된 말씀을 알게 하였다. 기록된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역사를 환기시켜 준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주연과 조연이 따로 없다. 어느 자리이든 그 말씀의 권능을 드러내고 증거하는 일에 우리 모두는 부름 받은 증인들이다.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편지요 향기다. 누구나 각자의 일상을 통해 기록된 말씀을 일상에서 낭독한다. 우리의 일상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드러난다. 오늘을 나에게 들려주신 말씀에 대한 책임감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다.
 
-바룩의 낭독을 들은 미가야는 그 말씀을 고관들에게 전한다. 바룩에게서 다시 그 말씀을 들은 고관들은 두려움에 휩싸인다. 즉시 국가적으로 회개하지 않으면 큰 재앙이 닥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장 왕에게 알려야 할 시급한 사안이지만, 왕이 이 경고를 수용하지 않으면 예레미야와 바룩이 위태로워지는 소식이었다. 그래서 우선 예레미야와 바룩, 두사람을 피신시킨다. 이것이 복음의 양면성이다. 회개한 자에게는 두렵고 기쁜 소식이지만, 거부하는 자에게는 볼온한 소식이기에 말씀 선포자는 늘 위태롭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복음의 전달자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다.
 
*오늘날 이 땅의 모드 그리스도인은 말씀의 은혜를 기록하고 낭독하며 전달하는 소명을 받지 않았을까?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흔적과 기억을 간증하고 나누는 시간은 복되고 복된 시간임에 틀림이 없다.
 
 
*본문은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을 침공하기 전에 기록된 말씀을 통해 회개할 기회를 주시고 계신다. 임박한 멸망의 상황을 말하다가 그보다 앞서 기회를 주신 내용을 기록함으로서 유다가 왜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보여준다.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늘 우리의 삶을 되돌아 보게 하는 은혜를 준다. 수천년전에 기록된 말씀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일상에서도 역시 일어난 일을 통해, 기록된 말씀이 이미 누누히 경고했고 살 길을 제시해 준것을 깨닫게 된다.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햬와 능력이 아닌가!
 
*여호야김 4년에 기록한 말씀이, 같은 해 즉위한 느부갓네살의 푹풍과 같은 확장정책과 맞물려 이전부터 선포해오던 심판의 말씀을 확증시켜 주심으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또한 요시야 때부터 말씀해오신 것을 기록하게 하여 죄를 용서받을 기회를 주셨다(2~3절). 주로 심판의 말씀이었을 것이다(38:2,3).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들려주신 말씀을 착실하게 바룩을 통해 기록으로 남긴다. 주로 엄히 경고하시는 말씀들이었다. 전할 당시 무겁게 들었을 그 말씀이 이내 잊혀질 수 밖에 없기에 기록된 말씀으로 환기 시킴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말씀이 늘 현재에 말씀하시는 현재성을 살아있게 하였다.
 
*묵상을 통해 주신 은혜를 고단하지만 남겨두는 목적과 상통하다. 묵상하며 누린 깨달음과 말씀의 깊은 은혜들이 기록을 통해 여전히 살아 숨쉰다. 어쩌면 주님과 함께 동행하는 신앙의 삶은 곳곳에 남는 은혜의 기록을 다음세대에게도 이어지게 하는 자연스러운 의무를 즐겁게 감당하는 것이 아닐까?
 
*바룩의 협력이 인상깊다. 누구나 주인공컴플렉스가 있지만, 바룩은 철저하게 조력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예레미아의 손과 입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님의 손과 입이 되는 삶이다. 내가 거하는 어느 곳이든 그곳에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손과 입의 삶을 살아야 한다. 나 역시도 그런 삶을 살아내기를 노력하겠다.
 
*심판의 말씀을 듣고 고관들은 몸을 벌벌 떨었다. 그들은 이 말씀이 왕이 들어야 할 말씀인 것을 즉시 깨달았다. 하지만 왕에게 달려가기 전에 먼저 왕의 성정을 잘 알기에 말씀을 남긴 예레미야와 기록하고 낭독한 바룩을 피신 시킨다. 왕이 받아들이지 않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었다. 심판의 말씀을 듣고 어떻게 반응하는지 선명하게 드러난다. 말씀을 소신있게 전하는 이를 보호하는가? 아니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불편하면 이 때문에 그를 멀리하고 비판하지 않는가?
 
*나 또한 기록된 말씀대로 선포할 때 말씀을 듣는 이들의 반응이 이와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하겠다. 거절하고 배척 당하여도 주님의 말씀을 말씀대로 전해야 하겠다.
 
 
 
*주님, 기록의 힘을 깨닫습니다. 기록된 말씀이 오늘 나의 삶을 제대로 일깨우고 이끌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나에게 주신 은혜들을 차곡 차곡 기록함으로 훗날의 힘으로 삼겠습니다.
*주님, 주연이든 조연이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맡겨주신대로 감당하겠습니다.
*주님, 말씀을 말씀대로 받으며 반응하겠습니다. 바르게 전하는 자를 보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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