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가 선포한 여호와의 말씀을 기록한 두루마리가 겨울 궁 화롯불의 불쏘시개가 된다. 유다 왕 여호야김에게 왕권을 비판하는 예언자는 제거해 버려야 할 사회적 불안 요소 또는 정적에 불과했다.
예레미야의 말을 기록한 바룩은 그것을 고위 서기관들에게 낭독했었다. 그들은 경악했고 바룩에게 기록하게 된 경위를 물었었다. 이어 서기관들은 바룩이 낭독한 내용을 왕에게 전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16절). 이렇게 하여 여호야김에게 두루마리가 전달되었지만, 그의 반응은 서기관들과 달랐다. 여호야김은 낭독한 두루마리를 가져다가 칼로 베어 화로에 던져 불태운 것이다(23절). 여호야김의 상반된 반응은 여호와의 심판이 멈출 수 없음을 보여준다. 화로에 던져 사라진 두루마리는 다시 기록되고 처음에 기록된 말씀보다 내용을 추가하게 된다(32절).
- 화로에 던져지는 두루마리(20~26절)
두루마리의 내용을 알게 된 고관들은 왕을 찾아가 보고한다. 왕은 여후디를 보내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낭독하게 한다. 그런데 11~19절의 고관들의 반응과 왕과 측근들의 반응은 매우 상반된다. 고관들은 듣고 놀라 서로 바라보고, 예레미야와 바룩에게 몸을 숨기도록 권면하지만, 왕은 놀라지도 않고 더 나아가 바룩과 예레미야를 잡아 오게 한다. 이러한 왕의 모습은 유다의 멸망이 여호야김에 의해 되돌릴 수 없게 확정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유다를 파멸에서 구할 기회가 여호야김에게 주어졌지만, 그는 이를 잡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예레미야가 대변하는 여호와의 권위마저 짓밟아버렸다.
고관들로부터 보고를 받은 여호야김은 여후디에게 두루마리를 가져와서 읽게 한다(20~21절). 요약된 보고가 아니라 낭독하게 한 것이다. 이는 예레미야의 말이 가감 없이 그대로 왕에게 전달되었음을 의미한다. 36장에서 “~의 귀에 낭독하다”가 모두 열 번 사용되면서 듣는 자들의 반응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서기관들의 귀만 긍정적으로 반응하고 백성과 여호야김과 그의 측근 신하들의 귀는 부정적으로 반응했다. 특히 여호야김은 마침 아홉째 달(주전 604년 12월)이어서 화롯불이 타고 있는 겨울 궁전에 머물고 있었는데, 여후디가 서너 단을 낭독하면 서기관의 칼로 그것을 베어 화롯불에 던져 두루마리를 모두 태워 버린다(22~23절). 여호와의 말씀이 재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된 말씀에 조금도 두려움을 모르는 여호야김과 그의 주변 신하들은 하나같이 “그 모든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거나 자기들의 옷을 찢지” 않았다(24절). 앞서 고관들이 그 모든 말씀을 듣고 놀라 서로 쳐다본 것과(16절) 선명하게 대조된다. 한편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두루마리를 태우지 말도록 왕에게 간청해 보지만 왕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25절). 두루마리를 조각조각 잘라 불태워버린 왕은 “왕의 아들 여라므엘과 아스리엘의 아들 스라야와 압디엘의 아들 셀레먀”를 보내 예레미야와 바룩을 사로잡아 오게 한다(26절). 하지만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와 그의 동반자 바룩을 지켜주시기에 왕의 시도는 실패로 끝난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언제까지 숨어 지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여호야김의 통치 후반을 배경으로 하는 35장에서 예레미야는 자유롭게 활동하고 했다.
전체적으로 여호야김의 모습은 그의 아버지 요시야와 대조를 이룬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의 말씀을 듣고도 옷을 찢지 않는데, 요시야는 제사장 힐기야가 성전 수리 중에 발견한 율법책을 사반이 읽자, 그 말을 듣고 자기 옷을 찢는다(왕하 22:11). 여호야김은 부하들을 보내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아 오게 하지만, 요시야는 여 예언자 훌다에게 사절을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묻는다(왕하 22:12~14). 여호야김은 여호와의 말씀을 불쏘시개로 사용하고, 요시야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율법책에 기록된 언약의 말씀을 준수한다(왕하 23:3). 여호야김은 시신이 들판에 버려지는 저주받은 죽음에 떨어지고, 요시야는 평안히 묘실로 들어갔다(왕하 22:20). 여호야김은 악한 왕의 전형이고, 요시야는 여호와의 말씀 앞에 어떻게 서야 할지를 보여주는 모범적인 왕이었다.
- 다시 기록되는 두루마리(27~32절)
여호야김이 두루마리를 불살라버린 후 여호와의 말씀이 다시 예레미야에게 임한다(27절). 여호와께 두 가지 명령이 주어지는데, 첫 번째 명령은 두루마리를 준비해 첫 번째 두루마리에 기록했던 모든 말씀을 다시 기록하는 것이다(28절). 원문에서 “첫 번째”를 두 번 사용해 두 번째 두루마리가 첫 번째 두루마리의 완전한 복사본임을 강조한다. 여호야김이 첫 번째 두루마리를 모두 불태웠지만, 거기에 적힌 말씀은 하나도 변경되거나 상실되지 않았다. 첫 번째 명령이 그대로 실행된다(32절). 그런데 첫 번째 두루마리에 적힌 말씀뿐만 아니라 비슷한 내용의 많은 말씀이 더 첨가된다.
두 번째 명령은 두루마리를 태워 버린 여호야김에게 심판을 선포하는 것이다. 심판의 근거로 여호야김의 말이 인용된다(29절). 21~26절은 여호야김이 왜 예레미야와 바룩을 채포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동기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여호와의 인용을 통해 두루마리에 기록된 말씀의 내용 때문임을 알게 된다. 여호야김은 두루마리의 내용을 세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 바벨론 왕이 반드시 온다. 둘째, 그가 이 땅을 멸한다. 셋째, 사람과 짐승 곧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없애버린다. 이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고발하는 말씀에 이어 심판의 말씀을 두 가지로 예레미야에게 주신다(30절). 첫째, 여호야김에게는 후계자가 없을 것이다. 둘째, 여호야김에게는 왕에게 합당한 장례가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시신은 들판에 버려져 낮과 밤의 기온 차로 급속하게 부패하게 된다(렘 22:18~19). 두루마리를 낭독하는 대로 서기관의 칼로 잘라 화롯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 왕에게 그의 시신이 들판에 “던져지는” 징벌이 선언된 것이다. 또 심판의 대상이 왕을 넘어 “그의 자손과 신하들”과 “예루살렘 주민과 유다 사람”에게로 확대된다(31절). 두루마리의 말을 듣고 돌이키지 않기는 왕이나 일반 백성이나 다름이 없었다. 여호와께서 당신의 선포에 귀를 막는 자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하신다.
이 부분에서 분명하게 깨닫는다. 바벨론에 의한 유다의 멸망은 약소국의 비애가 아니다. 겉으로는 정치적인 파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여호와께서 이들의 죄악에 책임을 물으시는 신학적인 사건이다.
나는?
-자기 옷을 찢지 않고 두루마리를 찢은 여호야김… 말씀을 들은 여호야김의 반응은 성전에서 발견된 율법책을 읽고 난 후 그의 아버지 요시야가 보였던 반응과 정반대였다. 아버지 요시야는 자기 옷을 “찢고” 우상을 “불태웠는데”, 아들 여호야김은 칼로 두루마리를 “찢고” 불타는 화로에 두루마리 책을 던져 “불태워버렸다.” 그리고 두루마리의 말을 전하고 기록하며 낭독한 예레미야와 바룩을 잡으라고 명령했다.
-여호야김에게는 말씀이 응하는 여부보다 자기감정이 더 중요한 듯하다. 자기 생각과 중심을 거스르는 것은 모두 찢고 태워야 할 불온한 말일 뿐이었다.
-두려워하는 사람 vs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 고관들은 두루마리의 말씀을 듣고 “놀랐지만(파하드_두려워하다)”, 여호야김과 신하들은 “두려워하지(파하드)” 않고 자기 옷도 찢지 않았다. 더구나 엘라단과 들라야와 그마랴가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두루마리를 사르지 말라고 왕께 직언했으나, 왕의 행동이 백성 전체에게 미칠 영향을 고려하지 않고 기득권에 안주한 채 왕과 함께 돌 같은 마음으로 산 권력자들도 있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든지 신앙의 양심을 따라 아닌 것은 아니라 말할 수 있고,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지 않는 담대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다시 기록된 말씀, 심판이 더해진 말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여호야김이 불태운 두루마리 책의 내용을 다시 기록하라고 하신다. 두루마리는 불태울 수 있어도 하나님의 말씀은 불태우지 못한다. 도리어 더 많은 말씀들을 덧붙여 더 확고한 하나님의 의지가 담긴 책이 되게 하셨다. 겨울 궁전에서 바벨론을 통해 임할 재앙의 말씀들을 찢고 태워서 추위를 피했던 여호야김은 그 시신마저 버림받아 낮엔 더위를 밤에 추위를 피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말씀은 불태울 수 없다. 여호야김은 율법의 명령을 거스른 채 아버지 요시야와 달리 옷을 찢기보다 두루마리를 찢었다. 요시야의 개혁을 보았던 악볼과 사반의 아들들이 만류했으나 듣지 않고 겨울의 타오르는 화로에 조롱하듯 말씀을 던져버렸다. 그리고 오히려 선지자를 잡아들이라고 했다. 바벨론에게 멸망할 것이라는 말씀이 싫었기 때문이다(29절). 엄한 책망이나 징계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주변에서 충고해 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 여호야김처럼 말씀을 태우는가? 아니면 내 고집과 욕망을 태우는가? 말씀을 찢는가? 아니면 내 마음을 찢는가?
*동일한 말씀이었다. 그런데 서기관 고관들은 이 말씀에 전심으로 반응했다. 하지만 백성들과 여호야김, 그리고 신하들은 멸시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회복될 기회를 스스로 거절한 것이다. 말씀에 대한 나의 마음은 어떠할까? 부디 서기관들과 같은 마음과 안목이 유지되기를 기대한다. 말씀이 늘 나의 마음에 풍성하게 거하여 기민하게 반응하도록 마음과 정성을 다해야 하겠다.
*주님, 날마다 제게 읽히고 마음에 들어오는 말씀에 나의 자아를 찢으며 나아가겠습니다.
*주님, 두루마리를 잘라서 화롯불에 던질 수 있지만, 결코 불태울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많은 말씀으로 기록된 것을 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불태워 없애려 하지만, 절대 사라지지 않음을 봅니다. 그 말씀이 오늘 나와 함께 함을 믿습니다.
*주님, 같은 말씀, 다른 반응을 보며 내가 취해야 할 반응을 봅니다. 늘 말씀에 기민하게 반응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