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스스로 속이지 말라 [렘 37:1-10]
 – 2024년 07월 24일
– 2024년 07월 24일 –
본 장은 시드기야가 왕으로 등극하게 된 계기를 잠시 언급한다. 바벨론은 그를 왕으로 세웠으나 시드기야는 바벨론을 배신하려 한다. 이에 바벨론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했고, 이후에 잠시 예루살렘을 떠나며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심판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유다의 멸망이 초읽기에 들어간다. 시드기야는 여호와의 긍정적 개입을 기대하며 예레미야에게 사절을 보내 신탁을 구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여호와의 답변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전혀 없었다.
 
시드기야가 예레미야에게 사절을 보내 여호와의 신탁을 구하는 이야기는 21:1~7과 37:1~11에 두 번 등장한다. 두 이야기가 동일한 이야기인지는 불확실하다. 사절의 파견도 두 번 이었는지도 확실하지 않다. 하지만 배경은 차이가 분명한데. 21장의 내용은 예루살렘이 포위당했을 때이고, 본문은 예루살렘의 포위가 일시적으로 풀렸을 때이다.
 
 
 
1. 36장과 37~39장의 내용 이해
37~38장은 유다가 멸망하기 직전 예레미야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39장은 멸망의 날을 보고한다. 시드기야 왕의 마지막 시기를 배경으로 일어난 일들이다. 그런데 이 사건들의 위치를 36장에 이어 배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36장의 사건 이후 17~18년 후의 사건들인데, 오히려 동일한 배경을 가진 34장 다음에 배치하는 것이 흐름이 자연스럽다(34:21~22는 37:5, 7~8과 직접 연결되기 때문이다).
 
문맥상 34장에서 여호와 앞에서 계약을 맺고 종들을 자유롭게 놓아주었던 예루살렘 사람들이 애굽의 개입으로 바벨론 군대가 잠시 포위를 풀자 해방됐던 종들을 다시 잡아들여 종으로 부렸다. 이런 불순종에 여호와께서는 바벨론 군대를 바벨론 군대를 다시 오게 하여 성을 빼앗아 불사르게 하신 것이다(37장). 이런 관점에서 36장을 배경으로 37~39장을 읽어야 한다. 어떤 두려움도 없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두루마리를 불에 태워버리는 여호야김 왕의 오만이 여호와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37~39장은 여호야김 왕 때 확정된 심판의 구체적인 집행 과정이다.
 
 
 
2. 도입(1~2절)
1~2절은 39장까지의 내용의 도입부 역할을 감당한다. 시드기야는 여호야김의 아들 고니야(여호야긴)의 뒤를 이어 바벨론에 의해 유다의 왕으로 앉혔다(1절). 바벨론 연대기에 의하면 주전 598년 겨울 서쪽으로 원정을 떠난 느부갓네살이 597년 3월에 예루살렘을 점령한다. 그는 유다 왕 여호야긴(고니야)을 포로로 잡아가고 그의 삼촌 맛다니야를 보좌에 앉히고 이름을 시드기야로 바꾼다(왕하 24:17). 시드기야 왕권은 이런 이유로 처음부터 바벨론에 종속적이었다. 그런데 시드기야가 바벨론을 배반한다. 그의 배반은 봉신 조약의 파기이며 그를 유다의 왕으로 임명한 느부갓네살의 개인적 권위에도 큰 상처를 준 사건이었다.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의 배반을 철저하게 보복한다.
 
이렇게 이루어진 느부갓네살의 예루살렘 침공은 신학적으로는 유다의 불순종을 징계하는 것이었다. 시드기야와 신하들과 그의 땅 백성은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전하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다(2절). 총체적인 불순종이다. 왕을 포함한 예루살렘의 정치 지도자들뿐 아니라 백성도 예레미야의 선포를 무시했다.
 
 
 
3. 시드기야의 신탁(기도) 요청(3~5절)
시드기야 왕은 두 사람을 예레미야에게 사절로 보내 “우리를 위하여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라(3절)”고 부탁한다. 이와 같은 중보기도 요청은 예언자의 역할이기에 그 자체로 문제 되지 않는다. 특이한 것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서도(2절), 여호와를 “우리 하나님”으로 부른다. 극단적인 위기 속에서 도움이 필요할 때만 여호와를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여호와를 일방적으로 유다 백성의 구원자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절로 파견된 여 후 갈 것과 스바냐는 추측건대 각각 예루살렘 정치와 종교를 대표한 인물들인 듯싶다. ‘여후갈’은 ‘셀레먀의 아들’로 소개되는데 38:1에 등장하는 ‘셀레마의 아들 유갈’과 동일 인물이라면 예레미야에게 매우 적대적인 인물이었다. 또 성전 관리의 책임을 맡은 ‘마아세야의 아들 제사장 스바냐’는 우호적인 인물이다(29:24~32). 이들을 파견해 중보기도를 요청한 이유에 대해서는 뒤늦게 나온다. 다만 예레미야의 개인적인 상황이 설명된다(4절). 아직 갇히지 않은 상황에서 사절단을 맞이한다.
 
5절은 당시 예루살렘의 정치적인 상황을 추가 설명하는데, 애굽의 군대가 유다를 돕기 위해 원정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갈대아인들이 예루살렘 포위를 풀고 물러났을 때였다. 애굽의 개입은 시드기야가 애굽을 섬기기 위해 바벨론에 등을 돌렸음을 시사해 준다. 주전 589-570년까지 애굽을 통치한 바로 호프라(44:30)는 포위된 예루살렘을 구출하기 위해 588년 초여름에 군대를 동원하여 출정했다. 올라오는 애굽 군대를 막기 위해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의 포위를 일시적으로 푼다. 하지만 예루살렘 사람들의 기대와는 달리 애굽 군대는 참패를 당하고 물러난다. 예루살렘은 고립무원이 되고 말았다.
 
시드기야는 애굽의 출정 소식을 듣고 소망을 품고 사절을 예레미야에게 보내 하나님의 뜻을 구한 것으로 추측된다.
 
 
 
4. 여호와의 응답(6~10절)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시드기야의 두 사절을 통해 “유다의 왕”에게 심판 의지를 전달하신다. 주목해야 할 하나님의 표현은 시드기야가 “우리 하나님”으로 부르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소개하시고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지칭하신 것이다. 시드기야가 통치하는 “유다”의 하나님이 아니라 (신학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신다. 하나님과 시드기야 사이에 거리감이 확실히 보인다.
 
또 하나님은 “내게 구하게 한”이라는 표현을 통해 단지 중보기도를 부탁한 시드기야의 요청을, 신탁을 구한 것으로 간주하신다. 그리고 시드기야가 피하고자 했던 메시지가 답변으로 주어진다(7~8절). 바벨론 군대가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애굽 군대가 돌아가고, 포위를 풀고 떠났던 바벨론 군대가 반드시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함락하고 불태워 버릴 것이다. 여호와께서 내리시기로 하신 심판은 어떤 경우에도 취소되지 않는다. 9절에서 애굽 군대의 출정과 바벨론 군대의 철군이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해방의 기대감을 불러서 일으켰음을 보여준다. 이런 상황은 당시 거짓 구원 예언자들의 선포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들은 목소리를 높여서 바벨론의 굴레로부터 임박한 해방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일시적인 호전에 들떠 상황을 오도하지 말 것을 엄중하게 경고하신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에서 살아남을 길은 전혀 없다. 일시적으로 바벨론 군대에 손해를 입힌다고 해도 예루살렘은 반드시 점령당한다. 바벨론 군대가 패하여 부상자들만 남는다고 할지라도 이들이 진영에서 일어나 예루살렘 성을 잿더미로 만들 것이다(10절). 예레미야의 이런 선포는 사람들의 막연히 들뜬 기대와 소망에 찬물을 끼얹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체포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다.
 
 
 
나는?
-경고하신 대로 바벨론에 의해 유다가 기울어지고 있다. 바벨론은 여호야긴의 반란을 진압한 후 시드기야를 꼭두각시 왕으로 세웠다. 그러나 그도 궁중 안에서 여전히 득세했던 친애굽파에 굴복하여 애굽의 바로 호프라와 공모하고 바벨론에 반역을 꾀하였다(주전 588). 이에 바벨론은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다. 예레미야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오아과 신하들은 듣지 않는다. 요시야왕 이후 40년 가까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수용하라고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줄곧 거절당하는 사역이었다. 변화나 회개나 갱신의 역사가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능이나 실패를 뜻하지 않는다. 예레미야의 사역은 그 시대에 그가 꼭 해야 했을 “거룩한 악역”이었다. 주위에 올바른 말씀을 전하지만 가난과 비난, 고난의 쓴잔을 마시고 있는 사역자들에게 격려와 후원과 기도를 보내야 할 이유가 아니겠는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다시 포위하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사람을 보내 기도를 요청한다. 아마도 이사야의 기도로 산헤립의 군대 18만 5천 명이 후퇴한 기적(주전 701년, 왕하 19:35~36)과 같은 것을 기대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기도를 요청하기 전에 자기 옷을 찢고 회개를 해야 했다. 한편 바로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도우려고 출정했다는 소식과 때마침 바벨론 군대가 일시적으로 퇴각하게 되는데, 이 일로 고관들은 풀어주었던 노예들을 다시 잡아들였다. 시드기야 역시 예루살렘은 절대로 망하지 않는다는 긍정의 신학을 더욱 신봉하게 된다. 하지만 분별해야 한다. 환경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중요한 요인이기도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는 없는 것이다.
 
-잠시 퇴각했던 바벨론 군대는 다시 돌아오고 시드기야가 하나님보다 더 의지했던 애굽 군대는 자기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때 말씀에 귀를 막고 굳게 붙잡았던 예루살렘의 무조건적 안전과 번영신학은 자기기만으로 밝혀질 것이고, 조금만 저항해도 예루살렘은 불태워질 것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확신하고 착각하고 있는 것은 없는지 돌아볼 일이다.
 
 
*바벨론의 2차 침공의 결과 시드기야가 조카 대신 왕이 되었다. 이런 상황을 통해 예레미야가 선포한 하나님 말씀의 신실함을 인정해야 하는데 여전히 거절한다. 바벨론의 3차 침공이 시작되자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에게 기도를 요청한다. 그런데 때마침 애굽의 원군이 움직이자, 바벨론이 잠시 물러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왕과 백성들의 악함은 변함이 없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는 그들의 기도 요청은 그저 위기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었다. 참 회개나 경건의 모습은 전혀 아니다. 하나님 앞의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일회적인 경건이 아닌 주님과의 지속적인 관계의 신실함이다.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백성들도 예레미야를 외면하였다(1~2절). 그는 늘 강대국의 눈치만 살폈다. 오늘의 세계와 다를 바 무엇일까? 믿음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아니 계신 것처럼 세상에 질리고, 현실만 보고 겁에 질려 있다. 어느 순간 믿음은 일종의 진통제로, 찬양은 명상음악으로, 기도는 스트레스 해소의 방편이 되어버렸다. 정작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뿜어 나오는 담대함이 사라졌다.
 
*백성 앞에서는 당당한 시드기야 왕은 불안과 초조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몰래 사람을 보내 선지자에게 기도를 요청했다. 상황상 애굽의 군대를 이용해 바벨론을 몰아내달라는 기도를 요청했을지도 모른다. 즉, 하나님보다 애굽 군대를 더 의존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이 잠시 군대를 물리자, 언약을 철회해 버렸던(34:8~22) 모습을 보면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기억해야 한다. 기도하면서도 늘 불안이 떠나지 않는 이에게 기도는 한낱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신뢰하지 않는 증거일 뿐이다.
 
*하나님은 시드기야의 기만적인 신앙 행동에 속지 않으신다. 기도는 요청하지만, 정작 자신은 회개하지도 않고 옷을 찢지도 않았다. 하나님을 의뢰한다는 어떤 행동도 찾아보기 어렵다. 시드기야는 그저 예레미야의 힘을 빌려 위기를 모면하고 자신들을 돕기 위해 움직인 애굽 군대가 바벨론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 대로(34:2~5) 예루살렘을 멸하시겠다고 하신다. 심지어 부상한 갈대아인만으로도 예루살렘을 무너뜨릴 수 있다고 하신다(6~10절).
 
*이것은 예루살렘의 멸망이 바벨론의 손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으며, 또 반드시 망하리라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찾기도 하고 부르기도 하지만 정작 그분과 직면하기는 두려운가? 하나님과 상관없이 혼자 스스로 잘될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아닌가? 나 자신을 속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다.
 
 
 
*주님, 시드기야의 하나님을 기만하는 행동이 나 또한 상황과 여건이 되면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아 서글픕니다. 하나님을 진실하고 신실하게 믿고 따르겠습니다.
*주님, 회개와 변화 없는 허울만 좋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기도만 하고 주신 말씀대로 행동하지 않는 오만한 삶을 살지 않겠습니다.
*주님, 심판은 확정되었음을 강조하시는 단호함을 봅니다. 심지어 바벨론의 부상병들에라도 무너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변치 않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봅니다. 심판이 그러할진대, 구원은 더욱 올바르고 선명하게 그 길을 여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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