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억울한 투옥_토굴 감옥에서 시위대 뜰로 [렘 37:11-21]
 – 2024년 07월 25일
– 2024년 07월 25일 –
예루살렘의 운명이 막바지에 접어들면서 예레미야의 고난도 더 심해진다. 예루살렘의 포위가 잠시 풀린 틈을 타서 집안일을 처리하려고 고향으로 내려가던 예레미야는 베냐민 문에서 적에게 항복하려 성을 떠난다는 억울한 죄목으로 체포된다.
    
예언자들의 고난과 관련하여 여호야김에 의해 죽은 예언자 우리야의 경우(렘 26:20~23)를 제외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당국자들에 의해 체포되어 구금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왜냐하면 예언자의 체포는 예언자가 대변하는 여호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이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여호야김의 체포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예레미야가 예루살렘이 함락되기 직전 구속당한다. 바벨론 진영으로 넘어가려고 성을 떠난다는 혐의로 수문장 이리야가 예레미야를 체포하고, 분노한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때리고 감옥에 넣었다. 이 사건은 예루살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에 대한 당국자들의 적개심과 폭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이들의 눈에 예레미야는 예언자라기 보다는 배반자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본문이 직접 언급하지 않지만, 예레미야의 체포와 구금은 하나님의 허락에 따른 것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바벨론의 멸망을 선포한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활동이 길고 험난한 여정을 마칠 때가 된 것이다. 그가 선포한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 왔기에 더 이상의 선포가 불필요해졌다.
    
    
    
1. 옥에 갇힌 예레미야(11~16절)
본 단락은 예레미야가 어떻게 옥에 갇히게 됐는지를 보여준다. 때는 갈대아인들의 군대가 바로의 군대로 인해 예루살렘에서 잠시 물러갔을 때였다(11절). 37장의 문맥에 따르면 시드기야에게 그의 두 사절을 통해 여호와의 메시지가 전달된 직후이다. 또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 포위를 풀었기 때문에 성 밖 출입이 다시 가능해졌고, 그때 예레미야는 고향 베냐민 땅 아나돗에 다녀와야 할 일이 생긴다(12절). “분식을 받으려고”의 구체적인 내용은 불분명하다. 조상에게 속한 재산의 상속을 주장할 수 있는 법적인 권리와 같은 것으로 추측된다. “거기에서 백성 가운데서”라는 표현을 통해 상속권을 주장하기 위해 친족들의 모임에 참석하는 것이 꼭 필요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렇게 고향으로 내려가려고 성을 떠나던 예레미야는 “베냐민 문”을 책임지고 있던 셀레마의 아들 이리야에 의해 바벨론 군대에 항복하러 간다는 혐의로 체포된다(13절). 예레미야의 선포 메시지를 고려하면 이리야의 의심은 근거가 있었다. 22:8~9를 통해 항복의 길이 생명의 길임을 대놓고 주장했다. 또 37:9~10에서도 예루살렘이 반드시 갈대아인들의 군대에 의해 불꽃의 먹이가 될 것을 선포한다. 이런 예레미야의 언행은 바벨론의 군대에 맞서 성문을 지키는 이리야의 눈에는 제 목숨을 구하기 위해 도망하는 탈주병처럼 보였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이리야의 말(‘네가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는도다’_13절)을 그대로 받아 (‘나는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려 하지 아니하노라’) 라고 그가 받는 혐의를 단호하게 “거짓이다”라고 주장해 보지만, 이리야는 예레미야의 말을 듣지 않고 그를 잡아 고관들에게 넘겨 매를 때리고 옥에 넣는다(15절). 26장에서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무죄를 선언했지만, 본문에서 분노한 고관들은 재판 절차도 무시하고 예레미야를 때리고 옥에 가둬버린다. 또 36장에서는 일부 고관들이 위기에 처한 예레미야를 도와주었지만, 역시 본문에서는 아무도 없다. 그렇게 예레미야는 “서기관 요나단의 집”에 갇힌다. 그곳의 빛과 공기가 거의 차단된 어둡고 습한 지하 토굴에 버려진다. 예레미야의 목숨이 대적들의 손에 거의 넘겨진 것이다.
    
    
    
2. 시드기야와 예레미야의 만남(17~21절)
지하 토굴에 감금된 지 “여러 날(직역하면 많은 날)”이 지나 시드기야 왕이 사람을 보내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불러 그에게 “비밀히” 묻는다. 예루살렘의 상황이 절망적으로 치닫고 있었다. 추론하자면, 애굽 군대를 맞아 잠시 포위를 풀었던 바벨론 군대가 애굽을 물리치고 다시 돌아와 예루살렘을 포위했을 가능성이 크다. 왕은 예레미야와의 만남이 신하들의 눈에 띄지 않게 극히 조심한다. 왕권이 눈에 띄게 약화 된 것이다.
    
시드기야는 “여호와로부터 받은 말씀이 있느냐?”는 왕의 질문에 예레미야는 먼저 “있나이다”라고 답변하고 뒤이어 말씀의 내용을 알려준다(17절). “왕이 바벨론의 왕의 손에 넘겨지리다”라는 신탁이 주어지지만, 시드기야의 반응은 언급하지 않는다. 이때 예레미야는 왕에게 두 가지 질문을 제기한다.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이라기보다 비난이나 책망이 담긴 질문이다. 첫째, 왕뿐만 아니라 왕의 신하들과 유다 백성 누구에게도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고 자신의 무죄를 주장한다(18절). 이러한 주장 속에서는 자신을 옥에 가두기로 한 고관들의 결정에 왕도 연루됐음을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왕은 최고 재판관이었다. 왕이 모르는 신하들만의 결정이라면 왕이 바로 잡아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거짓 구원 예언자들과 관련이 있다. “바벨론 왕이 당신들과 이 나라를 치러 오지 않을 것이요 하고 당신들에게 예언하던 당신들의 예언자들은 어디 있습니까(19절)”라고 묻는다. 누가 참 예언자이고 거짓 예언자인지 확실해졌는데, 역설적으로 참 예언자는 옥에 갇히고 거짓 예언자들은 조용히 숨어 버린 것이다. 왕은 누가 왕과 왕의 신하와 백성에게 잘못을 범했는지를 바르게 판결해 주어야 한다. 다시 찾아온 절망적인 상황 앞에 구원 예언자들의 기회주의적인 침묵을 고발하고 다른 한편으로 백성을 오도하여 멸망의 구렁텅이에 빠뜨린 구원 예언자들이야말로 옥에 넣어야 할 자들이 아니냐고 항변하는 것이다.
    
질문을 마친 예레미야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청을 왕에게 구한다(20절). 자신의 석방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요나단의 집에 있는 지하 토굴로 돌려보내지만 말아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아마도 시드기야가 신하들의 손아귀에서 자신을 구출해 주기에는 능력이나 용기가 없음을 알았던 것 같다. 이 간청에 시드기야가 긍정적으로 반응한다. 아이러니하게도 예레미야의 말에 대하여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이다. 그리하여 예레미야를 시위대의 뜰에 머물게 한다. 그리고 성에 떡이 모두 동날 때까지 “떡 만드는 자의 거리”에서 날마다 떡을 가져다주게 한다(21절).
    
고립무원의 예레미야가 왕의 도움으로 죽음의 위기를 넘긴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예언자로 인정하고 그에게 여호와의 말씀을 묻지만, 전해준 말씀에 순종하여 결단을 내릴 만한 용기는 없었다. 38:9과 52:6을 참고하면 성이 함락되기 직전에 성 중에 떡이 완전히 동난 것 같다. 시위대 뜰에 옮겨진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함락되는 날까지 거기에 잡혀 있다가(38:28), 예루살렘이 함락된 후 바벨론 점령군에 의해 해방된다(39:14).
    
    
    
나는?
-예레미야가 토굴에 갇혔다. 바로 군대의 출정으로 바벨론이 예루살렘 포위를 잠시 풀고 퇴각한 사이에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 아나돗으로 가다가 베냐민 문을 지키는 이리야에게 붙잡힌다. 예레미야는 완강히 부인했지만, 그는 선지자가 바벨론에게 항복하러 간다고 우기면서 그를 요나단 집 토굴 옥에 가둬버린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하지 않는 문지기에게 자기가 전한 말씀 때문에 고초를 당한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말씀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받아 애매한 고난을 겪을 때가 있다. 이렇게 고난 겪는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베드로가 권면하는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 “부당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벧전 2:19)”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포위를 풀었던 바벨론 군대는 애굽 군대를 격퇴하고 다시 예루살렘을 에워싼다. 이때 시드기야는 요나단의 토굴에 갇힌 예레미야를 불러 하나님께 받은 말씀이 있는지를 은밀하게 묻는다. 시드기야의 마음에 드는 말을 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지만, 수십 년간 전해온 말씀 그대로 바벨론에 의한 왕의 심판을 아주 직설적으로 전한다. 인간적으로 일단 어떻게 해서든 풀려나서 그 후에 더 열심히 사역하겠다고 핑계하면서 말씀을 왜곡하지 않은 것이다.
    
*감옥에 있는 예레미야는 육신을 고통스러우나 마음은 당당한데, 예레미야를 가둔 왕은 오히려 불안하고 초조해한다. 선지자를 의지하면서도 고관들이 무서워 몰래 예레미야를 불러 혹시나 희망적인 말을 해줄까 기대한다. 그러나 예레미야는 몸은 속박당했으나 진실은 손상하지 않았다. 순간적인 고통을 모면하려고 진리에 눈감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겠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선처를 호소한다. 다시 요나단의 토굴에 갇히지 않도록 해달라고 간청한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이런 호소를 했을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신뢰한다고 고난이 쉬운 것은 아니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가 참 선지자임을 알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기 원했지만, 그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주지 않았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선지자의 예언을 싫어하는 고관들의 심기를 거스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지자의 무죄를 알기에 요나단의 토굴 감옥 대신에 왕궁 바로 옆에 있는 시위대 뜰에 두었다. 시드기야는 왕이면서도 바벨론과 고관들 사이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소신껏 실천하지 못한 가엾은 사람이었다.
    
*예레미야는 유약한 왕 시드기야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솔직하게 고통과 죽음의 두려움을 토로하고 자신이 부당하게 죽는 것을 막아달라고 요청한다. 시드기야는 그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석방하지 못하고 시위대 뜰로 옮겨서 매일 떡 한 덩이로 연명하게 한다(32장의 시위대 뜰에서의 토지 매매 배경). 진리를 전하고 당당하게 살려 하나, 세상은 핍박을 서슴지 않는다.
    
    
    
*주님, 애매히 고난을 받는 예레미야의 고통이 느껴집니다. 말씀 사역자로서 이런 각오를 다지며 전해야 함을 느낍니다. 어떤 상황에서든 말씀을 왜곡하지 않도록 제게도 용기를 주셔서 담대하게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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