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가 다시 고관들에 의해 반역자로 체포돼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진다. 물은 없고 진흙만 있는 구덩이에 빠졌기에 예레미야가 생존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도움의 손길이 완전히 끊어진 순간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곳에서 도움이 온다. 본문은 종교 지도자뿐만 아니라, 정치 지도자들이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상황을 묘사한다. 죽이려는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심판 선포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구덩이에 던져져 죽을 위기에 직면하나, 에벳멜렉이라는 이방인에 의해 생명을 구한다.
이 사건이 벌어진 것은 예레미야의 심판 선포가 있고 난 후이다. 이를 들은 “스바댜, 그다랴, 유갈, 바스홀”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시드기야가 “왕은 조금도 너희를 거스를 수 없느니라(5절)”라고 말한 것을 고려할 때, 그들은 유다 사회에서 고위직에 있는 집안 출신임을 추정할 수 있다. 시드기야는 그들의 요청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예언자는 구덩이에 던져졌고, 그곳에서 죽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6절). 그런데 이런 유대 지도층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다. 구스(에티오피아) 사람 에벳멜렉이다. 그는 유대 지도자들의 행위를 “악하다”고 말하며(9절),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이에 예레미야는 다시 한번 목숨을 구할 수 있었고, 다시 “시위대” 뜰에 머물게 되었다.
1. 구덩이에 던져진 예레미야(1~6절)
“스바댜, 그다랴, 유갈, 바스홀”이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선포한 메시지를 문제 삼아 고발한다. 4절은 이들을 왕에게 나아갈 수 있는 “고관들”로 부른다. “모든 백성”은 시위대 뜰을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메시지를 고발의 증거로 사용한다. 2절은 21:9를, 3절은 32:3을 인용한다. 바벨론에 의한 예루살렘의 점령은 여호와의 결정으로 어떤 경우에도 취소될 수 없다. 성의 멸망이 확정됐기에 성을 떠나는 것만이 살길이다. 성안에 머물기로 작정한 자들은 여호와의 의지에 맞서는 자들로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다 죽임을 당하겠지만, 경고에 따라 성을 떠나 갈대아인들에게로 넘어가는 자들은 목숨은 구한다. 이에 고관들은 예레미야의 선포에 근거해서 그를 반역자로 처형할 것을 왕에게 요청한다(4절). 고관들의 눈에 예레미야는 백성의 평안이 아니라 재앙을 구하고 성에 남은 군사와 백성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자였다. 결사 항전을 선포해도 부족할 판에 저항을 포기하라고 경고하는 예레미야는 그들의 처지에서 민족의 배신자요, 바벨론의 부역자였다. 이들은 예레미야의 선포를 인용하지만, 그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고 경멸적인 호칭 “이 사람(이 자)”이라고 부른다. 여호와를 유다 민족의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자들에게 여호와는 구원의 하나님이시기에, 그분께서 보내신 예언자는 당연히 평안을 선포해야 했다. 물론 예레미야도 평안을 선포했다. 그러나 구원 예언자들과 달리 그는 심판 이후의 평안을 선포했다(29:11; 33:6, 9).
포위당해 절망적으로 싸우고 있는 상황에서 적에게 항복을 권하는 예레미야는 반역 죄인임이 틀림없다. 고관들의 고발에 대하여 시드기야가 응답한다.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 왕의 답변은 그의 체념과 무기력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5절). 먼저 왕은 예레미야가 고관들의 손안에 있음을 인정하고 이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락한다. 이에 예레미야가 그의 생명을 노리는 자들의 폭력에 넘겨지고 만다. 왕의 두 번째 말은 예레미야를 넘겨주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변명이다. 왕이지만 신하들을 통제할 힘이 없기에 예레미야를 넘겨줄 수밖에 없다고 한탄한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의 처형이 자신의 자발적 결정이 아니라 고관들의 강요 때문이었다고 변명하면서 책임을 그들에게 돌린다. 이로써 최고 재판관의 의무를 포기하고 만다.
왕의 허락을 받은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붙잡아 시위대 뜰에 있는 “왕의 아들 말기야의 구덩이”에 던져 넣는다(6절). 예레미야를 밧줄에 묶어 내려보냈다는 것은 구덩이가 상당히 깊었음을 시사한다. 예레미야가 물은 없고 진흙만 있는 구덩이에 떨어진다. 예레미야의 생명이 거의 끝나간다.
2. 구스인 에벳멜렉을 통한 구출(7~13절)
고관들이 왕을 강요해서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에 집어넣었기에 예레미야의 구출은 불가능해 보인다. 왕과 고관들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진흙으로 덮인 깊은 구덩이에 던져서 마실 물도 먹을 양식도 없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예레미야에게 관심을 가진 사람은 의외로 이방인이었다. 뜻밖에도 궁전에 있던 구스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가 고관들에 의해 구덩이에 넣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행동에 나선다. 왕이 왕궁 밖에 있었지만, 그는 왕이 돌아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왕을 찾아 나선다(8절).
왕궁의 실세인 고관들의 결정에 맞서는 에벳멜렉의 행동은 목숨을 담보로 한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개역 개정의 번역에는 없지만, 원문에는 1절과 7절은 동일하게 “그리고 그가 들었다(와이이슈마)”로 시작한다. 스바댜도 듣고 행동에 나서고 에벳멜렉도 듣고 행동에 나선다. 예레미야가 모든 백성에게 이른 말을 들은 스바댜는 왕에게 예레미야를 사형에 처하도록 요청하고, 예레미야가 구덩이에 던져졌다는 소식을 들은 구스인 에벳멜렉은 왕에게 예레미야의 구출을 호소한다. 왕이 어떤 이유나 목적에서 “베냐민 문”에 앉아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통적으로 성문에서 재판이 열리기에 왕이 법적 문제에 관한 백성의 호소를 듣고 판결해 주기 위해 성문에 앉았을 수 있다. 한편으로는 바벨론의 포위 공격을 받는 성의 방비를 직접 살펴보기 위해 시찰을 나갔을 가능성도 있다. 공교롭게도 예레미야가 체포된 “베냐민 문” 바로 그 문 앞에서 예레미야의 구출이 결정된다.
구스인 에벳멜렉이 왕도 거스를 수 없었던 고관들(5절)에 홀로 맞선다(9절). 그는 먼저 예레미야를 참소하여 구덩이에 던져 넣은 고관들의 행위를 악으로 고발한다. 이들이 한 일은 모두 악하다는 것이다. 이어서 그는 예레미야의 절망적 처지를 언급한다. 이미 성 중에 떡이 다 떨어졌기에 구덩이에 던져진 예레미야는 거기서 굶어 죽을 수밖에 없다고 호소한다. 한편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이 사람(4절)”으로 부른다. 반면 에벳멜렉은 “예언자”로 칭하고 고관들을 “저/이 사람들”로 부른다. 흥미롭게도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인정하지 않고 홀대하는 고관들이 이방인 왕궁 내시에 의해 홀대받은 것이다. 유대 백성에게 버림받은 예레미야가 이방인에 의해 예언자로 인정받는다.
이러한 에벳멜렉의 개입에 시드기야도 적극적으로 반응한다. 힘이 없다는 핑계로 예레미야를 고관들의 손에 넘겼던 왕이 그가 구덩이에서 죽지 않을까 걱정한다. 왕은 베냐민 문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 가운데서 서른 명을 데리고 가서 예언자 예레미야가 죽기 전에 구덩이에서 끌어내도록 에벳멜렉에게 명령한다.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내는 것은 대여섯 명으로 충분했겠지만, 왕은 고관들의 방해나 저항을 염두에 두고 서른 명을 데려가게 한 듯하다.
11~13절은 예레미야를 구출하는 장면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술한다. 왕의 명령을 받은 에벳멜렉은 신속하게 움직이면서 구출 계획도 세우고 그대로 실행한다. 먼저 왕궁 창고로 가서 구출하는 데 필요한 물품을 마련하여 예레미야에게 간다. 고관들은 예레미야를 구덩이에 던져 넣었지만(6, 9절), 에벳멜렉은 바닥의 진흙에 더러워지지 않게 “헝겊과 낡은 옷”을 줄에 묶어 예레미야에게 내려보낸다. 그는 구출 중에 예레미야가 다치거나 사고가 나지 않도록 신중하게 일을 진행한다. 겨드랑이와 줄 사이에 헝겊과 낡은 옷을 끼워 넣게 한 후 줄을 당겨 예레미야를 구덩이에서 끌어 올린다.
나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면 살겠지만, 항복하지 않고 저항하면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죽을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듣고 네 사람의 고관들이 시드기야 왕을 찾아가 그를 죽이라고 요청했다. 그가 남은 군사들과 모든 백성을 격려하는 샬롬의 말이 아니라 사기를 떨어뜨리는 재난의 말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들은 당장 듣기에 좋은 거짓 샬롬이 치명적인 독과 같고, 듣기에 거북한 진실이 약이 된다는 것을 몰랐다. 나의 욕심을 북돋아 주고, 내 수치를 가려주며, 내 생각을 정당화해 주는 말이 늘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진정한 샬롬은 오늘의 혹독한 수치와 부끄러움을 감내하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이를 수 있다.
-고관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말씀을 전한다고 진흙 구덩이에 던졌다. 혹시 나의 모습은 어떤가? 불편하게 하는 말씀을 전하는 자를 이렇게 대면하지는 않는가? 진리가 불편하다고 불의에 고개 숙이지는 않는가? 순종하기에 거북스러운 하나님의 말씀보다 내 마음에 편안한 세상의 말을 더 신뢰하지 않는가?
-시드기야 왕의 어리석음과 우유부단함이 속상하다. 시드기야는 친애굽파 고관들의 요구에 따라 예레미야를 사지로 떨어뜨리더니, 또 예레미야를 살려달라는 에벳멜렉의 간청도 즉시 수용한다. 세례 요한을 죽인 헤롯 안티파스처럼, 예수님을 죽음에 넘긴 빌라도처럼, 시드기야도 예레미야의 무죄함을 알았지만, 권력의 자리를 지키려고 진실을 외면하였다. 모질게 악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기 권력을 잃더라도 유다의 운명만은 하나님의 손에 맡길 만큼 확고한 믿음과 용기를 갖춘 것도 아니었다. 예레미야를 죽이지도 못하고 석방하지도 못하는 무기력한 왕이라니…
-반면 에벳멜렉의 용기가 놀랍다. “유대” 방백들은 선지자를 죽음에 몰아넣는데, 이방 내시(환관) 에벳멜렉은 왕과 반대파 방백들 앞에서 자신의 안전을 돌아보지 않고 왕에게 예레미야의 구원을 요청한다. 바벨론 군대의 포위 기간이 길어지면서 성 중에 떡이 떨어진 상황에서 죄인인 예레미야를 진흙 구덩이에 방치하여 죽이려는 그들의 악함을 정면으로 맞선 것이다.
-에벳멜렉은 예루살렘의 심판을 선포한 예레미야가 악한 것이 아니라 그의 입을 막고 그를 죽이려는 시도들이 “악하다”고 대담하게 지적한다. 에벳멜렉은 하나님의 말씀을 소신껏 전하기 위해 차별과 부당한 폭력에 희생되는 예레미야를 위해 자신을 돌보지 않는 든든한 변호자, 조력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자기 민족에게 철저히 배척받아 죽을 위기에 있는 예레미야를 이방인(구스인) 환관을 통해 구원하신다. 예수님도 가장 잘 영접할 것 같았던 종교 지도자, 제자들, 고향 사람들과 가족들에게까지 오해와 배척을 받으시며 돌아가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망의 구덩이에서 예수님을 건져 주셨다. 하나님 편에 설 때 고난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자신의 이름을 위해 고난 겪는 이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이방인 에벳멜렉이 예레미야를 구출하는 과정을 자세하게 기록하였다. 이는 마치 유다의 살길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임을 구출의 모든 과정을 지켜보는 왕과 유다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것 같다. 이처럼 내가 에벳멜렉과 같이 되어 곤경에 처한 이를 변호해 주고 구덩이에서 건져 줄 예레미야와 같은 이가 주위에 없을까?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면, 고관들과 같은 행태가 아니라 에벳멜렉과 같이 말씀에 반응하여 선하고 의로운 걸음을 걸어야 하겠다.
*주님, 고관들의 완악함, 시드기야의 비겁함이 에벳멜렉의 의롭고 담대한 용기와 비교됩니다.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면서 에벳멜렉과 같은 의기를 결행하며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