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은 시드기야 왕 제9년에 바벨론에게 포위를 당하여 제11년 4월에 함락된다. 본 장은 시드기야 제9년(주전 588)을 언급한다. 37:5과도 연결된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이 제11년 4월에 함락되고 그곳에 있던 모든 지도자가 도망갔지만, 결국 바벨론에게 잡혔다고 기록한다. 시드기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예레미야는 시드기야와 그 아들들이 당한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는데, 그들은 ‘여리고 평원’에서 붙잡혔고 시드기야는 아들들의 죽음을 봐야만 했다. 왕을 따르던 귀족들은 죽임을 당했고, 시드기야는 두 눈을 뽑힌 채 사슬에 묶여 바벨론으로 끌려가야 했다(6~7, 9절). 예루살렘의 멸망과 함께 유다의 지도층은 전멸당했고, 그들이 소유했던 토지는 유다 땅에 남아있던 자들에게 넘어갔다(10절).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난 시드기야 왕과의 마지막 만남 직후, 시드기야 왕 제십일 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 군대에 의해 멸망 당한다. 요시야왕 열셋째 해부터 선포한 예레미야의 예언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성취된다. 이 장에서는 시드기야의 운명(38:4~6, 14~28; 39:4~7)과 구스인 에벳멜렉의 운명(38:7~13; 39:15~18)이 대조적으로 기술된다.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고(37:17), 구스인 에벳멜렉은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않는다. 시드기야는 두 눈을 빼앗기고 사슬로 결박돼 바벨론으로 끌려가고(7절), 에벳멜렉은 ‘노략물같이’ 자기 목숨을 얻는다. 시드기야는 고관들의 위협에 굴복하여 예레미야를 저들(고관들)의 손에 넘겨주고(38:4), 에벳멜렉은 고관들이 예레미야에게 한 짓을 ‘악하다’고 정죄한다. 시드기야는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선포를 따르지 않고, 에벳멜렉은 예레미야를 예언자로 인정하고 위기에 처한 예레미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내놓는다. 순종하지 않은 시드기야는 참혹한 심판에 넘겨지고, 고관들의 불의에 용감하게 맞선 에벳멜렉은 여호와로부터 인정을 받는다. *구스인 에벳멜렉은 렘 17:7에서 선포한 “무릇 여호와를 의지하는 그 사람은 복을 받을 것이라”의 전형적인 예가 된다.
1. 예루살렘의 함락(1~10절)
시드기야 왕 제구 년 열째 달, 느부갓네살에 의해 포위된 예루살렘은 제십일 년 넷째 달 아홉째 날에 성벽이 뚫리고 점령당한다(1~2절). 18개월의 포위로 양식이 떨어진(38:9) 예루살렘은 기근으로 전투력을 상실하고, 성벽을 파괴하는 바벨론 군대를 막지 못한다(52:6). 52:12~13에 따르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성전과 왕궁과 모든 집을 불사른다.
시드기야는 야음을 틈타 “왕의 동산 길”을 따라 성벽 사이의 통로를 지나 도성 밖으로 탈출하여 아라바 쪽으로 피신한다(4절). 바벨론의 공격이 집중된 북쪽을 피해 남쪽으로 성을 빠져나간 것이다. 하지만 시드기야의 시도는 성공하지 못한다. 여리고 평지에서 사로잡혀 하맛 땅 립나에 있는 느부갓네살의 사령부로 끌려간다(5절). 느부갓네살은 시드기야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들들을 죽인 후에(6절) 그의 두 눈을 뽑고 사슬로 묶어 바벨론으로 끌고 간다(7절).
한편 예루살렘 성을 점령한 바벨론 군대는 “왕궁과 백성의 집”에 불을 지르고 성벽을 허물어 버린다(8절). 다시는 이 성에 거주할 수 없게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특히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해 주는 성벽의 파괴가 치명적이다. 느헤미야에 의해 성벽이 재건되기까지 예루살렘 주민은 적의 위협에 노출된 채 살아야 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은 성에 남아있던 백성과 항복한 자들과 그 밖의 남은 백성을 바벨론으로 사로잡아 가지만(9절), 모든 사람이 잡혀가지는 않는다. 예루살렘과 유다의 지배 계층에 속한 자들과 사회적 경제적으로 독립된 시민들과 수공업자들이 주로 유배당하고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낮은 지위에 있던 자들은 대부분 폐허가 된 가나안에 그대로 남겨진다. 느부사라단은 “포도원과 밭”을 유다 땅에 남겨진 “아무 소유가 없는 빈민들”에게 나누어준다(10절). 혁명적인 토지의 재분배였다. 주류에 속했던 자들이 사로잡혀 가서 생긴 빈 곳을 주변부에 속했던 빈민들이 차지한다.
2. 예레미야의 석방(11~14절)
시드기야의 비극을 중심으로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고한 다음에 예레미야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왕과 예레미야의 운명이 완전히 엇갈린다. 여호와의 말씀을 듣기는 하지만 그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 시드기야는 도주에 실패하고 바벨론 군대에 사로잡혀 모진 고초를 당하고, 끝까지 여호와의 말씀을 선포하다가 유다 고관들에 의해 죽음의 문턱까지 떨어졌던 예레미야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 의해 석방되고 후대를 받는다. 예레미야의 석방은 아직 남겨진 사명이 있어서 허락된 일시적 구원이다. 예레미야 역시 유다 민족과 다윗 왕조의 멸망이라는 파국적 재앙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이후 40~44장에 나오는 이야기는 예레미야의 고난이 그가 선포한 심판 예언의 성취로 끝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예레미야는 끝까지 유다 백성과 함께 멸망의 무거운 짐을 진다.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의 활동을 알고 있었고,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에게 예레미야를 석방해 환대하고 그의 요구를 다 들어줄 것을 명령했다(11~12절). 이에 느부사라단은 시위대 뜰에서 예레미야를 데려다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겨 집으로 돌려보내게 한다(13~14절). 하지만 예레미야는 물러나 있지 않고 두려움과 절망감에 사로잡힌 백성들과 함께 머문다(14b절). 그다랴는 40:5에 따르면 바벨론 왕이 유다의 총독으로 세운 인물이고 그의 아버지 아히감은 예루살렘의 고위 관료로서 여호야김의 위협으로부터 예레미야의 생명을 보호해 준 사람이었다(26:24).
3. 에벳멜렉의 구원(15~18절)
예레미야의 구원 이야기 다음에 갑자기 구스인 에벳멜렉의 구원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에 대한 구원의 약속은 예레미야가 시위대 뜰에 갇혔을 때 임하였다. 내용상으로나 시간상으로 38:7~13절의 이야기와 자연스레 연결된다. 그때 에벳멜렉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 예루살렘 성이 무너진 후 의도적으로 등장한다. 특이한 사실은 이 단락에서 구원의 약속이 주어졌으나 이어지는 석방 이야기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그러므로 구원 약속의 성취를 (간접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예레미야의 석방 이야기 다음에 배치된 것으로 추측된다. 예레미야에게 나타난 약속의 성취가 에벳멜렉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구원의 성취를 보장해 준다.
예레미야가 구스인 에벳멜렉의 도움으로 사지에서 벗어나 시위대 뜰에 머물고 있을 때(38:13) 여호와의 말씀이 내린다. 말씀은 에벳멜렉에게 주는 구원의 약속이다. 당시 예레미야를 반역자로 처형하려는 고관들의 강압적인 요청을 왕이 승인했기에 예레미야를 위해 나선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위험한 일이었다. 특히 그 사람이 이방인이라면 죽음을 자초하는 행동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고관들의 불의에 맞서 여호와의 예언자를 살린 에벳멜렉의 헌신은 여호와에 의해 인정을 받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구원의 약속을 예레미야에게 에벳멜렉에게 가서 전하게 하신다. 약속에 앞서 멸망의 날이 왔음을 알려준다. 에벳멜렉은 왕궁 내시(환관)였기에 바벨론 군대의 칼날을 피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너를 구원하리라(1:8)”라는 약속을 주셨듯이 에벳멜렉에게도 “내가 그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17절)”라고 약속해 주신다. 시드기야 왕은 “바벨론 왕의 손”에 넘겨지지만(37:17), 그의 시종인 에벳멜렉은 대적의 손에 넘겨지지 않는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를 “이는 네가 나를 믿었음이라(17:7)”라고 분명하게 밝히신다. “여호와를 의지하며, 의뢰하는 사람은 복을 받는다고 말씀하신 대로(렘 17:7) 이방인 에벳멜렉이 복을 받았다.
나는?
-그날이 오고야 말았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에게 최후의 날이 왔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불에 탔다. 자기기만으로 포장해 왔던 그들의 헛된 신념도 붕괴하였다. 아모스 시대부터 선지자들이 줄곧 경고하던 바로 그 “여호와의 날”이다. 하나님의 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고 하면서 “샬롬”을 외치던 많은 거짓 선지자의 말이 틀렸고, 예레미야 선지자의 경고가 옳았음이 증명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멸시하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자유와 특권을 주장할 수 없음이 분명해졌다. 회개하지 않아도 무사히 지나간 오늘 같은 날이 내일도 이어진다고 누구도 보장할 수 없는 것이다.
-영원하리라고 믿었던 예루살렘 성을 이방인에게 넘기시는 하나님이시다(1~3절). 왕까지 쥐락펴락하며 흔들던 유다의 고관들은 온데간데없고 바벨론의 고관들로 가득하다. 오래 참고 기다리며 거듭 회개를 촉구하고 살길을 제시하는데도, 자기들의 신학만을 고수한 채 죄악의 길을 걷는 이들의 기대를 무너뜨리셨다.
-혹시 이처럼 하나님 나라 삶의 원리는 달가워하지 않으면서 나의 구원은 문제없다는 막연한 기대 속에 살고 있지는 않는가? 심판의 때는 반드시 온다.
-선지자를 통해 예언하신 대로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보다 더 두려워했던 유다의 고관들이나 애굽이 시드기야의 안전을 지켜주지 못했다. 탈출을 시도했으나 붙잡히고 말았다(4~10절). 그가 마지막으로 본 것은 자기 아들들이 비참하게 죽는 장면이었다. 아들들을 가슴에 묻고 두 눈이 뽑힌 채 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시드기야를 상상해 보라. 언약을 어기고 자기 민족을 노예로 삼으면서도(34:18~20),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키실 것이라고 자신을 속였던 귀족들도 모두 죽었다. 왕궁은 불탔고 성벽은 허물어졌다.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진 이날을 기억한다면, “도적같이” 오신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있는가? 깨어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가? “설마 그날이 오겠는가?” 하며 방종하며 여전히 어두움의 삶에 머무르고 있지는 않는가?
-바벨론의 예루살렘 점령이 하나님의 경고를 업신여긴 이들에게는 죽음과 포로의 날이 되었으나, 작은 조롱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가감 없이 주의 말씀을 전달한 예레미야에게는 자유의 날이 되게 하셨다. 느부갓네살은 예레미야를 선대하고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시드기야 왕과 모든 군사를 궁과 도시에서 도망치게 하였던 바벨론 왕의 고관들(3~4절)이 예레미야에게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와 거할 수 있게 하는 조력자들이 되었다.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섬기거나 우선하는 모든 것은 나를 그것들의 노예로 삼거나 나의 평안을 빼앗지 않는 것이 없다. 물질, 명예, 관계…. 모두가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지키기 위해 조롱받고 고통받으며 소외당하는 삶은 하나님의 때가 이르면 하나님이 나의 평안이 되어 주심을 믿어야 한다.
-목숨을 걸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예레미야는 석방되고 선대를 받게 하신다(11~14절). 예레미야의 말을 듣고 먼저 항복한 이들이 선지자에 관해 바벨론에 말해 준 듯하다. 유다의 방백들에는 철저하게 배척받았으나 바벨론의 시위대장과 모든 고관의 호의를 받고 안전하게 보호받는다.
-이방인임에도 하나님의 선지자 예레미야를 구덩이의 죽음에서 건져내도록 위험을 무릅쓰고 시드기야 왕에게 간청한 구스 사람 에벳멜렉을 구원하신다(15~18절). 그가 믿은 것은 선지자 예레미야를 보내신 하나님이었다. 선지자가 전한 심판 말씀의 신실함이었다.
-혹독한 심판 중에도 구원받은 자가 있다는 것은 바벨론의 예루살렘 침공과 파괴가 단지(단순하게) 강대국의 횡포가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일어난 일임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또 이스라엘은 죽거나 포로로 잡혀가는데 이방인을 구원하신 것은,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것이 혈통에 기댄 거짓 안전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임을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
*주님, 말씀하신 대로 심판은 임하고 말았습니다. 예루살렘 멸망의 역사가 다시 오실 주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게 합니다. 반드시 임하게 될 “다시 오실 예수님의 날”을 사모하며 기다리겠습니다.
*주님, 그 기다림의 시간을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채우겠습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가 “믿음”이라는 것을 잊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