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을 점령하고 파괴해버린 바벨론은 그다랴를 총독으로 임명한다.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 유다의 안정을 되찾게 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제한된 범위에서 자치권을 허락받은 그다랴는 미스바에 자리를 잡고 신속하게 혼란을 수습하여 파괴된 유다를 재건한다. 한편 석방된 예레미야는 고국에 남아서 백성과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한다.
1. 예레미야의 석방(1~6절)
예레미야가 라마에서 풀려난 후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다(1절). 그런데 이 말씀의 내용은 42:7~18에 가서야 나온다. 그럼에도 이렇게 기록한 목적은 유다가 멸망했으나 예언자로서의 예레미야 활동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인식시키기 위함인 듯하다. 예레미야를 통한 여호와의 개입은 멸망 이후에도 계속 된 것이다. 왜냐하면 멸망이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와 느부사라단과의 대화를 통해 그의 입을 빌어 말씀하신다. 느부사라단의 말은 바벨론 사령관의 말이 아니라 여호와의 의지를 대변하는 말로 읽도록 도입부를 제시한다.
2~6절이 느부사라단과 예레미야의 대화이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과 유다의 다른 모든 사람과 함께 포로로 잡혀 바벨론으로 끌려가다가 라마에서 친위대장 느부사라단에 의해 석방된다(1절). 39장에서 시위대 뜰에서 석방된 예레미야가 어떻게 다시 사로잡혀 다른 유배자들과 함께 바벨론으로 끌려가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왕의 명령에 따라 예레미야를 다시 체포했으리라고 생각하기 어렵다. 아마도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가 유배지들 가운데 있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듯하다.
그는 예레미야를 풀어주기 앞서 예루살렘의 멸망 원인을 유다의 불순종으로 지적한다(2~3절). 특이하게도 유다 백성에게 거절당했던 예레미야가 구스인 에벳멜렉(38:9)과 갈대아인 느부사라단에 의해 여호와의 예언자로 인정을 받는다. 느부사라단은 예레미야를 풀어주면서 자기와 함께 바벨론으로 갈 것인지 또는 유다 땅에 남을 것인지 마음대로 하도록 제안한다(4절). 그는 예레미야를 점령지의 포로가 아니라 완전한 자유인으로 대우한다. 39:12의 기록과 일치하는 대우를 했다. 느부사라단은 그다랴에게로 돌아가서 그와 함께 백성 가운데 살든지, 또는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고 말하며 예레미야에게 길에서 먹을 양식과 선물을 주어 보낸다(5절). 예레미야는 그다랴에게 가서 그와 함께 그 땅에 남아 있는 백성 가운데 산다(6절).
2. 안정을 되찾는 유다(7~12절)
느부갓네살은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총독으로 임명했다(5, 7절). 그에게 유다를 맡기고 바벨론에 잡혀가지 않은 자들을 돌보게 한다. 그다랴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떠나 미스바에 자리를 잡고 혼란과 두려움에 빠진 유다를 안정시키기 위해 애쓴다(6, 10절). 남쪽의 유다 산지로 피신했던 저항 세력들도 바벨론 점령군이 세운 그다랴의 통치를 받아들인다. 저항 세력의 지도자들도 그다랴에게로 돌아온다(8절). 그다랴는 이들에게 예레미야의 선포와 동일하게 두려워하지 말고 바벨론 왕을 섬기며 그의 재건 사업에 동참할 것을 호소한다(9절). 그러면서 각각의 역할 분담을 제안하는데, 자신은 미스바에서 갈대아인들을 상대하고, 그들에게는 각자 마음에 드는 성읍으로 가서 정착하여 살 것을 부탁한다(10절).
또 그다랴에게 유다의 통치를 맡겼다는 소식이 유다의 경계 밖까지 전해진다. 전쟁과 기근을 피해 요단 동편 모압과 암몬과 에돔 땅으로 흩어져 있던 유다 사람들이 돌아와 성읍에 정착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11~12절). 12절에서 ‘포도주와 여름 과일을 심히 많이 모으니라’라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다시 유다 땅을 축복하기 시작하셨음을 의미한다. 심판이 끝나고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고, 전후의 궁핍함이 신속하게 극복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한편 예레미야서에서 예레미야는 자주 “사반” 집안에 속한 인물들의 도움을 받는다. 사반은 요시야 왕의 종교개혁에 참여한 인물이다(왕하 22:3 이하). 사반의 아들 아히감은 26:24에서 여호야김의 위험으로부터 예레미야의 목숨을 보호해준다. 왕하 22:14에 의하면 아히감은 여호와의 신탁을 묻기 위해 요시야 왕이 예언자 홀다에게 파견한 사절들 가운데 한 명이다. 사반의 또 다른 아들 엘리사는 시드기야 왕의 사신으로 바벨론에 갈 때 예레미야의 편지를 바벨론 유민들에게 전해준다(29:3). 느부사라단은 석방된 예레미야를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맡겼다.
3. 감추어진 위험(13~16절)
유다를 안정시키고 재건하려는 그다랴의 시도는 예기치 못한 위험에 직면한다. 그다랴에게 돌아온 유다 저항군의 모든 지휘관은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암몬 자손의 왕 바알리스”와 공모하여 그다랴를 암살할 생각으로 돌아왔다고 알려 주지만, 그다랴는 이들의 정보를 신뢰하지 않는다(13~14절).
그러자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이 은밀하게 그다랴를 찾아가 유다의 남은 자들을 위해 자신이 아무도 모르게 이스마엘을 죽일테니 허락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지만 그다랴는 요하난이 이스마엘에 관해 거짓을 말한다고 하면서 그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한다(15~16절). 그다랴가 왜 이스마엘의 암살 제보를 받아들이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그다랴의 이스마엘에 대한 신뢰는 결국 요하난이 걱정한 대로 “모인 모든 유다 사람을 흩어지게 하며 유다의 남은 자로 멸망을 당하게” 한다(41:16~43:7).
나는?
-느부사라단이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하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스라엘이 외면한 하나님의 말씀을 적군의 사령관이 기억하고 있었다. 더 놀라운 것은 바벨론을 통해 예루살렘에 임한 재난을 여호와의 목소리에 청종하지 않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이다.
-바베론의 근위대장 느부사라단이 가진 하나님에 대한 이해가 유다 사람들의 둔감함과 무지함과 선명하게 비교된다. 강대국의 힘을 행사하는 그가 “모든 일을 주관하는 하나님이 유다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고 그 이유는 유다의 죄 때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는 예레미야가 선언했던 예언에 담긴 함의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느부사라단의 입을 통해서 유다가 멸망한 이유를 말씀하신다. 정작 귀 기울여 들어야 했던 유다 백성은 외면했지만, 이방의 장군들은 새겨들었다. 이로 보건데 바벨론을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음도 보여 주는 것이 아닌가 짐작되기도 한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지 않으면 믿지 않는 자들을 통해서 비난과 책망을 듣게 하신다.
-예레미야는 선대하겠다는 바벨론의 제안을 뒤로 하고 남은 자기 백성 곁으로 가기로 결정한다. 그것이 더 고생스러운 길이지만 더 옳은 일이라고 여겼다. 고달픈 삶은 지금까지로 족하다고 여길 만하지만, 예레미야는 부요함이 아니라 부르심을 따르기로 한 것이다.
-그다랴는 심판의 현실을 수용했다. 바벨론 왕이 떠나고 그다랴가 통치한다는 소식을 지휘관들과 그 부하들이 미스 바의 그다랴에게로 모여들었다. 모압, 암몬, 에돔 지역에 흩어져 있던 유다백성들도 돌아왔다. 하지만 그다랴가 그들에게 준 것은 이스라엘의 재건의 꿈이 아니었다. 바벨론 왕을 섬기고 정상적인 생산활동을 재개하라는 명령이었다.
-그 상황에서 여름 과일과 포도주를 거둔다. 29:5에서 이미 예레미야가 예언한 대로다. 포로로 끌려간 백성이든, 유다 땅에 남은 백성이든 그들의 삶은 이어져야 한다. 다윗 왕가가 이끈 유다의 멸망의 상황에서 그다랴는 새로운 희망을 싹 틔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새로운 질서를 용납하지 못하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다윗 가문에 속한 이스마엘이었다.
-바벨론에게 항복한 사람들에게 정치적인 안정과 경제적인 번영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교만한 선민의식과 민족주의로 무장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다윗 가문의 왕과 방백과 귀족들이 죽고 포로로 잡혀간 것과 대조적이다. 세상 기준에 적합한 인생이기보다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 애쓰는 삶이 되어야 한다.
-그다랴의 이런 모습은 민족주의적인 시각에서 볼 때는 나라를 등지는 매국으로 보이겠지만, 선지자의 메시지를 귀 기울여 들은 그다랴는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수용하는 태도이며, 또 짧게 끝나지 않을 바벨론 통치기를 살아내는 현명하고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여긴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그다랴는 심판의 경고뿐 아니라 회복의 약속도 믿고서 그날까지 이 백성을 돌보고 세우려고 했던 사람이었던 것이다.
-요하난을 비롯한 모든 지휘관이 그다랴를 찾아가 암몬 왕의 부추김을 받은 이스마엘이 암살할지도 모른다고 강력하게 주의를 준다. 요하난이 남몰래 다시 찾아가 설득까지 했지만 이스라엘을 향한 그다랴의 신뢰를 꺾지 못했다. 그다랴의 마음은 이렇게 어려울 때 한 사람이라도 더 공동체를 디시 추스르는 데 동역자로 삼고 싶었을 것이다.
-지나친 비약일 수도 있지만, 사탄은 우리의 선한 의도, 훌륭한 대의명분, 온정적인 마음까지도 간교하게 사용하여 공동체를 무너뜨리려고 넘볼 것은 확실하다.
*주님, 심판직후 다시 시작해야 할 남은 유다 백성의 고달픈 삶이 상상이 안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하신 인도하심이 고달픈 삶 속에서도 포도를 거두고 풍성한 추수를 누리게 하심을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