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하나님의 뜻을 구해본들, 이미 정한 마음이 흔들릴까? [렘 42:1-14]
 – 2024년 07월 31일
– 2024년 07월 31일 –
애굽으로 내려가는 도중 게롯김함에 임시로 머물던 요하난 일행은 예레미야를 찾아가 여호와의 신탁을 부탁한다. 이들은 여호와로부터 어떤 말씀이 주어지더라도 그 말씀에 순종하겠다고 예레미야에게 확약한다.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유다가 멸망했기에, 예레미야의 예언적 권위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굳건해졌다. 또, 예언의 성취를 몸으로 경험했기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실 말씀에 대한 신뢰를 진정성 있게 고백하는 것처럼 보인다(6절).
    
    
    
1. 예레미야를 찾는 요하난 일행(1~6절)
그다랴를 살해한 이스마엘을 추격하여 쫓아버리고 그가 사로잡아가던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을 구출한 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지 않았다. 40:15에서 요하난이 우려한 “유다의 남은 자”가 멸망에 떨어질 위기가 현실로 다가온다. 바벨론의 관점에서 유다 사람이 바벨론 왕이 세운 총독을 죽인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바벨론의 보복은 피할 수 없어 보인다. 이런 현실적인 암울함이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결정하게 된다. 그런데 애굽을 향해 내려가다가 베들레헴 근처 게롯김함에서 쉬게 되었을 때 예레미야 선지자를 떠올리게 된다. 문맥상, 이 지역에 예레미야가 머물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요하난과 여사냐를 포함하여 ‘모든 군대의 지휘관과 백성의 낮은 자로부터 높은 자까지 다’ 예레미야에게 나아온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예레미야와의 대화에 참여했기에 후에 누구도 핑계 댈 수 없었다. 모두 자기가 한 말과 들은 말에 대하여 책임져야 한다. 이들은 예레미야에게 자신들의 절망적인 처지를 호소하면서 자신들을 위해 여호와께 중보해줄 것을 간청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찾아온 목적을 고백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가 마땅히 갈 길과 할 일을 보이시기를 원하나이다(3절).”
    
그다랴가 암살당한 후 이들이 느낀 충격에 두려움과 혼란에 휩싸여 있음을 고스란히 표현된다. 그리고 애굽으로 가는 길을 계속 가야 할지 또는 다른 길이 있는지 예레미야를 통해 여호와께 묻는다. 예레미야는 이들의 부탁을 기꺼이 들어준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를 부탁하자, 예레미야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해 주겠다고 응답한다(4절).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는 그들에게 여호와께서 이들에게 응답하시는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고 다 전달해 줄 것을 약속한다. 그러자 신탁을 부탁한 자들도 순종을 굳게 약속한다. 그들은 여호와를 “진실하고 성실한 증인”으로 세워 “우리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당신을 보내사 우리에게 이르시는 모든 말씀대로 행할 것”을 약속한다(5절). 더 나아가 어떤 말씀이 주어지든 간에 순종할 것을 확약하면서 순종이 축복의 길임을 고백한다(6절).
    
    
    
2. 여호와의 응답(7~14절)
열흘이 지난 후에 여호와의 응답이 주어진다(7절). 놀람과 두려움에 사로잡혀 애굽으로 내려가려던 요하난 일행에게는 꽤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43:2~3에 따르면 기다림이 길어지자, 사람들은 예레미야에게 의심을 품게 된 것 같다. 이들은 거듭 순종을 약속하고 순종이 복을 가져다준다고 고백했지만, 이들의 순종은 결과적으로 열흘을 넘기지 못한다. 여호와로부터 응답이 주어지자, 예레미야는 모든 일행을 다 부른다(8절). 그리고 여호와의 답변을 전달하기에 앞서 그들이 자신을 찾아와 중보기도를 부탁했음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이 신탁은 예레미야가 개인적으로 기도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들의 청탁에 따라 여호와께 간구해서 받은 것(9절)이기에 여호와의 응답에 순종할 책임이 있음을 강조한다.
    
10~12절은 여호와의 답변 내용으로 조건적으로 응답이 주어진다. 10절은 “애굽으로 내려가지 않고 유다 땅에 그대로 머물러 살면 구원을 받아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선포하신다. “세우고 헐지 아니하며”, “심고 뽑지 아니하리니”와 같은 표현은 24:6에서 1차 바벨론 유배민들에게 주어진 약속의 말씀 그대로 반복하신 것이다. 24장에서 1차 바벨론 유배민들을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로 선포했었는데, 유다가 멸망한 후 가나안에 남은 자들에게도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가 될 가능성이 주어진 것이다. 이어지는 11~12절은 요하난이 처한 상황이 관련된 약속의 말씀이다. 바벨론 왕을 두려워하는데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여호와께서 이들과 함께하시며 이들을 바벨론 왕의 손에서 구원하실 것이기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여호와께서 불쌍히 여기시기에 바벨론 왕도 이들을 불쌍히 여겨 고향 땅으로 돌려보낼 것이다. 선행하는 여호와의 자비가 바벨론 왕의 자비를 결정한다. 왜냐하면 바벨론 왕이 유다를 지배하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서 유다의 남은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로 하셨기에 바벨론 왕에게는 자비를 베푸는 것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13~14절은 경고의 말씀이다. 42장에서 이 경고의 말씀은 13절부터 23절까지 길게 주어진다. 이는 요하난 일행이 유다에 남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을 선택할 것을 시사해 준다. 예루살렘이 바벨론의 공격을 받을 때 여호와께서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22:7)”을 두신 것처럼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 유다를 떠나려는 자들 앞에 다시금 구원에 이르는 권면의 말씀과 멸망으로 끝나는 경고의 말씀을 두신 것이다.
    
    
    
나는?
-정신없이 애굽으로 내려가던 중에 베들레헴 근처까지 내려와서야 예레미야를 찾아 “갈 길과 할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을 묻는다.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모두 좋든지 좋지 않든지 순종하겠다고 맹세하고, 여호와를 성실하고 진실한 이 맹세의 증인으로까지 내세운다. 하지만 “이제서야 하나님의 뜻을 묻는” 그들의 속내를 짐작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결정을 정당화하고 싶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20절). 이미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결정하실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오만하게 예레미야에게 신탁을 부탁했다.
    
-이런 그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우리의 모습이 비친다. 하나님께 들으려는 태도보다는 하나님을 내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기도의 모습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 선지자에게 나와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1~3, 5~6절). 그들의 태도만 보면 대단히 간절하고 진실한 기도처럼 보인다. 보잘것없는 형편을 아뢰고(2절), 무슨 말씀이든 “행하고, 순종하겠다”라고 3차례나(5~6절) 반복하여 밝힌다. 예레미야를 향하여 “당신의 하나님”으로 부르다가 “우리의 하나님”으로 바꿔 불러가며 하나님께 대한 친밀감을 표시한다. 또, 하나님을 자신들의 진실함을 증언해 줄 증인으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미 애굽이 가 있었다(41:17; 43:2).
    
-이런 모습은 자기가 원하는 말을 들으려 했던 시드기야와 다를 바가 없었다. 경건의 모양을 꾸미는 더 악한 자들이 아닐 수 없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되 마음은 멀기만 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속지 않으시고 그들의 마음을 보신다. 그리고 경고의 말씀을 먼저 해주신 것이다(13~14절).
    
-예레미야가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봐서 그들의 의도를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숨김없이” 말하겠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뜨끔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3차례나 청종하겠다고 반복하지 않았을까? 이런 모습을 보면 질문하게 된다. 나는 과연 숨김없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싶은 사람일까? 또, 청중들의 뜻과 다르더라도 숨김없이 전달하는 전달자일까?
    
    
    
-하나님은 10일 후에야 응답하신다. 그동안 상황은 악화하였을 것이고, 바벨론에 대한 두려움도 커졌을 것이다. 그들이 진실로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마음으로 기도를 요청했는지가 드러나는 시간이기도 하다. 믿음은 기다림이다. 믿음의 기도는 주님의 때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비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무리의 두려움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럼에도 바벨론을 피하지 않고 이 땅에 머물러야 산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고 함께 계셔서, 구원하시겠다고 하신다. 유다 백성들은 똑같은 명령에 불순종했지만, 이들은 지금이라도 순종하면 뜻을 돌이키시겠다고 하신다(10~12절). 하나님이 세상보다 크신 분임을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납득하기 어려운 요구였을 것이다. 지금 우리 안의 두려움이나 스트레스의 원인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을 두려워하지 않고 정말 염려해야 할 일(영생)을 염려하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요하난과 함께한 남은 백성들에게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이 땅에 머물라고 하신다. 불쌍히 여겨 구원하여 줄 것이니 바벨론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불안한 마음을 달래 주신다. 이미 유다의 멸망이라는 심판을 시행하셨으니, 이제 주께서 이스라엘 땅에서 하실 일은 긍휼을 베풀어 심고 세우시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요하난 일행이 할 일은 염려와 불안의 옷을 벗고 긍휼과 회복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 아닌가? 지금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내 문제를 하나님보다 더 크게 보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은 요하난을 따르는 무리 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신앙의 불씨를 보고 계셨다. 그들은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대신에 전쟁도 없고 기근도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애굽을 택하고 싶었다. 그러나 바벨론의 보복도 근거 없는 걱정이었고, 애굽에서의 절대 평화와 번영도 근거 없는 망상이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상상이 빚어낸 헛된 염려와 무익한 망상에서 우리를 건져 현실 속에서 뿌리내린 옹골진 믿음으로 살게 할 수 있다.
 
    
    
*주님, 속마음을 숨긴 채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는 무리의 모습이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정한 마음을 확인하려는 교만한 그들 앞에 하나님께서는 저들이 원하는 답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보여 주셨습니다. 내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뜻을 오롯이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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