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이 여호와의 심판에 떨어진다. 그들은 우상숭배와 불순종으로 유다와 예루살렘이 여호와의 심판에 넘겨져 폐허가 된 것을 보고도 달라진 것이 없었다. 멸망을 초래한 조상들의 악행을 잊고 같은 길을 간다.
예레미야 44장은 애굽으로 도피한 자들을 향한 선포이다. 예레미야는 그들을 향해 과거를 회상하며, 예루살렘이 왜 멸망했는지를 상고하도록 한다. 그들은 “우상숭배”를 하며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켰다. 여호와께서는 예언자를 보내 그 가증한 일을 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3~5절). 예루살렘을 폐허로 만든 것은 유다 백성이었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예레미야는 “조상들의 악행과 유다 왕들의 악행, 왕비들의 악행, 백성의 악행, 아내들의 악행”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며 지도자에서부터 백성까지 악행(우상숭배)이 가득함을 선포한다. 그들의 “악행”은 “율법과 규례”를 어기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지나온 역사를 타산지석이나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가르침은 자주 무시되거나 잊힌다. 같은 종교적, 정치적 뿌리에서 나온 북 왕국 이스라엘이 주전 732년과 722년에 앗수르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그러나 유다에게는 남의 일이었다. 유다는 이스라엘의 멸망에서 자신들의 생존을 위한 신학적 가르침을 끌어내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유다도 거의 유사한 길을 간다. 597년과 587년, 두 번에 걸친 바벨론의 침략으로 결국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많은 사람이 유배를 떠났다. 출애굽에서 시작한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출애굽 이전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그렇게 파국적인 재앙을 경험하고 애굽으로 피난 내려온 유다 사람들의 태도는 멸망 이전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1. 도입(1절)
44장은 “애굽 땅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을 대상으로 들려주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벨론이 침략하자 많은 사람이 칼과 기근을 피해 애굽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여호와의 경고를 무시하고 예레미야와 바룩을 데리고 애굽으로 들어간 요하난의 무리도 그들 가운데 일부였다. 거론된 성읍들과 지역 이름은 유다 사람들이 애굽 전역에 흩어져 살았음을 보여준다.
믹돌은 다바네스 동쪽에 있는 성읍으로 출애굽 출발 경로를 언급할 때 등장한다(출 14:2; 민 33:7). 애굽의 가장 북쪽에 있다. 요하난 일행이 정착한 다바네스는 나일 삼각주 동쪽 연안에 있다(오늘날 이집트 펠루시움 남서쪽의 텔 데프네에서 유적지가 있다). 이 지역은 군사 식민지로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하였다. 놉은 “멤피스”로 알려진 도시이다.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있고 애굽 고왕조 시대의 왕도였다. “남쪽의 땅”을 의미하는 바드로스는 지역 이름으로 상부(남부 내륙) 애굽을 가리킨다. 즉, 유다 사람들이 하부(삼각주 지역)에서 상부(나일강 상류, 내륙) 애굽에 걸쳐 정착했다는 의미다. 그들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를 통해 선포된다.
2. 유다의 재앙과 그 원인(2~6절)
예레미야는 애굽에 사는 모든 유다 사람에게 예루살렘과 유다가 그렇게 처참하게 멸망한 원인에 대하여 잘 생각해 보도록 권면한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예루살렘과 유다 모든 성읍에 불러들인 모든 재난을 보았다(2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왜 이런 재앙을 내리셨는지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는 그 원인을 우상숭배가 여호와의 노여움을 촉발하고 그분의 노여움이 재난을 불러왔다고 선포한다(3절). 3절의 “악행”과 2절의 “재앙”은 동일한 히브리어 단어 “라아”의 번역이다. 여호와의 정의에 따르면 악행과 재난은 불가분리의 관례에 있다. 악을 행하는 자에게 재난은 가능성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정하신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그들”은 가나안에서 우상을 숭배했던 모든 자들이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계속돼 온 악행이었다. “너희”와 “그들”은 우상숭배에 있어 현세대나 이전 세대들이나 모두 한통속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광야에서는 여호와만을 알았다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 우상들을 알게 됐다(2:1~13).
4~5절은 이런 우상숭배에 치우친 이스라엘에 대한 여호와의 애쓰심에 대하여 완악하게 반응하는 유다를 고발한다. 여호와는 당신의 모든 종 예언자를 거듭 보내어 “너희는 내가 미워하는 이 가증한 일을 행하지 말라” 하셨으나 그들은 듣지도 귀를 기울이지도 않고 다른 신들에게 여전히 분향하여 자신들의 악행에서 돌이키지 않았다(7:25~26; 25:4). 유다는 끝까지 돌이키지 않았고 하나님은 변함없이 예언자들을 보내셨다. 하지만 유다의 맹목적인 질주를 멈추려는 여호와의 모든 노력은 어떤 열매를 맺지 못하고 헛된 수고로 끝나고 만다. 여호와께서는 분과 노여움을 쏟아붓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이 없어졌다. 여호와 분노의 불길이 우상 숭배자들이 가득 찬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타올라, 모든 것이 폐허와 황무지가 되어 버렸다. 애굽의 유다 사람들은 불순종과 우상숭배가 유다와 예루살렘을 지금처럼 폐허로 만들었음을 알아야 한다.
3. 뉘우침 없는 자들(7~10절)
그러나 애굽에 사는 유다 사람들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예루살렘 멸망에서 어떤 교훈도 끌어내지 못했다. 이들은 악을 행하여(3, 5절) 심판을 당한 자들보다 더 “큰 악”을 행하며 자신에게 해를 끼친다. 7절은 이들이 마치 유다 백성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는 자가 없게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7절).
“어찌하여”는 여호와의 안타까움과 당혹감을 그대로 드러낸다. 죽도록 얻어맞았는데도 그대로인 것을 보시고 차라리 여호와께서 절망하신다. 8절은 하나님을 절망하게 한 “큰 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보여준다. 8a절은 3절의 반복이다. 예루살렘을 멸망하게 한 우상숭배가 애굽에서도 그대로 저질러진다. 가나안에서 다른 신들에게 가서 향을 피우고 섬기며 여호와를 노하게 했던 자들이 애굽에서도 여전히 다른 신들에게 향을 피우고 자기 손으로 만든 것으로 여호와를 노하게 한다. “너희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의 실체를 조롱하는 표현이다.
어리석게도 이 백성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으로 하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킨다. 이들의 우상숭배는 멸망을 가져오고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에서 저주와 수칫거리”로 만든다. “끊어버림을 당하여”는 완전한 멸망을 의미한다. 이들은 유다 성읍들과 예루살렘 거리에서 저지른 조상들의 악행과 유다 왕들의 악행과 왕비들의 악행과 자신들의 악행과 아내들의 악행을 잊었다(9절). 조상 때부터 현세대까지, 남녀를 불문하고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모두 악행을 저지른 결과로 재앙이 임했다는 사실을 지나간 과거사로 치부해 버렸다. 이들에게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은 자신들하고는 상관없는 남의 일이었다. 파국적인 재난을 반면교사로 삼지 않고 깨끗하게 잊었기에 악행을 뉘우치거나 두려워해야 할 이유도 다 사라진다(10절). *애굽으로 들어가 과거를 망각하고 전과 같은 악행을 저지르며 사는 자들에게 심판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4. 징계의 선언(11~14절)
“그러므로”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아무 뉘우침이나 두려워함 없이 애굽에 들어와 살면서 여전히 우상 숭배하는 자들에게 “환난(재앙)”을 내려 멸하시기로(7~8절) 작정하신다. 애굽 땅에 머물러 살기로 고집하고 그리로 들어간 유다의 남은 자들(온 유다_12절)을 모두 붙들어 애굽 땅에서 다 멸하신다.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애굽이 이들의 무덤이 된다. 칼과 기근을 피하여(42:14, 16) 애굽으로 들어온 자들이 거기에서 “칼과 기근에 죽어서 저주와 놀램과 조롱과 수치의 대상”이 된다(42:18).
장소만 예루살렘과 유다에서 애굽으로 바뀌었을 뿐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는 변함이 없었다. 파국적 재앙을 경험했지만, 뉘우침이나 두려워함이 없이 이전의 길을 그대로 가다가 같은 멸망의 심판에 떨어질 것이다. 14절은 이러한 멸망이 애굽에 있는 유다 사람 몇몇을 빼놓고는 아무도 돌아가지 못하고 애굽에서 죽을 것을 선포한다. 극히 소수의 사람만 살아남아 유다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유다의 남은 자들은 전쟁도 없고 나팔 소리도 들리지 않고 양식도 풍부해 굶주릴 걱정이 없는 곳을 찾아 애굽으로 왔지만, 이들의 기대와 달리 애굽은 멸망의 장소가 된다.
나는?
-유다와 예루살렘이 파괴된 이유를 분명하게 밝히신다.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분향하여 섬기는 일을 가증히 여기시고 노여워하신다. 그래서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어 그 악행을 중단하고 돌아서라고 촉구하셨다. 이제 예루살렘과 유다 온 성읍이 사람이 없는 폐허와 황무지가 된 것은 그들이 이 경고를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부지런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에 끊임없이 귀를 기울여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기뻐하고, 하나님이 노여워하시는 일을 멀리하는 이들만이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처절한 심판으로도 교훈을 얻지 못한 유다 사람들의 영적 망각이 심각하다.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이 황무지가 되는 재난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왜 영광의 도시가 수치와 조롱의 도시로 전락했는지 모르는 이가 없었다. 왕과 왕비에서부터 백성까지, 조상들부터 이제까지 한순간도 그친 적 없는 불순종과 악행이 가져온 유례없는 참극을 모를 리 없고 잊을 리 없다. 그런데 애굽으로 내려온 유다인들은 까맣게 잊었다. 알면서 모르는 체했다. 마치 하나님이 애굽에는 안 계신 것처럼 여호와의 율법과 법규를 무시하고 애굽의 신들을 부지런히 섬김으로 저주와 수치를 자초했다.
-신앙은 기억 행위이다. 성경 속에서, 역사 속에서, 내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과 말씀을 기억하는 일이 곧 신앙이다. 그리고 기억 속의 믿음을 현재화하고 구체화하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그래서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모른다. 묵상 없는 기억은 없고, 기억 없는 각성은 없으며, 각성 없는 순종은 없다.
-애굽에서도 역사하시는 하나님, 애굽에서도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을 각성해야 한다.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홀로 경배받으실 유일한 주권자 노릇을 하신다.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는 명령에 불순종하여 칼과 기근과 전염병에 죽은 예루살렘 사람들처럼(21:9; 38:2), 하나님 명령을 업신여기고 애굽에 내려와서 우상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맡긴 이들도 큰 자부터 작은 자까지 애굽 어디에서 살든지 똑같은 재난을 겪고 끊어질 것이다. 하나님은 애굽에서도 역사하신다. 전 세계 어느 곳이든 그의 섭리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똑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오만이다. 징계를 받고 회개의 눈물을 흘려도 다시 그 자리에 있는 것은 하나님을 참으로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여기에서부터 당장 순종을 시작해야 한다. 작은 일부터 순종해야 한다. 내 고집을 꺾지 않으면 상황이 바뀌어도 순종하지 못한다.
*사실 애굽으로 도망한 수는 많지 않았다(42:2). 하지만 그마저도 우상을 숭배하여 자기 영혼을 해하고 공동체의 멸절을 자초한다. “남자와 아비와 아이와 젖 먹는 자”는 모든 공동체를 뜻한다. 오래전 애굽의 신들을 심판하여 조롱거리로 만든 하나님을 배반한 이들은 머지않아 세상의 조롱과 모욕 거리가 될 것이다. 지금 내가 하나님 외에 고집스럽게 붙잡고 있는 그것이 나의 영혼을 해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릴 것이다.
*이런 완악한 자들을 위해 하나님은 “부지런히”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가증한 일을 중지하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와 바룩이 원치 않는 애굽으로 함께 내려온 것도 이와 같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일어난 일일 수 있다. 예레미야를 통해 애굽 땅에서 우상숭배 하는 유다의 사람들에게 그 가증한 일에서 돌아서라고 선포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분노와 노를 쏟아 황폐해지기 전에 돌아서라고 외치게 하신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히 들려주시는 말씀을 듣고서도 하나님의 노와 분을 쌓고 있는 일은 없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가정과 직장과 교회, 삶의 모든 영역에서 찬찬히 점검하며 돌아보아야 한다. 나에게는 이런 각성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 바로 말씀 묵상이다.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오늘 나의 삶을 찬찬히 생각하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다.
*애굽에서 피하지 않는 자는 모두 멸하신다. 이들은 용케도 예루살렘 파멸 때 바벨론의 칼날을 피했으나 이번에는 살아서 “사모하는” 고향 땅을 밟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모두 타지에서 부끄러운 죽임을 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제라도 애굽에서 도피하면 살 것이다. 우리도 찬찬히 생각해 봐야 한다. 이제라도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 스스로 제외 시켜놓은 애굽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하는 애굽은 없는지, 하나님을 위한 시간보다 더 좋아하는 내 시간의 애굽은 없는지,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보다 내가 기뻐하는 일의 애굽은 없는지, 관계의 애굽은 없는지, 명예의 애굽은 없는지 말이다. 이 애굽에서 떠나지 않으면 바벨론이 불현듯 찾아올 것이다.
*지금 나의 애굽에서 떠나야 한다. 내가 나와야 할 애굽에 더 이상 미련을 가지면 안 된다. 애굽을 나와 가나안 땅으로 나아갈 때 더 두려워하는 바벨론이 기다리는 두려움이 태산과 같이 엄습하더라도 “하나님이 함께해 주시지 않는가!”
**역사를 잊은 민족의 우매함이 남일 같지 않다. 과거는 지나가 버린 쓸모없는 것이 아니다. 미래를 위해 소중히 여겨야 할 자산이다. 과거에 경험한 사건이 모두 아름답고 영광스럽지는 않다. 굴욕과 아픔의 역사도 있다. 일제 36년의 아픔, 6.25 전쟁이 그렇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혀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는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개인이든 국가든 역사를 해석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교훈으로 치환하는 몫이 우리에게 주어지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끊임없이 역사를 돌아보도록 요청하시는 분이시다.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애굽 땅에서 종살이를 했었다”, “너희는 광야에서 장막살이를 했었다”라며 거듭 과거를 상기시키시는 하나님이다. 본문의 내용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유다가 망한 이유를 구체적으로 알려주신다(3~5절).
**과거의 일은 미래를 여는 힘이 될 수 있다. 치욕스럽고 부끄럽더라도 숨기거나 변명할 것이 아니라 진실하게 반성한다면 당당하고 담대하게 새날을 열 수 있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우리 더온누리공동체의 역사도 기억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떻게 이곳에 시작되었는지 잊으면 안된다. 다음세대에게 하나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역사가 각각 교회된 그들의 삶도 세우실 것을 알려줘야 하기에 공동체를 세워주신 역사를 알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나라의 역사도 기억해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나라 답게 일구기 위해서 말이다.
*주님, 나의 평안에 스스로 도취해 있는 나의 애굽에서 떠나겠습니다. 두렵고 막막한 바벨론을 만나더라도 더 크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 역사를 잊지 않겠습니다. 성경의 역사, 인류의 역사, 우리 민족의 역사, 개인의 역사… 모든 역사는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올바른 이정표가 된다는 것을 붙잡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