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46:13-28 바벨론을 통한 애굽 징계
갈그미스의 참패는 애굽 운명의 서곡에 불과하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 본토를 침략하여 폐허로 만들 것이다. 바벨론 군대의 공격으로 애굽은 거의 죽은 몸이 된다.
주전 605년 바벨론의 패권을 저지하기 위해 유브라데 강가의 갈그미스까지 원정을 떠났던 애굽이 이제는 바벨론에 의해 침략을 당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갈그미스의 패배가 치명적이기는 하지만, 이방 땅에서의 전쟁이었기에 그 피해는 제한적이었다. 갈그미스 전투에서 승리한 느부갓네살은 나보폴라사르가 사망하자 바벨론으로 돌아가 즉위식을 치른 후(주전 604년) 애굽으로 진격했다. 대략 3년 동안 애굽은 바벨론의 공격을 견뎌야 했다. 앗수르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애굽은 지중해 동편에 세력을 확장했지만, 친애굽 정책을 펼쳤던 군소 국가들이 곧 바벨론에 굴복하고 만다. 바벨론은 애굽을 정복하지 못했지만, 애굽이 지중해 동편을 넘보지 못하게 하는데 성공한다(왕하 24:7). 애굽은 바벨론 세력을 극복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자신의 땅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그런데 이 정세를 파악하지 못하고 바벨론이 애굽에 승리하지 못하자 여호야김은 바벨론을 배반한다(왕하 24:1). 이러한 여호야김의 결정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결국 주전 597년에 여호야긴과 신하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 바벨론의 애굽 침략(13~24절)
앞에서는 애굽이 원정을 떠나 메소포타미아 지방으로 올라갔는데, 이번에는 바벨론이 원정을 떠나 애굽으로 내려온다. 전쟁의 무대가 이방 땅에서 본토로 바뀐다.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애굽 땅을 치러 올 것을 예레미야에게 알려 주신다(13절). 바벨론의 애굽 원정이 여호와의 의지로 선포된 것이다. 믹돌과 놉과 다바네스가 바벨론 군대의 침략을 받는다(14절). 칼이 사방을 삼키려 하기에(10절) 전열을 가다듬고 싸울 준비를 해야 한다.
한편 믹돌, 놉, 다바네스 지역을 침략하는 바벨론의 모습은 44:1과 함께 읽으면 애굽에 사는 유다 백성의 우상숭배와 불순종을 심판하는 전쟁의 성격이 된다. 애굽을 침략한 바벨론 군대를 보게 될 때 여호와의 말씀과 애굽의 유다 백성의 주장 가운데 누구의 말이 맞았는지 알게 될 것이다(43:28). 바벨론의 공격에 용맹한 자들도 버티지 못하고 거꾸러진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몰아내시기 때문이다(15절). 여호와께서 바벨론 군대와 함께 싸우시기에 살기 위해서는 도망하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다(16절). 징집됐거나 동맹군으로 전쟁에 참여한 자들이 더 이상의 싸움이 소용없음을 보고 전선을 이탈하여 각각 자기 민족이나 고향으로 돌아간다. 애굽의 바로는 놀림을 당한다(17절). 여호와께서 바벨론 군대가 “산들중의 다볼 같이, 해변 길의 갈멜 같이” 밀려올 것을 선언하신다(18절). 애굽 왕은 온 땅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정하신 때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애굽에 거주하는 유다 사람들은 ‘포로의 짐’을 꾸려야 한다(19절). 놉은 황무하여 불에 탄다. 애굽의 유다 백성이 의지했던 애굽의 운명이 유다의 운명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20~22절은 동물의 비유를 사용하여 애굽의 패배를 선포한다. 애굽을 쇠파리 떼에 지속해서 괴롭힘을 당하는 암송아지에 비유한다(20절). 주변 나라들이 부러워하는 부요한 애굽이라도 바벨론의 침략을 맞지 못한다. “북으로부터”는 유다의 운명과 다를 바 없는 애굽의 운명을 가리키며, “줄곧 오리라”는 침략이 반복될 것이라는 예언이다. 쇠파리 떼가 암송아지 곁을 떠나지 않고 괴롭히듯이 바벨론이 경제적으로 번성한 애굽을 약탈하기 위해 거듭 침략할 것이다. 다음으로 북으로부터 침략해 오는 적에게 패해 도망하는 용병들이 “살찐 수송아지”에 비유된다(21절). 그들은 특별 대우를 받았으나 정작 필요할 때 소용이 없었다. 잘 훈련되고 무장된 용병들도 바벨론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하고 도망한다. 세 번째는 애굽을 뱀에 비유한다(22절). 벌목꾼이 나무를 베어내기 시작하면 숨어 있던 뱀이 위험을 느끼고 소리를 죽여 재빨리 도망하듯이 애굽 군대가 도망간다.
22절 하반절과 23절은 바벨론 군대가 손에 도끼를 든 벌목꾼에, 애굽이 나무로 가득 찬 수풀에 비유된다. 숲이 나무로 빽빽이 들어찼어도 메뚜기보다 많은 벌목꾼이 베어 넘기기에 하나도 남아나지 못한다. 딸 애굽이 수치를 당하고 북쪽 백성의 손에 넘겨진다(24절). 이 모든 일은 온 땅의 왕이신 여호와께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애굽을 주기로 하셨기에 애굽은 패배의 수치를 피할 길이 없다.
- 바벨론의 손에 넘겨지는 애굽(25~26절)
심판의 대상이 확대된다. 애굽과 바로를 넘어 애굽의 신들까지 벌을 받는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모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과 그 종들의 손에 넘기신다. 애굽의 운명이 심판으로 끝나지 않는다. 애굽은 심판 이후의 회복이 약속된다. 여호와의 징벌 이후에 애굽은 “이전같이” 사람이 살게 된다. 문맥에 따르면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때(27~28절) 애굽도 참여하게 된다. “그를 의지하는 자들”은 바로의 봉신들뿐 아니라 예레미야의 문맥에서는 여호와의 권면과 경고를 무시하고 안전한 피난처를 찾아 애굽으로 내려간 요하난 일행을 포함한 유다 사람들을 가리킨다(42~44장). 애굽을 향한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가 함께 표시된다.
25절의 “노”는 18왕조 시대(주전 1552~1306) 제국의 수도였다(겔 30:14~16; 나 3:8). 이곳은 애굽의 왕들의 무덤과 성소가 있는 곳으로 매우 중요했다. 그리스어로는 “테베”로 불린다. 노(테베)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740km 떨어진 도성이다. 이곳은 아몬 신을 섬겼고, 때로 “레”와 혼합되어 신들의 왕인 “아몬-레”가 되어 제국의 신으로 섬겨지기도 했다.
- 야곱의 구원(27~28절)
애굽의 신탁 다음에 야곱의 회복에 관한 말씀이 이어진다. 여호와께서 이방 민족들 가운데 흩어져 사는 야곱의 자손들을 다시 고토로 불러 모아 안전하게 살게 해주신다. 야곱을 한정하는 “내 종”은 여호와와 야곱(이스라엘)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드러낸다. 즉, 야곱(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속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그들이 “먼 곳에서” 돌아옴은 여호와와 야곱(이스라엘)의 거리가 좁혀졌음을, 곧 관계가 회복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유배지에서 야곱을 해방하여 고향으로 데려오신 여호와께서는 민족들을 멸망시켜 이들이 두려움 없이 평안히 살 수 있게 해주신다. 야곱도 죄를 범하면 징벌을 받기는 하겠지만, 민족들과 달리 멸망에 떨어지지는 않는다. 야곱은 여호와의 종으로 여호와의 보호 아래 있기에 여호와께서 “법도대로” 징계하신다(10:24). 27~28절은 30:10~11과 문자적으로 동일한 반복이다. 이는 애굽의 구원을 약속하는 26절 하반절과 함께 읽도록 하기 위함이다.
나는?
-애굽에 임할 파국은 확실하다. 바벨론 군대가 다볼과 갈멜같이(누구나 알아볼 수 있도록 분명히) 올 것이고, 숲을 벌목하려는 자들처럼 도끼를 들고 오되, 황충보다 더 많은 수가 올 것이니 도망할 채비를 하라고 경고하신다. 애굽의 옛 수도인 놉이 거민이 없을 만큼 철저히 타고, 뱀이 소리 없이 달아나듯 애굽이 놀라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하다가 큰 수치를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날에 애굽의 용병들이 바벨론에 패배하고서야 바로가 “기회를 놓친 허풍쟁이”였다는 것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할 것이다. 곧 파멸과 징벌의 날이 다가오면 도망할 것이다. 애굽을 향한 경고를 통해 그들이 믿을 대상은 바로도 애굽도 아님을 알았듯이 더 늦기 전에 세상의 허풍에 속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것이다.
-느부갓네살을 통한 애굽의 멸망은 애굽 신들을 벌하신 하나님의 일이다. “힘센 황소 신 아피스(15절)”와 “노(테베)의 아몬”, 애굽의 신들과 신으로 추앙받던 바로까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애굽의 패배는 이스라엘의 패배만큼이나 바벨론 신 마르둑이 진정한 신임을 증명한 사건은 아니다. 그것은 애굽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가 성취된 것이요, 따라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승리 사건이다.
-애굽의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북쪽에서 데려와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결정이고, 그들의 옛 수도 놉에 거민을 구경할 수 없을 만큼 초토화하는 것도 하나님의 결정이지만, 다시 그들을 회복하여 사람 살 땅이 되게 하실 것도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이처럼 나의 삶도 진실로 하나님이 결정하신다.
-애굽이 재난을 당하고 심판을 받는다는 소식에 이스라엘은 놀랄 필요가 없다. 첫 출애굽 때도 애굽이 열 가지 재앙으로 괴로움을 당할 때 이스라엘 백성은 안전했듯이, 이번에도 이스라엘을 지켜주실 것이다. 애굽의 재앙이 도리어 이스라엘에게는 구원의 기회가 될 수도 있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의 계획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묵인하시거나 공의를 저버리겠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심판 중에 구원받음의 당사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은혜를 받고 있다. 세상은 죄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이미 깨어졌고, 아름다운 창조 질서도 이미 깨어져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화목의 십자가를 믿고 의지하는 이들에게는 이런 깨진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 은혜가 임하고, 그 은혜 안에서 거하고 있음을 날마다 실재하게 하신다. 심판 중에라도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은 실제이다.
-헛된 신들을 의지하는 나라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애굽의 패망은 헛된 신들을 의지하는 세상에 대한 심판이다. 아직도 우리 안에 버리지 못한 헛된 욕망, 헛된 우상, 헛된 기대를 고집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 대신 의지하는 모든 것은 우리를 위험에 빠뜨릴 뿐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겉으로 보면 바벨론 군대가 도끼를 들고 벌목하는 자처럼 애굽을 쓰러뜨리고 있지만, 애굽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바벨론을 불러 애굽을 심판하시는 것도 하나님의 결정이고, 애굽을 다시 회복하여 사람 살 땅이 되게 하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이처럼 열국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만이 전능한 주권자이심을 알게 한다.
-애굽의 회복을 언급하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도 약속하신다. 억압하는 자(애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억압받고 있는 자(유다)의 구원이 된다. 유다를 사로잡은 나라들은 다 사라져도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 애굽의 운명을 쥐고 계신 하나님께서 “내 종” 이스라엘의 회복을 잊지 않고 계심을 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잊지 않고 계심을 바라보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