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모압에 대한 심판 [렘 48:11-25]
 – 2024년 08월 08일
– 2024년 08월 08일 –
모압의 멸망은 여호와의 되돌릴 수 없는 결정이다. 작의 침략을 모르고 살았던 모압의 좋았던 시절은 이제 끝났다. 모압의 재난이 가까이 왔다. “파멸하는 자”가 속히 올라와서 모압 전역을 황폐하게 할 것이다.
    
예레미야의 이방 신탁은 상당 부분 ‘모압’에 대해 할애한다. 모압은 요단 동편에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지역에는 성경에서 잘 알려진 세 민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르논 골짜기를 기준으로 북쪽에 암몬이 자리 잡았고, 남쪽에는 모압이 위치했다. 그리고 모압의 남쪽에 에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민족들은 모두 창세기에서부터 언급이 된다. 모압과 암몬은 롯의 후손이고, 에돔은 이삭의 아들이자 야곱의 형제인 에서의 후손들이다. 따라서 이들 세 민족은 모두 이스라엘과 친족 관계였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는 이들과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왕정 시대에 모압은 다윗에게 정복당하여 한동안 이스라엘의 봉신으로 있었다. 유다가 멸망할 시기에는 유다 사람들이 모압으로 피난을 가기도 했다.
    
    
    
1. 술을 옮겨 담는 사람(11~13절)
모아의 평안했던 과거와 전쟁에 휩싸인 미래가 포도주의 제조 과정에 비교된다. 참고로 고대의 포도주는 대략 네 단계의 과정을 거쳐 제조된다. 먼저 수확한 포도를 술 틀에 넣고 발로 밟아 포도즙을 짜낸다. 그리고 짜낸 포도즙을 토기나 가죽 부대에 넣고 마개를 열어 놓은 채 발효 시킨다. 찌끼가 밑으로 가라앉도록 포도즙이 담긴 토기나 가죽 부대를 한동안 그대로 놓아둔다. 이후 발효 과정이 끝나면 포도주를 찌끼로부터 분리한다. 이때는 세마포를 이용하여 포도주를 조심스럽게 다른 그릇에 따라 넣는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걸러낸 포도주를 담은 토기나 가죽 부대를 창고로 옮겨 저장하면 된다. 본문의 “마치 술이 그 찌끼 위에 있고”라는 표현을 통해 두 번째 단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압은 외주의 침략 없이 자신들만의 안전한 삶을 즐겼다. “이 그릇에서 저 그릇으로 옮기지 않으면 같아서”라는 포도주 제조 과정의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적당히 발효되면 순수한 포도주를 다른 그릇에 담아야 함에도 모압의 경우에는 그대로 두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심판 선언은 진행되지 않았던 세 번째 단계가 시행될 것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때가 되면 포도주를 옮겨 담는 것처럼 모압을 옮겨 담을 ‘날(들)’이 온다(12절). 여호와께서 “술을 옮겨 담는 사람”을 보내시면 그들이 술을 옮겨 담아 그릇을 비우고 단지는 부숴버릴 것이다. 원래의 제조 과정에서는 옮겨 담고 빈 그릇은 부수지 않는다.
    
하지만 본문은 포도주를 옮겨 담는 목적이 맛과 향이 좋은 포도주를 얻기 위함이 아니라 담았던 그릇의 파괴에 있음을 보여준다. “술을 옮겨 담는 사람”이 “파멸하는 자”의 역할을 담당한다(8절). 옮겨 담음이 모압 사람들의 유배를 가리킨다면(11절), 단지의 파괴는 모압의 완전한 멸망을 상징한다. 이렇게 심판받는 이유에 대하여 13절을 통해 직접적으로 밝힌다. “이스라엘 백성이 벧엘을 의지하다가 수치를 당하였듯이, 모압이 그모스 신 때문에 수치를 당할 것이다(새번역).” 북이스라엘이 섬긴 벧엘의 송아지 상과 모압 백성이 섬긴 그모스는 우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없었다.
    
    
    
2. 모압의 재난이 가까웠다(14~17절).
이렇게 여호와의 심판이 확정되어 선포되고 있음에도 모압 사람들은 자신감 넘치는 말로 “우리는 용사요, 능란한 전사라(14절)”라고 자신들의 뛰어난 군사력을 신뢰한다. 이들의 지나친 자만감이 여호와께서 “술을 옮겨 담는 사람”을 보낸 날이 오고 있음을 볼 수 없게 했다.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이들의 실체 없는 교만과 자신감을 폭로하신다.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이와 같이 말하노라 모압이 황폐하였도다. 그 성읍들은 사라졌고 그 선택 받은 장정들은 내려가서 죽임을 당하니(15절)” 모압이 자랑하는 최고의 용사들이 파멸하는 자 앞에서 도살당하는 짐승처럼 힘없이 죽어간다. 여호와의 계획에 따르면 모압의 멸망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미 시작되고 있는 사건이다(16절). 모압의 멸망이 확정적이기에 모든 민족에게 그의 죽음을 애도하도록 요청한다(17절). ‘그의 사면에 있는 모든 자”는 가까운 이웃 민족들을, “그의 이름을 아는 모든 자”는 모압에 관해서 들어서 아는 먼 곳의 민족들을 가리킨다. 모든 민족이 모압의 죽음을 애도하며 “강한 막대기, 아름다운 지팡이”가 부러졌다고 탄식한다. 왕권을 상징하는 홀이 꺾였다. 오랫동안 편안하게 살아온 모압이 종말을 맞이한다.
    
    
    
3. 모압을 파멸하는 자(18~25절)
모압의 멸망이 디본과 아로엘의 경험으로 구체화 된다. 모압을 파멸하는 자가 올라와 디본을 치고 그 요새들을 무너뜨렸기에 딸 디본의 주민은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메마른 데(직역하면 목마름)” 앉아야 한다(18절). 풍족하게 물을 사용하던 자들이 물이 없어 고통을 당한다. 옛 영화를 모두 잃고 비참한 처지에 떨어진다. 이미 요새들이 무너졌기에 피신할 곳도 없어졌다.
    
아로엘 주민들에게는 세 가지 명령이 주어진다(19절). 그들은 길가에 서서 지켜보다가 도망하는 남자나 피하는 여자를 보면 무슨 일이냐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너무 늦지 않게 적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파악하고 안전한 곳을 찾아 떠나야 한다. 아로엘은 아르논 근처의 성읍으로 디본에서 남서쪽으로 약 5km 떨어져 있다. 전시 상황을 묻는 아로엘 주민들에게 피난민들이 절망적 소식을 전해준다. “그러면 그들이 대답할 것이다. ‘모압이 수치를 당하였다. 모압이 어이없게도 함락되었다. 통곡하며 울부짖으며, 아르논 강가 사람들에게, 모압이 멸망하였다고 알려라.’ 할 것이다(새번역_20절).” 모압이 이미 전쟁에서 패하였다는 소식이다. 되돌릴 수 있는 패배가 아니라 통곡과 부르짖음만이 남은 멸망이다. 남은 일은 모압의 멸망 소식을 아르논에 가서 전달하는 것뿐이다.
    
21~24절은 파멸하는 자가 무너뜨린 성읍의 목록이다. 이어지는 문맥에 따르면 피난민들이 아로엘 주민들에게 들려주는 답변일 수 있다. 피난민들은 모압의 패배를 “심판(21a절)”, 곧 잘못에 대한 징벌로 이해한다(13, 14절). 모두 열한 개의 성읍 이름이 나열된다. 디본과 느보와 기랴다임을 제외한 아홉 성은 처음 등장한다. “모압 땅 원근 모든 성읍”은 열거한 열한 성읍을 포함한 모압의 모든 성읍을 가리킨다. “모압의 뿔이 잘렸고 그 팔이 부러졌도다(25절)”라는 18~25절의 요약으로 이해될 수 있다. 뿔과 팔은 힘을 상징한다. 뿔이 잘리고 팔이 부러졌음은 모압이 힘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보여준다. 2절을 통해 밝힌 대로 헤스본에 모인 적들이 계획한 대로 모압은 이제 민족으로 살아남을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평온하기만 했던 모압에게 갑자기 파멸이 닥쳐왔다. 모압은 국가 초기부터 포로로 잡혀간 적이 없다. 걸러지지 않은 포도주처럼 안전했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스스로 용사와 능란한 전사라고 자신만만해했다. 그리고 그 안전과 번영이 계속되리라고 자만하였다. 하나님은 이들에게 포도주가 쏟아지고 병이 깨지는 것 같은 큰 파멸이 닥칠 것이라고 하신다. 그 이유는 여호와를 찾지 않고 벧엘의 금송아지를 찾은 이스라엘이 멸망했듯이, 여호와 대신에 그모스를 숭배했기 때문이다.
    
-굳게 믿고 의지하던 것이 정작 어려울 때는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뿐 아니라 도리어 재난을 가져오는 이유가 된 것이다. 나의 자랑과 자부심 때문에 내가 무너지지 않도록, 그것이 내게 우상이 되지 않게 해야 한다.
    
-모압의 영광은 재가 되어 사라진다. 한때 강한 막대기요 아름다운 지팡이로 불리고 강한 용사와 능란한 전사의 나라인 모압이 재앙이 임할 것이다. 성읍은 불타 연기가 피어오르고 싸움 잘하기로 유명한 빼어난 젊은이들마저 속수무책으로 쓰러질 것이다. 이런 모압의 황폐함은 확실한 미래가 될 것이니 미리 조사를 읽어 애도하라고 명령하신다. 심판의 날에 불타고 쓰러지며 부러질 강함과 아름다움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혹시 고난과 핍박의 시간을 지날 때, 주님의 도우심으로 안전한 평범함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가장 강력한 요새라고 여겨졌던 성읍들마저 무너지는 모압…. 모압의 옛 수도 디본과 모압의 가장 북쪽에 있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로엘”에 스스로 파멸을 인정하고 확인하라고 하신다. 디본에게는 요새가 무너졌으니, 영광의 자리에서 내려와 마른 데 앉으라고 명령하고, 아로엘에게는 모압을 벗어나려고 국경을 넘는 자들에게 모압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그렇게 도망하는지 물어보라고 한다. 더 나아가 모압 전체를 향해 “울부짖고, 부르짖고, 모압의 황폐함을 말하라”고 명령하신다.
    
-한 성읍도 면하지 못할 것(8절)”이라는 말씀대로 분명히 될 것임을 보이기 위해 성 이름을 하나하나 열거한다. 심판 날 주와 함께 누릴 영광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다. 헛된 것을 믿고 숭배한 삶이 준 파멸을 낱낱이 보고하는 불행을 맞이하지 않도록 이 땅에 요새와 우상을 만들지 말아야 한다.
 
 
-모압은 경제적으로 부국이었다. 군사적으로도 강국이었다. 더구나 그릇을 옮기지 않은 포도주처럼 한 번도 외세의 침략이나 유배를 당해본 적이 없이 오랫동안 안정과 번영을 누려왔다.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도 영원히 무사하리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 강함과 아름다움이 수치와 통곡으로 바뀔 날이 이미 오고 있다. 오랜 번영이 모압을 오만하게 만들었다. 모압을 반면교사 삼아 내가 자랑하고 자부하는 것이 나의 교만이 되지 않도록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나의 자랑과 자부심이 나의 우상이 되면 안된다. 그 우상 때문에 결국 망한다.
 
-그모스의 나라는 결국 그모스가 평안을 준다고 믿었다. 하지만 모압은 깨달았어야 했다. 그들이 누리는 평안은 그들이 자랑하는 용맹함 때문도 아니고 그들이 숭배하는 그모스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의 결과였다. 하지만 더 이상 심판이 유예되지 않을 것이다. 과거 역사와 자만이 파멸의 날을 가늠할 수 없게 하여 대비조차 못하게 되었다. 기억해야 한다. “나는 다르다”는 자만은 자신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죄악도, 하나님의 은혜도 바라보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다(잠 16:18)”라고 했던 것이다.
 
-내가 자신하는 것은 한 순간에 사라질 것들이다. 그런 것에 내 안전을 걸지 않아야 한다. 오직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에게 내 삶의 안전을 걸어야 할 것이다.
    
*모압에 대한 심판은 인간의 교만과 종교의 바패와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한 응징이다.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심판을 유보하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심판을 확정하시면 지체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유보해주심의 자비가 있을 때 더욱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뢰하는 삶을 공고히 해야 한다. 환난 날에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 안에 거하기를 소망한다면 겸손과 건강한 신앙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주님, 헛된 자랑이 삶을 결국 헛된 인생의 길임을 깨닫습니다. 늘 겸손하게 살겠습니다.
*주님, 헛된 자신감이 멸망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모압을 기억하여 늘 겸손하겠습니다.
*주님, 교회의 타락이 심판의 원인임을 깨닫습니다. 제게 맡기신 공동체를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힘쓰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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