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모압에 대한 슬픔과 회복의 약속 [렘 48:36-47]
 – 2024년 08월 10일
– 2024년 08월 10일 –
모압에서 모든 즐거움과 기쁨이 사라진다. 그 자리가 애곡하는 소리로 가득 찬다. 모압은 더 이상 한 민족을 이루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모스를 섬기던 백성은 자기 신들과 함께 모두 사로잡혀 유배를 떠난다.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선언이 갖는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심판의 근거가 거의 정확하게 제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제시되더라도 윤리나 관습의 보편적인 관점이나 이스라엘과의 관계에서 간략하게 언급된다. 왜 그럴까? 이스라엘의 경우와 달리 다른 민족들에게는 여호와의 말씀이 계시 되지 않았다. 즉, 여호와와 관계성도 없고, 그에 따른 지켜야할 의무도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호와께서 임의로, 혹은 충동적으로 심판을 선언하셨다는 의미는 아니다. 심판 선언을 읽는 독자가 이해할 만한 근거가 주어지지 않았을 뿐, 하나님께서는 그의 공의에 따라 민족들을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모압의 경우에는 비교적 다양하게 심판의 이유가 언급되는데, 업적과 보물을 의지한 것(7절), 그모스를 숭배한 것 때문에(7, 13절), 군사력에 대한 자만 때문에(14절), 이스라엘을 조롱하였기 때문에(27절), 그의 오만과 교만 때문에(26, 29~30, 42) 심판을 당한다.
    
    
    
1.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36~39절)
적들의 침략으로 황폐해졌기에 여호와께서 탄식하신다. 여호와께서는 자신의 공의를 따라 심판을 확정하셨지만, 모압의 멸망은 여호와께도 가슴 아픈 일이었다. 여호와의 마음이 모압으로 인해 피리처럼 슬피 울고 그분의 마음이 길헤레스 사람들 때문에 피리처럼 슬피 운다(36a절). 여호와의 슬픔의 크기를 강조하기 위해 “모압” 대신 “길헤레스 사람들”로 바꾼 것을 제외하면 두 문장은 거의 일치한다. 즉, 슬픔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으로 보인다. 피리는 보통 축제 때 사용하는 악기인데 애곡으로 표현한 경우는 36절이 유일하다. 이 또한 애곡의 강렬함을 표현하기 위한 비유인 것으로 추측한다. 그리고 애곡의 주체로 “마음”이 등장한다. 히브리적 사고에서 마음은 판단과 이성의 자리이다. 모압의 멸망을 결정한 그분의 마음이 멸망에 떨어진 모압 때문에 슬피 운다. 이런 표현들이 여호와의 심판 결정이 매우 가슴 아픈 결정이었음을 시사해 준다.
    
“소리 내며(하마)”로 번역한 동사는 31:21절에서는 여호와의 “창자”를 주어로 사용한다. 심판을 당한 에브라임을 생각하실 때마다 여호와의 창자가 동요하는 것처럼 멸망에 떨어진 모압 때문에 여호와의 마음이 동요하신다는 의미다. 모압을 바라보시는 여호와의 마음이 이스라엘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모든 재산을 약탈당하고 통곡하는 모압과 길헤레스 사람을 보시고 흐느끼신다(피리같이 소리내신다.).
    
사람들도 모압의 죽음을 애곡한다(37~38절). 머리를 밀고 수염을 깎고 몸에 상처를 내고 허리에 굵은 베를 두르는 행위는 사람이 죽었을 때 슬픔과 고통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애도 의식이다. 재난이 전면적이어서 개별적인 애도라기 보다는 주민들이 모두 애곡에 참여한다. 다들 집에서 나와 지붕이나 광장에서 애곡한다. 누구도 모압의 재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은 자가 없는 집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는 그릇(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릇)”처럼 부수셨기 때문이다. “깨뜨리다 혹은 부수다”라는 표현은 48장에서만 네 번(4, 17, 25, 38절) 사용 되었다. 예레미야가 토기장이 표적 행위(19:10~11)를 통해 예루살렘과 유다를 부수실 것을 선포한 것처럼, 여호와께서 모압을 쓸모없는 그릇처럼 부수신다.
    
이에 다시 한번 탄식의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모압의 파괴를 애곡하고, 모압은 수치스러워 등을 돌린다(39a절). “등을 돌리다”는 도망하기 위해 돌아서는 행동이나 자리를 떠날 수밖에 없는 심한 모멸감의 표현이다. 수치를 당한 모압이 주위 모든 민족에게 “조롱거리와 공포의 대상”이 된다(39b절). 모압에게 술을 먹여 조롱거리가 되게 하라는 명령(26절)대로 민족들의 조롱거리가 된다. 내던져진 그릇이 조각조각 깨지듯이 모압이 너무도 처참하게 파괴되기에 민족들은 멸망한 모압을 보고 공포를 느낀다.
    
    
    
2. 벌 받을 해(40~44절)
본 단락에서는 다양한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모압의 피할 수 없는 멸망을 기술한다. 모압을 침략하는 적군은 독수리로 비유되어 적이 독수리처럼 날아와 모압을 향해 날개를 편다(40절). “편 날개”는 보통 보호를 상징하지만, 본문에서는 신속함과 위협의 표상이다. 독수리에 비유된 적이 누구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다. 하지만 에스겔 17:3에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색깔이 화려하고 날개가 크고 깃이 길고 털이 숱한 큰 독수리”에 비유하였다. 신명기 28:49에서는 이스라엘이 배반하면 여호와께서 “멀리 땅 끝에서 한 민족을 독수리가 날아오는 것 같이” 오게 하여 이스라엘을 치게 하신다는 기록도 있다.
    
또 모압의 용사들이 산고를 겪는 여인에 비유된다(41절). 출산에서 해산까지 산모가 홀로 고통과 두려움에 맞서야 하듯, 적이 침략하여 성읍과 요새를 공격하면 용감하게 맞서야 할 용사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될 것을 표현한다. 42절은 34~41절의 요약이다. 여호와를 거슬러 교만했기에(26절) 모압은 멸망하고 다시 나라를 이루지 못한다. 더는 한 민족을 이루지 못하고 역사에서 사라진다. “그를 끊어서 나라를 이루지 못하게 하자(2절)”라고 헤스본에서 적들이 세웠던 계획이 성취된다.
    
모압 주민들은 침략자를 피해 목숨을 구하지 못한다(43~44절).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가 그들 앞에 놓여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하는 자는 함정에 떨어지고, 함정에서 올라오는 자는 올무에 걸린다.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하여 보지만, 사로잡힘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독수리처럼 날래고 무섭게 쳐들어오는 적으로부터 누구도 벗어나지 못한다. 이렇게 모압 주민들이 모두 재난에 떨어지게 될 것은 여호와께서 모압에게 내리시는 벌이기 때문이다(44b절). 여호와께서 모압을 멸망시키시기로 하셨기에 그 멸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3. 모압의 심판과 그 후(45~47절)
그리고 운이 좋아 두려움과 함정과 올무를 힘겹게 벗어나 헤스본 그늘에서 안도의 한숨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을지라도, 안심하기는 이르다. 헤스본에서 불이 나오고 시혼 가운데서 불꽃이 나와 “모압의 살쩍과 떠드는 자들의 정수리”를 삼켜 버린다(45절). 도망한 자들은 헤스본에서 피난처를 찾지만, 헤스본은 이미 적들의 수중에 넘어갔다(2절). 헤스본에서 적들이 나와 그늘에서 지친 몸을 추스르며 쉬는 자들을 다 죽여버린다.
    
46절은 모압의 심판을 마무리한다. 모압에 화가 임한다. “그모스의 백성”이 멸망하고 모압의 아들들과 딸들이 모두 잡혀 유배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내리시는 벌로 그모스를 섬기는 모압이 멸망한다. 그모스의 정체도 헛것임이 폭로된다. 그모스는 자기 숭배자들을 지켜주기는커녕 자신도 포로로 잡혀간다(7절).
    
그런데 모압의 운명은 멸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훗날에 모압의 운명을 되돌리실 것이다(47a절). “모압의 심판”이라는 표현에는 모압의 멸망이 모압의 잘못에 대한 징벌임을 보여 준다.
    
    
    
나는?
-여호와께서 모압이 부끄러워할 만큼 깨뜨리실 것이다. 하나님은 모압을 마음에 들지 않은 그릇을 깨뜨리듯 깨뜨리실 것이다. 하나님이 버리시자, 모압은 애써 모으고 성취한 것을 다 잃어버릴 것이다. 온 모압에 추수 날의 환호성은 사라지고 지붕과 거리 각처에 죽음을 슬퍼하는 곡소리가 들려올 것이고, 장례식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모압이 부끄러워 고개를 돌릴 만큼 철저히 파괴될 것이다. 그것을 본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낄 만큼 황폐해질 것이다. 그들이 풍요와 번영을 주신 하나님보다 그 자체를 의지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압을 깨뜨리시되 재건할 수 없을 만큼 깨뜨리실 것이다. 교만한 모압이 다시는 재건되지 못할 만큼 뿌리째 뽑으실 것이다. 적군이 독수리같이 날아와 모압을 덮치면 피할 수 있는 성읍도 없고, 요새도 안전을 지켜줄 수 없다. 용사들이라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적군 앞에서는 산고 중인 여인이 겪는 두려움과 마음 약해 짐에 직면할 것이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만용보다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 세상을 거스르는 용기를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재건할 수 없는 멸망할 나라를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히 흔들릴 수 없는 나라를 바라보며 살아야 한다.
    
-모압을 향한 심판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심판이다. 하나님을 버리고 그모스를 믿은 모압 사람들이 아무도 재난에서 피할 수 없게 하실 것이다. 두려움에서 도망하면 함정에 떨어지고, 함정에서 나오면 올무에 걸릴 것이다. 성읍을 빠져나와도 헤스본으로 도망하더라도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큰불에 타는 헤스본일 것이다. 그 불을 피하더라도 모압의 아들딸들은 포로로 잡혀갈 것이다.
    
-모압에 대한 하나님의 단호하고 철저한 심판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 속에서 하나님의 눈을 피하여 살아갈 궁리를 행여 한다면 지금 멈춰야 할 것이다. 그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가장 바른 길이다.
    
-애굽에서 회복을 약속하셨듯이 모압에게도 회복의 소망을 남겨주신다. 심판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성품이고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는 수단일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무도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우상숭배로 인해 심판을 피할 수 없는 모압을 생각하시면서 우시는 하나님이시다. 마치 애간장 타들어 가는 슬픔을 “피리 같이 소리한다”라고 표현하였다(36절).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이라도 이렇게 슬퍼하시는 마음이 가득한데, 나는 지금 이 땅 동족에 대한 마음이 어떠한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이 속히 심판당하기만을 기다리지는 않는가? 심판당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애닮픔이 있는가?
    
*독수리(바벨론의 느부갓네살)를 보내서 하나님을 거스려 자만하는 모압을 멸망시키고, 다시는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신다. 하나님을 떠나 불의한 어떤 나라, 민족도 하나님의 공의 앞에서 비껴갈 수 없다. 사람들의 눈앞에서는 감출 수 있어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판단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혹독한 심판이 지나면 모압 역시 회복의 기회를 주신다. 궁극적으로 이 회복의 약속은 메시아를 통해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겠는가! 이방인이었던 우리가 그 회복의 영광에 참여하여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된 것은 모압에게 기회를 주셨듯 우리에게도 주셨기 때문이다. 순전히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이다.
    
    
    
*주님, 철저한 모압에 대한 심판을 기억하겠습니다. 교만과 우상을 경계하고 멀리하겠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붙잡겠습니다.
*주님, 혹독한 심판이 지난 후 한량없는 회복의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에 내가 살 수 있게 됨을 고백합니다. 오늘도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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