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보복하시는 여호와, 바벨론에게 전해져 들려지고 기억되어야 할 멸망의 예언 [렘 51:54-64]
 – 2024년 08월 23일
– 2024년 08월 23일 –
바벨론에 대한 마지막 신탁이다. 바벨론은 전쟁으로 파멸될 것이다. 용사들은 사로잡힌다. 여호와의 바벨론 심판은 확정되었다. 예레미야는 스라야에게 그 책을 다 읽은 후에 책에 돌을 매어 유브라데 강에 던지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도 여호와의 심판을 돌이킬 수 없다고 선언한다.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께서  바벨론이 영원한 잠에 빠져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하신다. 파괴자들에 의해 정복된 바벨론이 잿더미가 된다. 보복하시는 여호와의 정의가 바벨론에 남김없이 집행된다.
 
 
 
1. 보복하시는 하나님 여호와(54~58절)
여호와께서 멸망시키는 자를 보내 바벨론을 치게 하시기에 성에서는 “부르짖는 소리”가, 갈대아 사람의 땅에서는 “큰 파멸”의 소리가 들린다(54절). 다른 민족을 혼돈과 죽음에 빠뜨렸던 바벨론이 혼돈과 죽음의 두려움에 사로잡힌다.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황폐하게 하시고 그곳에서 “큰 소리”가 사라지게 하시기 때문이다(55a절). 바벨론은 자신의 “큰 소리”를 빼앗기고 다른 무서운 소리를 듣는데 “원수는 많은 물 같이 그 파도가 사나우며 그 물결은 요란한 소리를 내는도다(55b절)”로 표현되는 거센 파도의 으르렁거리는 소리이다.
 
“큰 소리”는 바벨론 제국의 수도다운 번잡하고 소란스러움과 기세등등하게 민족들을 침략하는 바벨론 군대의 모습을 비유하는 듯 하다. 그런데 그 소리가 사라지고, 죽음의 영역에 속하는 “부르짖는 소리”와 “큰 파멸”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큰 소리를 지르며 민족들을 파괴하던 바벨론이 침략자들이 내지르는 “요란한 소리”를 듣는다. 반드시 되갚으시는 보복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침략자의 편에서 싸우시기에 바벨론에게는 멸망 외에 다른 길이 없다(56절).
 
파괴자들이 들이닥치자, 바벨론의 용사들이 사로잡히고 그들의 활이 부러진다. 적에 맞서야 하는 용사들이 싸움을 포기한다. 이는 만군의 여호와라 일컫는 왕이 바벨론의 전투 능력을 마비시켰기 때문이다. 57절은 하나님께서 고관들과 지혜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리니 그들이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리라고 표현한다. 바벨론이 자랑하는 통치 조직과 지혜가 무용지물이 된다는 의미다. 전쟁을 계획하고 지휘해야 할 지도자들이 당황하여 판단력과 용기를 잃어버린다. 아무리 견고한 성벽과 높은 성문도 침략자들의 공세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58a절). 급기야 성벽이 허물어지고 성문은 불타버린다.
 
58b절은 진체 민족들 신탁의 요약에 해당한다. “백성들의 수고는 헛될 것이요 민족들의 수고는 불탈 것인즉 그들이 쇠잔하리라” 바벨론뿐만 아니라 바벨론에 의존하거나 유사하게 처신하는 민족들이 폭력과 불의로 얻은 것들이 불타 잿더미가 된다. 민족들의 수고는 헛된 것으로, 결국에는 남는 것이 없다.
 
 
 
2. 확정된 바벨론의 운명(59~64절)
예레미야가 “시드기야 왕 제사년(주전 594년)에” 왕을 수행하여 바벨론으로 가는 병참감 “마세야의 손자 네리야의 아들 스라야”에게 지침을 준다(59절). 스라야는 바룩과 형제다(32:12). 추측하기로 이 방문이 27장의 열국들의 예루살렘 회담과 관련된 것이라면, 주변 나라들과의 접촉으로 바벨론의 의심을 사게 된 봉신 시드기야는 주군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다짐하기 위해 바벨론을 방문한 듯 하다.
 
36장에서 예루살렘과 유다에 선포했던 심판의 마름을 두루마리 책에 기록하고 바룩을 시켜 이를 성전에서 낭독하게 했던 예레미야는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난’에 관하여 선포한 말씀을 한 권의 책에 기록하고 이를 스라야에게 넘겨주며 그가 해야 할 일도 가르쳐준다(60절). 이 두루마리 책에 기록된 바벨론에 대한 신탁은 50:1~51:58에 기록된 말씀 또는 일부였을 것이다. 기록은 일반적으로 보존을 위해 하지만, 본문은 심판의 확정성과 관련된 기록으로 보아야 한다. 한 번 문서로 기록되면 그 내용이 변경될 수 없는 것처럼 바벨론에 대한 여호와의 심판의지가 최종적으로 확정됐다.
 
또,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명령을 내리시듯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책의 낭독과 표저행위의 이중적 사명을 위임한다. 스라야는 예레미야가 넘겨준 책에 기록된 말씀을 바벨론에 가서 읽어야 한다(61절). “읽다(카라)”로 번역된 단어는 “여러 사람 앞에서 낭독하다”는 의미가 있다. 낭독의 장소나 청자에 대한 언급은 별도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책을 낭독하고 나서 할 말을 가르쳐준다(63절). 내용상 바벨론 신탁의 요약으로 바벨론의 멸망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결정에 속하기에 반드시 성취된다. 이 모든 땅, 들짐승을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주어 섬기게 하신 여호와께서 바벨론을 폐허로 만들고 거기에 짐승도 살지 못하게 하신다. 
 
그리고 스라야에게 맡긴 표적행위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여호와(명령하시는 하나님)와 예레미야(명령을 따르는 자)의 관계가 예레미야와 스라야에게로 그대로 적용된다. 스라야에게 책을 다 읽은 다음 책에 돌을 매달아 유브라데 강 한복판에 던지고(63절) “바벨론이 나의 재난 때문에 이같이 몰락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하리니 그들이 폐하리라(64절)”라고 선포해야 한다. 돌에 매어 유브라데 강 한복판에 던져진 “바벨론에 닥칠 모든 재앙”을 기록한 책이 바로 바벨론의 운명이라는 의미이다. 강바닥에 가라앉은 책이 다시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고 사라지는 것처럼 바벨론도 그렇게 멸망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이다.
 
예레미야서는 예레미야의 말들(1:1)로 시작하여 “예레미야의 말들(51:64)”로 끝난다.
 
 
 
나는?
-반드시 보응하시는 보복의 하나님께서 멸망이 임박한 줄도 모른 채 연회를 즐기며 큰 소릴로 떠드는 바벨론의 소리를 끊으신다. 많은 물같이, 사나운 파도 물결같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밀려오는 대적들에 의해 그 소리가 묻히게 하실 것이다. 멸망시키는 자가 도착하면 바벨론의 용사드로 사로잡히고 그들의 무기도 무용지물이 될 것이다. 보복의 하나님이 우리가 아는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에게 아무런 책임이나 반응을 요구하지 않는 눈먼 사랑은 아니다.
 
-악한 자들을 제압하여 그들을 잠잠하게 하신다(55절). 여호와 앞에 온 세계는 잠잠할 수 밖에 없다. 바벨론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끼친 고통을 반드시 되갚으시는 하나님이시기 떄문이다.
 
-바벨론이 무너지는 날 스스로 안전을 장담하던 자들이 먼저 무너질 것이다. 고관들과 지혜 있는 자들과 도백들과 태수들과 용사들을 취하게 하고 다시는 깨어나지 못하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자기 힘과 지혜와 무기를 의지하는 마음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완고함과 무지에 취한 자들이었다. 그날엔 바벨론의 성벽과 높은 문들도 불에 타서 무너져 그들을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이 나라 저 나라를 기웃거리며 위기를 모면해보려고 수고해도 헛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얻어낸 것마저도 다 불에 타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바벨론을 떠받치던 모든 것을 무력화 시키신다. 나라를 이끌고 지켜나가던 사람들도 두꺼운 성벽과 높은 성벽도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우리를 지켜줄 것은 우리 안에 없다.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으면 어떤 수고도 모래 위에 쌓은 성으로 간주될 것이다.
 
-시드기야와 함께 바벨론 왕을 찾아가는 스라야에게 바벨론의 멸망을 기록한 책을 바벨론 앞에서 읽고 그 책을 돌에 매달아 유브라데 강에 던짐으로써 책의 운명처럼 바벨론도 멸망하여 다시 일어서지 못할 것을 보여 주라고 하신다. 반 바벨론 세력이었던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게 잘 보이려고 스라야(그는 바벨론에게 항복하라던 예레미야의 동료였다)를 데리고 갔지만, 하나님은 바벨론의 심장부에서 그들의 분노를 자아낼 만한 메시지를 전하라고 명하신 것이다.
 
-목숨을 건 순종의 요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위태로움을 감수하고서라도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받고 또 전하고 있는가?
 
*예레미야는 자신의 사명을 철저하게 수행했다. 바벨론에 대한 심판의 말씀을 남김없이 기록했다. 그 말씀을 사신으로 가는 스라야에게 맡겨 바벨론 사람들에게 읽어주도록 했다. 그런 다음 그 말씀을 적은 책에 돌을 매달아 강에 던진 후, 바벨론의 멸망을 경고하도록 부탁했다. 이런 조치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사람들에게 틀림없이 전해지도록 보증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들려져야 한다. 전하는 환경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보다 늘 먼저인 것은 그저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주님께서 부탁하신 것처럼 말씀을 전하고 가르쳐 지키도록 힘써야 한다. 특히 효과적인 전달을 위해 충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되어야 한다. 책을 돌에 매어 강에 던지라는 상징 행위의 의미는 자칫 포기하라는 말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반대다 기록된 말씀이 돌에 매여 강 속으로 사라졌지만, 들은 말씀을 또렷이 기억하라는 거다. 기록은 지워지고 사라지더라도 기억된 말씀은 쉽사리 망각되지 않는다. 기억이 희미해 지면 삶의 정체성이 흔들린다.
 
*기억된 말씀은 기도로 이어진다. 62절의 새번역은 “주님, 주님께서 친히 이곳을 두고 말씀하시기를, 이곳에는 아무것도 살 수 없도록 멸망시켜서, 사람도 짐승도 살 수 없는, 영원한 폐허로 만들겠다고 하셨습니다 하고 기도하십시오.”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말씀의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가 스라야에게 기도하라고 권한 내용은 간구형이 아니다. 예레미야가 받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반복하여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기도해야 할 내용은 그저 “주님께서 바벨론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였다.
 
*기도는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하나님께 말하는것도 기도라는 것을 본문은 증거한다. 이는 하나님 말씀을 모르고 기도를 아무리 열심히 한들 그 기도가 참된 기도가 될 수 없음을 일깨운다.
 
*꽤 많은 시간을 묵상하고 기록하여 나누고 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묵상을 글로 정리하기 위해서다. 글로 정리하다보면 기억에 새록 새록 새겨진다. 새겨진 말씀은 언제고 내 안에서 도드라지게 생각나게 한다. 그렇게 부각된 말씀은 자연스레 기도의 내용이 되더라.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록한 것은 기억으로 남는다. 기도의 내용이 된다. 그만큼 하나님과 교제가 깊어지고, 기도의 내용도 깊어진다. 무엇보다 기억으로 남는다. 그 말씀이 언젠가 나를 다시 붙잡아준다. 말씀이 주는 힘이다.
 
 
 
 
*주님, 바벨론 멸망의 예언이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정작 중요한 것은 예레미야가 이 예언을 듣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백성이 들어야 했기에 스라야에게 사명을 위임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들려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하고 막중한지 깨닫습니다. 말씀을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늘 전하겠습니다.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물러서지 않겠습니다.
*주님, 기록한 말씀이 기억이 되고 기도의 내용이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기록되어 기억된 말씀을 고백하고 나누며 말씀대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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