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백성의 자랑거리인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잿더미가 되고 성벽이 허물어진다. 성전 기물이 전리품으로 약탈당하고 사로잡힌 자들은 처형을 당한다. 여호와께 불순종한 결과로 예루살렘과 유다는 황무지로 변한다.
1. 예루살렘과 성전의 운명(12~16절)
예루살렘 점령과 시드기야에게 행한 혹독한 징벌로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보복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느부갓네살 왕의 열아홉째 해 다섯째 달 열째 날에 바벨론 왕의 어전사령관 느부사라단이 예루살렘에 들어와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과 예루살렘의 모든 집을 불태워버린다(12~13절). 다윗 왕조의 두 기둥이었던 왕궁과 성전과 함께 예루살렘이 잿더미가 된다. 또 예루살렘 사면 성벽이 모두 파괴되어 허물어진다(14절).
항복을 거부하고 18개월 동안 저항한 대가로 성이 잿더미가 되고 성벽이 헐린다. 성전을 불태우는 것은 상당히 예외적인 것이었는데, 이는 예루살렘 성전에 속한 제사장들과 예언자들이 끝까지 바벨론에 대항하여 싸우도록 부추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렘 37:19). 성벽은 주민의 안전과 보호에 필수적이었다. 성벽이 파괴된 성은 외부 위협에 그대로 노출될 수밖에 없기에 예루살렘에 남은 자들은 목숨을 내놓고 살아야 했다. 느부사라단은 성읍에 남아 있던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들과 그 밖의 남은 자들을 바벨론으로 끌고 가고(15절), 가난한 백성을 얼마 남겨 포도원을 가꾸고 농사를 짓게 한다(16절). 유다의 정치와 종교와 사회를 지탱해온 자들은 모두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고, 가난한 하층 계급에 속한 자들만 남겨진다.
2. 성전 기물의 파괴와 약탈(17~23절)
바벨론은 놋과 은과 금으로 된 성전 기물을 남김없이 약탈해간다(13~15절). 운반하기 힘든 두 놋 기둥과 받침과 놋 바다는 부숴 놋으로 만들고(17절), 가마와 부삽과 부집게와 숟가락과 예배 때 쓰는 모든 놋그릇과 불 옮기는 그릇과 주발은 그대로 바벨론으로 가져간다(18~19절). 21~23절은 특별히 두 기둥의 크기와 장식에 관해 언급한다.
솔로몬 왕이 건축하였던 성전은 파괴되고, 귀금속으로 만들어놓았던 성전 기물은 모두 약탈당한다. 여호와의 축복 가운데 허락된 에루살렘 성전과 성전 제의가 여호와의 심판으로 파탄에 떨어졌다.
3. 고관들의 처형과 유배민들의 규모(24~30절)
유다 멸망에 대한 보고는 사로잡힌 종교 지도자들과 고위 관료들, 군사 지도자들이 립나로 끌려가 처형당하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성전 문지기 세 사람, 군사를 거느린 지휘관 한 사람, 왕의 시종 일곱 명, 백성을 징집하는 서기관 한 명과 평민(땅을 소유한 유다의 지도자들 또는 일반 시민들) 육십 명이 사로잡혀 처형당한다. 유다의 통치 계급이 철저하게 궤멸된다.
28~30절은 사로잡혀간 유배민들의 수를 언급한다. 열왕기에는 등장하지 않는 예레미야서의 특별 자료에 해당한다. 느부갓네살 열여덟째 해에 예루살렘에서 사로잡힌 자 832명, 느부갓네살 제이십삼년에 유다 사람 745명, 합 4,600명의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이 바벨론으로 끌려갔다. 반면 열왕기 기록에 따르면 597년 1차 유배(왕하 24:14~16)때 “예루살렘의 모든 백성과 모든 지도자와 모든 용사 만 명과 모든 장인과 대장장이(14절)” 또는 “용사 칠천 명과 장인과 대장장이 천명(16절)”이 유배를 당한다. 예레미야서의 기록은 열왕기의 보고와 달리 숫자 끝자리까지 정확하게 기록한다. 또, 느부갓네살 왕의 연대기에 따라 세 차례의 유배를 꼭 필요한 내용만 보고하는 것으로 보아 바벨론의 공식적인 자료에서 나왔을 가능성을 시사해준다.
3. 여호야긴의 사면(31~34절)
597년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다 왕 여호야긴이 사로잡혀 간 지 삼십칠 년이 되는 해, 곧 느부갓네살의 아들 에월므로닥(562-560)이 왕위에 오른 바로 그해 열두째 달 스물다섯째 날에 감옥에서 석방된다. 왕위 등극에 따른 일반 사면으로 다른 왕들과 함께 풀려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열여덟 살의 나이로 왕위에 올라 석 달을 다스리다가 바벨론으로 끌려간 여호야긴에게 일곱 명의 아들이(대상 3:17~18) 있었던 것으로 보아 그가 처음부터 감옥에 갇혔던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초기에는 인질 신분이었다가 중도에 옥에 갇혔을 가능성이 크다. “머리를 들어 주었고”라는 표현은 왕을 알현할 때 의례적인 행위와 관련된 표현으로 “사면하다”를 의미한다.
에윌므로닥은 여호야긴을 남달리 특별하게 대우한다(32절). 바벨론에 잡혀온 다른 왕들보다 더 높은 곳에 자리를 마련해 준다. 감옥에서 풀려난 여호야긴을 죄수복을 벗고 평생 동안 언제나 바벨론 왕 앞에서 음식을 먹게 되었다(33절). 또한 바벨론 왕이 정해준 일정한 생계비를 “죽는 날까지 곧 종신토록” 받았다(34절).
여호야긴의 석방 기사는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가 멸망과 유배로 끝나지 않고 새로운 시작과 소망이 있을 것을 어렴풋이 시사해준다. 예레미야는 24장에서 무화과 열매 두 광주리의 환상을 통해 하나님 백성의 남은 자들이 가나안이나 애굽이 아니라 바벨론의 1차 유배민들 가운데 있을 것을 선포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유배의 암울한 시기를 살아가는 중에 들려온 여호야긴의 석방 소식은 적어도 유배민들에게는 유다 회복의 서곡처럼 들렸을 것이다.
나는?
-왕궁과 백성의 집은 불탔고 성벽은 헐렸다. 이스라엘의 자랑이요 자부심이었던 것들이 한순간에 잿더미가 되었다. 안전과 번영의 상징이 수치와 조롱의 상징으로 바뀌었다. 애굽 편에 서서 바벨론에게 대항하던 자들은 처절하게 죽임을 당했고 항복한 이들과 남은 백성은 포로로 잡혀갔다.
-유다 땅에는 바벨론에게 반역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어 보이는 빈민들만 남았다. 하나님의 영광은 떠났고 예루살렘은 재기 불능의 폐허가 되었다.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절대 순종 말고 달리 살길을 주신 적이 없다.
-바벨론 군대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약탈하여 바벨론으로 가져간 성전 기구들과 시설들을 나열하고 있다.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성전 기물들이 포로로 잡혀간 것은 하나님의 수치요 이스라엘의 수치였다. 하나님은 스스로 무기력한 분처럼 보이시면서까지라도 이스라엘의 죄악에 눈감지 않으신다.
-시위대 장관이 예루살렘에서 사로잡은 주요 인사들의 명단을 바라보라. 유다의 정치, 군사, 종교, 민간 지도자들의 이름이다. 이들은 유다 타락과 멸망의 일등공신들이다. 지도자들로부터 시작된 타락이 누룩처럼 온 유다 전체에 퍼져서 어떤 악으로도 치유 불가능한 상태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늘 지도자에게 더욱 더 혹독한 책임을 물으셨다.
-바벨론 왕이 여호야긴을 풀어준다. 융숭한 대접을 해준다. 죄수의 옷을 벗기고 평생 왕의 식탁에서 먹게 함으로써 친구로 대해주었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은 은혜이다. 이스라엘 왕의 회복은 이스라엘 회복의 전조다. 다윗이 왕위가 영원할 것이라는 약속을 ,바벨론 포로에서 칠십년 만에 회복시키시겠다는 믿지기 않는 약속을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고 이미 성취하기 시작하셨음을 보여준다.
*예레미야가 이스라엘에 내린 경고가 그대로 이루어졌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하고 의지하던 성전마저도 불타버리고, 남아 있던 사람들은 포로로 끌려갔다.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말씀으로 경고하신 것에 귀를 닫은 당연한 결과였다. 성령께서 속히 돌이켜야 할 죄를 깨닫게 하실 때 믿음으로 취하여야 할 것이다.
*유다의 불순종이 가져다 준 비극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참담하다.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물건들인 성전 기구들이 이방인에게 약탈당한다는 것은 경건한 유대인들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는 그들의 불순종이 불러들인 심판의 단호함이 아니겠는가?
*성안에 남아 있던 관리들과 백성들이 붙잡혀 처형을 당한다. 투항하지 않은 이들은 하나같이 죽음을 면치 못한 것이다. 하나님을 등진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단호하기만 하다.
*세 차례에 걸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의 숫자는 여자를 제외한 남자들만을 헤아린 듯하다. 당시 예루살렘과 유다의 인구는 이미 전쟁과 기근으로 인해 크게 감소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루살렘에는 가난한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남아 있는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엄청난 고난과 이 속에서 끈질기게 갈망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다시 발견되게 될 것이다.
*여호야긴 왕에게 일어난 일은 이스라엘의 장래에 대한 가느다란 희망을 엿보게 한다. 여호야긴을 고향 땅에 돌아오지 못하나, 그의 자손 대에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귀환이 이루어졌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심판하여 이방에 유배시켰다. 하지만 그들을 영원히 버리신 것은 아니다.
**예레미야 묵상을 마무리하며…
*예레미야의 열방에 대한 심판예언은 이렇게 예루살렘이 무너질 때 선포된 것이다. 미래에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선언이 지독한 현실에서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나의 절망이나 우리 민족의 절망이 하나님의 절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삶은 유한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절망의 하나님이 아니라는 사실 하나 만으로도 인간은 꿈을 꿀 수 있는 것이다. 희망을 노래하며 지독한 현실에서 마지막 남은 힘을 짜낼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자기 세대는 멸망이어도 후손은 회복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잠들수 있는 것이다.
*또, 바벨론 멸망의 예언은 절망스러운 현실이지만 결코 낙심하거나 두려워할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는 어리석음에 빠지지 말라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말씀하신대로 성전과 성벽과 온 성이 무너지고 불타는 것을 바라보며 말씀하신대로 바벨론이 똑같이 무너질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절망 가운데를 지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붙든다면 버티고 견디며 살아낼 수 있다.
*예레미야를 묵상하는 내내 한국교회와 나라와 정치와 연결되면서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다. 우리민족과 교회는 과연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침몰하는 것이 눈으로 보이고 마음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다잡고 싶지만, 여간해서 잡히지 않는 현실이다. 과연 이러한 시대 희망을 품을 수 있을까? 예레미야는 단연하게 그렇다고 내게 소리쳤다.
*왜냐하면 철저히 무너져 포로로 끌려간 바벨론에서 아주 작은 희망이 움텄기 때문이다. 여호야긴의 석방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회복의 약속을 더욱 붙잡게 하는 계기가 된다. 왕이 바뀌고 포로에 대한 태도가 변한다. 여호야긴을 석방하고 일생 동안 생활비를 대준 것이다. 변화의 씨앗이 보인것이다. 현실만 바라보면 절망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도무지 절망적인 세셍과 어울리지 않을듯한 변화를 보여주신다. 그것이 희망의 씨앗이다.
*나는 그 변화의 씨앗이 “말씀을 사모하고 소망하며 간절히 찾는” 성도들이 점점 늘어난다는 것에 두고 싶다. 그저 축복만 갊아하던 성도들에게서 하나님 말씀에 대한 간절함과 사랑으로 묵상을 시작하고, 한 문장의 말씀으로 절망적인 상황을 이겨내는 믿음의 의지가 다져지는 것에서 다시 시작하게 하실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게 된다.
*내가 목회하는 시기는 더욱 더 하나님에게서 멀어져가는 세상일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런 세상 속, 하나님의 백성들은 적은 수라도 더욱 말씀을 구하고 찾고 두드리며 말씀따라,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말씀세대가 일어날 것이다. 완전히 깨져야 새롭게 회복되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구원의 은혜를 말씀을 통해 날마다 맛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예레미야서의 마지막은 가장 고통스런 절망의 이야기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말씀하신대로 깨어지고 처참하게 무너졌으니, 이제 세롭게 회복시키는 놀라운 구원의 일을 하나님께서 시작하셨음을 보게하는 희망으로 마무리되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말씀대로 세상의 것은 철저히 깨어지고, 말씀대로 하나님의 새로운 마음과 영으로 회복되어 늘 하나님의 은혜안에 서도록 이끄실 것이다.
*주님,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유다와 예루살렘의 멸망을 봅니다. 말씀하신대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기억하겠습니다.
*주님, 아무리 절망적인 시간속에 있더러도 부활의 주님이 주시는 희망을 놓치지 않고 견디어 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