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아브라함과 요셉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 [시편 105:12-23]
 – 2024년 08월 27일
– 2024년 08월 27일 –
본 단락은 창조의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라는 사실을 노래한다. 찬송시의 형태로 이스라엘이 하나의 국가로 수립되기 전 나그네처럼 이리저리 떠돌던 삶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특히 땅의 기근과 요셉이 노예로 팔린 사건을 되돌아보는 것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살필 수 있게 한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어떻게 진행되고 그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미쉬파트)가 어떻게 성취되는가를 보여주는 교훈시이다.
 
 
 
1. 아브라함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12~15절)
본문은 1~11절에 나타난 아브라함 언약에 대한 설명을 계속해서 이어나간다. 5, 7절에 나타난 하나님의 미쉬파트(공의)가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설명한다. “미쉬파트(공의)”를 하나님의 심판만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미쉬파트는 언약적인 개념을 전제한다. 즉, 백성이 하나님께 반역하지 않는 한 언약을 주도적으로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언약 성취를 뜻한다. 본문은 이를 잘 설명해 준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 여정은 아브라함에게는 나그네의 삶을 살아내야 한다는 전제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적은 수의 가족은 그 땅의 나그네가 되어(12절),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떠돌아다녔다.(13절). 이런 와중에도 하나님은 가는 곳마다 그 땅의 사람들에게 아브라함 가족이 억압당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아브라함으로 인해 왕들을 꾸짖으셨다(14절). 하나님은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을 차지할 것이라고 약속하셨지만(11절), 시인은 즉시 차지할 수 없는 이유를 밝혔다. “사람들의 수가 적었고 나그네로 살았기(12절) 때문이다. 실제로 아브라함과 후손들은 가나안 땅의 이곳저곳을 떠돌고 배회하였다(창 12~35장). 아브라함이 거주할 땅을 약속받았으나(창 15:7), 이 언약이 실현되기까지 수백 년이 걸렸다. 그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이 족속에서 저 족속으로, 이 나라에서 또 다른 나라로 떠돌아다녔다(13절). 이스라엘의 선조가 매우 취약하고 무기력한 소수의 나그네로 살았다는 점을 분명하게 드러낸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이 이동하며 살았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은 철저히 소수자들이었다. 그들의 삶은 “불안정과 위태로움” 상황에 늘 직면해야 했다. 이는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특별한 보호가 필요함을 깨닫게 한다.
 
11절과 12~13절의 대조는 약속받았지만, 그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삶을 살아야 했던 아브라함의 삶을 재조명한다. 하나님은 이런 위태로움과 불안정한 이스라엘 선조들에게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을 억압하지 못하게 하셨고, 그들을 향해 대항하는 왕들을 꾸짖으셨다(14절).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소수자들은 힘을 가진 자들에게 착취당할 위험성이 크다. 아브라함은 애굽 바로 왕과 아비멜렉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길 뻔했다(창 12:7; 20:3). 아들 이삭도 그랄 땅에 거주할 때 아브라함과 비슷한 생존의 위협을 느끼고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야 했다(창 26:6~11). 이때마다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도우셨다.
 
시인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직접화법으로 인용했다. “손대지 말라, 나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마쉬아흐)을, 나의 선지자들(네비아이)을 해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시인은 마쉬아흐와 나비의 복수형을 교차병행 동의어처럼 표현하였다. 그리고 독특한 점은 “기름 부은 받은 자(마쉬아흐)”라는 표현은 왕, 선지자, 제사장 직분을 가진 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데, 본문에서는 백성 전체를 복수형의 기름 부음 받은 자들(마쉬아흐)과 선지자들(네비아이)로 사용했다. 이것은 왕, 선지자, 제사장이라는 특별한 지위를 백성 전체에 확장한 것으로 보이며, 출애굽기 19:5~6에서 선언하신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면 모든 민족 중에서 내 보물이 되고,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될 것이라는 언약의 말씀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지기 백성을 나그네 같은 삶 속에서 억압당하지 않도록 보호하시고 지켜 주신다.
 
참고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가리켜 “나의 기름 부은 자”라고 선언하셨고, 아브라함의 가족들을 향해 “나의 선지자들”이라고 말씀하셨다. 이 부분은 구약 해석에 있어 매우 특별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일반적인 의미로 기름 부음 자나 선지자라고 말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구약의 구속사에서 왕, 제사장, 선지자라는 기름 부어 직분을 세우는 세 개의 직책은 모세 이후 즉, 이스라엘이 민족 국가를 형성한 후 그 공동체를 하나님의 통치 개념으로 운영해 나가기 위해 세워진 제도들이다. 그렇기에 기름 부은 자와 선지자들이라는 표현을 모세 이후의 제도적 개념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 더 포괄적인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이런 시각으로 아브라함이 기름 부은 자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열방으로부터 구별하여 불러내셔서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직분을 주셨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언약의 대상자가 되어 열방을 향한 복의 통로로 구별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귀중한 직분을 얻었기에 열방이 그를 해치려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그냥 놓아두실 수 없었다는 것이다. 또 아브라함의 가족들이 선지자들이었다는 것은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선지자였다는 의미다. 선지자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인간들에게 전달하는 말씀의 전달자이다. 이들은 한 개인, 한 가족에 불과했으나 하나님을 만나 뵈었고 그의 말씀을 들었으며 그 말씀들을 열방에 전하였다. 족장들의 삶 속에서 주위의 민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거나 그들의 삶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직접 백성들에게 나타나신 것을 알 수 있다. 특별히 창 20:7에서는 하나님께서 아비멜렉에게 직접 “아브라함은 선지자라”고 선언하시면서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기도해야 재앙을 무르실 것을 말씀하신다.
 
이와 같이 아브라함과 가족은 약속의 땅을 실제로 소유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신실하게 역사하고 계셨음을 본문은 증거한다.
 
 
 
2. 요셉에게 행하신 하나님의 언약적 공의(16~23절)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가나안 땅에 거주할 때, 그(하나님)가 그 땅에 기근을 불러들이셨고 온갖 양식을 끊어버리셨다(16절). 이것은 야곱의 가족이 기근으로 인해 애굽으로 가게 된 때를 말한다. 이때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으니, 노예로 팔린 요셉이다(17절). 약속의 땅에 복을 주시기는커녕 오히려 기근을 불러들이셨다는 것에서 사람의 생각으로는 언약을 이루지 않는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실제로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정확하게 일하고 계신다.
 
17~22절은 요셉이 애굽에 종으로 팔려 가서 총리가 되기까지의 일련의 과정을 시로 표현한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앞서 애굽으로 보내셨고(17절), 애굽에서 그는 발에 차꼬를 차고 그의 목은 쇠사슬에 매이기까지 했다(18절). 이렇게 요셉이 고난을 받은 이유를 19절에서는 여호와의 말씀이 응하는 것을 체험하여 단련하기 위함이라고 밝힌다. 이와 같은 기록은 언약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은 언약 자체가 무효화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단련하기 위한 훈련의 과정임을 밝힌 것이다. *이런 요셉의 예를 드는 중요한 목적은 이스라엘의 역사 전체를 요셉에게 투영하여 시편 제4권의 역사적인 배경이 되는 포로기 시점에서 공동체가 하나님의 회복을 소망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언약의 성취는 상황의 좋고 나쁨에 있지 않고 성취의 신실함에 있는 것이다.”
 
20~22절은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등극하는 장면이다. 애굽의 바로가 요셉을 석방하여 바로의 모든 소유를 “통치하는 자”가 되었다. 22절은 요셉이 자기 뜻대로 모든 신하와 장로들을 다스렸음을 보여준다. 23절은 요셉이 총리가 된 결과를 한 문장으로 표현하는데, “야곱이 함의 땅에서 나그네가 되었다”이다. 12절에서 노래한 것처럼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은 그 땅의 주인이었음에도 그의 생애 동안 그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야 했고, 야곱과 그의 자녀들은 열방을 다스릴 복의 통로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로 지내야 했다.
 
“나그네”라는 개념은 언약의 성취 과정에서 매우 주목해야 할 중요한 신앙적인 개념이다. 이루실 것을 약속받았으나 그 이루심을 모두 다 체험하지 못한 자들이, 이미 이루어주셨음을 믿고 확신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를 굳게 붙들고 고백하며 살아가는 형태를 “나그네”라고 부른다. *돌아갈 땅이 있고, 소유할 기업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나그네”라고 부른다.
 
 
 
나는?
-이스라엘에게 선택받고 사랑받을 만한 것이 전혀 없었다. 보잘것없는 소수였고, 이 족속 저 족속 사이를 떠돌이 다니는 나그네에 불과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랑이 그들을 선민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다(신 7:7~8). 아브라함을 축복하는 자는 축복하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시겠다는 주권적 약속에 신실하셨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요 선지자(창 20:7)인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을 억압하거나 해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창 12:14~20; 20:2~7).
 
-언약 백성은 나의 소유와 조건이 아니라 그 사랑과 그 보호하시는 손길에 우리 인생을 맡기는 자들이다.
 
 
-나그네(12, 23절)라는 표현으로 본문이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대중가요에도 ‘인생은 나그넷길’이라고 표현한 노래가 있다. 나그네는 자기 고장을 떠나 다른 곳에 잠시 머물거나 떠도는 사람이다. 이스라엘은 정처 없는 나그네였다(12, 13절). 하기야 아브라함은 애초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하고(히 11:8)” 순종하여 길을 나섰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나그네”로 칭하시고, 이스라엘도 자기 정체성이 나그네(떠돌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왜 그럴까?
 
-히브리서의 나그네는 고향을 찾는 사람이고 하늘을 사모하는 사람이다(히11:13~16). 성경이 말하는 나그네란, 땅의 삶을 궁극으로 보지 않는 사람이다. 땅은 목적이 아니라 과정이며,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하다. 그러므로 나그네, 곧 하늘을 소망하는 사람은 세상의 가치에서 벗어날 수 있다. 세상 질서에 함몰되지도 않는다. 이생의 자랑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나그네는 이 땅 너머의 하늘 세계를 동경하며 지금 여기에서 하늘 세계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이런 나그네에게는 중요한 의무가 있다. 다른 나그네를 선대 하는 일이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기초였다. 이 질서가 붕괴할 때 하나님의 심판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모세는 신명기를 통해 분명히 선포한다. “당신들이 나그네를 사랑해야 하는 것은, 당신들도 한때 이집트에서 나그네로 살았기 때문입니다(새번역_신 10:19).”
 
-그리스도인의 삶은 지금, 여기에서 세상 질서에 종속되지 않는 하나님 나라 질서를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이런 삶은 세상 속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 가치와 법도를 추구하며 사는 삶이다. 하나님 나라 가치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한 약속을 신실하게 이루어주신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는 것이고, 하나님 나라의 법도는 내가 받은 하나님 구원의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며 함께 누리며 살아가는 이웃사랑(나그네를 대접하라)으로 구현된다. 신앙생활은 복잡하지 않다. 그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기록된 말씀이 가르쳐주시는 대로, 담담히 순종하며 살면 된다. 그런데 이게 잘 안된다.
 
 
-하나님만이 역사를 섭리하시는 주권자이시다. 형제들 간의 불화를 통해 요셉을 애굽 땅으로 데려오신 것이나, 가나안 땅에 기근을 보내 그곳을 떠날 수밖에 없게 하신 것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다. 요셉이 억울한 일을 연거푸 당하여 감옥에서 말씀으로 연단 받게 하신 후에 애굽의 통치자가 되어 자신을 쇠사슬로 “매었던” 자들을 다르시고(매고) 그들에게 지혜로 교훈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역사였다. 그를 통해 이스라엘을 고센 땅에 정착하게 하여 그곳에서 안전하게 자손이 번성하게 하신 것도 하나님의 뜻이었다. 신앙은 근본적으로 시각 교정이고 욕망 전환이다. 내 인생과 세상 역사를 하나님의 시각으로 해석할 구체적인 의지와 방법을 갖는 문제가 아니겠나.
 
 
 
 
*주님, 약속하신 것을 신실하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공의가 지금 여기 하나님 나라를 이루신 것을 믿습니다.
*주님, 보잘것없는 아브라함을 부르신 것을 통해 오늘 나도 보잘것없고 내세울 것 없지만, 은혜로 구원의 자리로 불러 주셨음을 바라봅니다.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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