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수넴 여인의 죽은 아들을 살림 [왕하 4:18-37]
 – 2024년 09월 08일
– 2024년 09월 08일 –
수넴 여인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하나님은 주권적인 계획과 뜻 안에서 사람의 생사를 주관하신다. 하나님의 기적으로 수넴 여인에게 태어난 아들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여인은 아들을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지체하지 않고 그를 찾아 나선다. 갈멜산에 머물고 있던 엘리사는 여인이 비통한 상황임을 알고 먼저 게하시를 보내어 살리려 했지만 살아나지 않는다. 여인을 따라 함께 나서 도착한 엘리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조치를 취한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여 아이를 소생시키신다.
    
    
    
1.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음(18~20절)
기적으로 생긴 아들이 자라던 어느 날, 추수하러 간 아버지에게 간 아들은 갑자기 두통을 호소하였고, 아버지는 시종을 시켜 그의 어머니에게로 보낸다. 아이는 그날 정오 무렵에 어머니의 무릎에서 숨을 거둔다. “정오”라는 시간 표현은 아이가 발병한 지 한나절도 못 되어서 급작스럽게 죽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아침 잘 먹고 아버지와 추수하러 나갔던 아이가 갑자기 업혀 오더니 손써볼 틈도 없이 정오 무렵 품에서 죽은 것이다.
    
수넴 여인은 두 가지의 고통을 겪었을 것이다. 먼저, 아직 어린 아들의 죽음 자체에 대한 고통이며,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왜 아들을 얻는 기쁨을 주시고는 이렇게 무참하게 빼앗아 가시는지, 그 뜻을 알 수 없어서 겪는 고통이다. 수넴 여인은 아들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2. 엘리사를 찾아가는 수넴 여인(21~28절)
수넴 여인은 죽은 아들을 엘리사의 방으로 데리고 올라가 엘리사의 침상에 눕히고 문을 닫고 나와 다른 사람들이 아이에게 접근할 수 없게 한다. 그러고는 남편을 불러 자신에게 종 한 사람과 나귀 한 마리를 주어 자신이 하나님의 사람에게 달려갔다 올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남편은 초하루나 안식일처럼 특별히 선지자를 찾아가 신탁을 받는 날도 아닌데 왜 엘리사에게 달려가느냐고 반문하며 만류한다. 남편은 이미 아들이 죽었는데 예의도 없이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의미로 아내를 말린 것이었다.
    
여인과 남편의 대화를 원문으로 살펴보면 22절은 전체적으로 청유형 문장이다. 이는 수넴 여인이 엘리사에게 다녀올 수 있도록 매우 공손하게 남편에게 요청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녀는 남편에게 예의 바른 아내였다. 반면에 23절의 문장은 남편이 가지 말라는 말을 듣고는 아무 설명 없이 다녀오겠다는 인사만 하고 바로 출발한다. 이것을 보면 수넴 여인은 예의 바른 아내인 동시에 매우 독립적이고 의지가 강한 인물임을 짐작하게 한다.
    
집에서 출발하면서 여인은 사환에게 자신을 배려하여 나귀 모는 속도를 늦추지 말라고 한다. 도리어 최대한 빨리 가자고 재촉한다. 갈멜산에 도착했을 때 엘리사가 먼저 알아본다. 선지자는 게하시를 보내 수넴 여인에게 남편과 아이의 안부를 물어보라고 한다. 게하시의 안부 인사를 들은 여인은 그냥 간단한 인사만 하고는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지나친다. 곧장 산으로 달려가 엘리사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선지자를 만나자마자 그의 발을 끌어안는다. 이 행동은 자신을 낮추고 애원하는 행동이다. 구약성경에서는 본문에서만 등장하지만, 당시 근동 지방의 여러 문서에서 온갖 도망자나 간구자 들이 복종이나 굴복을 나타내고 탄원하기 위해 왕의 발을 안는 예들이 매우 많이 등장한다.
    
이런 갑작스러운 행동을 본 게하시는 수넴 여인을 제지하려고 하였지만 엘리사는 그대로 두라고 한다. 다만 무슨 내용인지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지 않아 자신도 모른다고 한다. 여인의 행동을 보면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것은 분명하여 공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수넴 여인은 엘리사에게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자신이 아들을 구한 적이 있느냐, 나를 속이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며 원망의 말을 쏟아낸다. 이 말은 자신이 구하지도 않은 아들을 주어서 삶에 희망과 기쁨을 품게 하고서는 이제 이처럼 무책임하게 아들을 죽게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아들을 잃은 비통함과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에서 오는 아픔을 토로한다. 또한 이 말은 엘리사가 아들을 얻게 했으니, 아들의 죽음도 책임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동시에 엘리사라면 다시 이 아들을 살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이 들어 있기도 할 것이다.
    
여인은 아픔을 쏟아놓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들을 살릴 희망(믿음)이 있으므로 먼 길을 급하게 달려 온 것이다.
    
    
    
3. 엘리사의 동행을 요청한 수넴 여인(29~31절)
수넴 여인의 말을 듣고 아이의 죽음을 알게 된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들고 급히 아이에게 가서 지팡이를 아이의 얼굴에 놓으라고 명령한다. “허리를 묶는다”라는 것은 달려가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급하게 뛰어가라는 뜻이다. 아무에게 인사하지도 받지도 말라는 역시 위급한 상황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최대한 빨리 가서 아이 얼굴에 자신의 지팡이를 놓으라고 명령한 것이다.
    
선지자의 지팡이는 선지자의 능력의 상징이며 지팡이를 통해 엘리사의 능력이 아이에게 임할 것이라는 의미다. 하지만 수넴 여인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고 엘리사를 절대 떠나지 않겠다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다. 엘리사가 가야 아이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그가 반드시 가야 한다고 매달린 것이다. 결국 엘리사도 여인을 따라나선다.
    
엘리사보다 먼저 도착한 게하시가 지팡이를 아이 얼굴 위에 놓았지만, 아이는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는다. 숨소리도 없고 생명의 징후를 나타내는 어떤 움직임도 없었다. 그러자 게하시는 엘리사에게 돌아와 아이가 깨어나지 않는다고 보고한다. 엘리사의 지팡이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여기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할 지팡이를 엘리사가 게하시에게 먼저 보냈을까? 지팡이는 단지 지팡이를 쓰는 사람의 신앙을 표시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게하시가 하나님께서 아이를 살리실 것이라는 믿음이 없으면 그 지팡이는 아무런 효과도 발휘하지 못하게 된다. 지팡이가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은 뭐가 이유가 있을 듯하다.
    
    
    
4. 죽은 아이를 살린 엘리사(32~37절)
엘리사는 자신의 침상에 누워 있는 아이를 보고 여호와께 기도하고 아이의 몸에 자기 몸을 올려놓는데, 입과 입, 눈과 눈, 손과 손을 대고 아이 위에 누웠다. 엘리사가 지팡이 대신 자신을 아이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런 행동은 열왕기상 17:21에서 엘리야가 사르밧 과부의 아이를 살리는 모습과 유사하다. 엘리야는 아이의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으며 기도했고 아이가 살아났다.
    
엘리사도 이렇게 하자 아이의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엘리사는 잠시 내려와 집 안을 돌아다닌 뒤 다시 올라가 아이 위에 엎드리니 아이가 살아나게 된다. 아이가 재채기하거나 눈을 뜬 것은 게하시가 지팡이를 올려 놓았을 때 아무 반응이 없었던 것과 확연하게 대조된다. 이렇게 살아난 아이는 다시 엄마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이 과정에서 엘리사 또한 영적 성숙을 경험했으리라 생각된다. 자신의 영향력으로 왕과 군대 장관을 통해 수넴 여인을 돌볼 수 있다고 말한(13절) 것이나, 게하시에게 지팡이만 보낸 것은 하나님께 온전히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실수라도 용납하시며 그를 하나님의 사람 답게 하나님의 영광된 이름을 드러내신다. 이로써 하나님은 수넴 여인의 아들도 다시 살려 주시고, 엘리사도 영적으로 초점을 더욱 하나님께로 맞추셨다.
 
수넴 여인은 죽은 아이가 살아난 것을 보면서 다시 한번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체험하였다. 엘리사도 엘리야처럼 사람을 살리는 놀라운 권능을 행함으로 엘리야의 확실한 후계자라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선물이 준 고통. 수넴 여인은 선물로 주신 아들을 잃었다. 일생 가장 감사와 위로와 소망이었던 이 축복이 가장 큰 아픔과 비탄의 이유가 되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가져가시는 것이 당연한데도 우리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가 너무 힘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 세상에는 절대 행복도 절대 불행도 없음을 깨달을 뿐이다. 일상에서 혼재하는 행복의 그림자와 불행의 아우라를 보면서 참 소망을 하나님께만 두어야 하겠다.
    
-믿음이 준 소망. 아들을 잃은 여인은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지 이 죽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아들을 선지자가 눕던 침상에 눕히고 문을 닫고 나온다. 남편의 질문에 ‘평안’의 인사로 응수한 것은 다시 살아날 것의 희망을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인은 지체없이, 거침없이 하나님의 사람에게로 올라간다. 큰 슬픔을 억누르며 달려갔지만, 더 큰 희망을 안은 채 멈추지 않고 현실을 격파하면 나아갔다.
    
-믿음이 준 용기. 엘리사가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선지자가 자기 한계를 인정하자 어미의 마음이 무너진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엘리사는 사환 게하시에게 자신의 지팡이를 들려서 대신 보내려 하지만, 여인은 선지자가 직접 가기를 간청한다. 아이가 죽었을 때도, 남편이 만류했을 때도, 선지자가 무지를 인정하고 직접 나서지 않을 때도 여인은 희망을 꺾지 않는다.
    
-하나님이 끝이라고 하시기 전에는 절대 포기하지 않았다. 어미의 저돌적이고 고집스러운 믿음이 선지자를 움직였고 죽은 아들을 살렸다.
    
-믿음이 준 생명. 엘리사는 “여호와께서 알려주시지 않았고” 게하시를 통한 역사가 실패했지만, 여인의 절박함에 끝까지 귀 기울이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끝까지 “숨어 계시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였다. 한 번에 완전히 소생하지 않자 다시 시도하여 온전한 아들을 어미 품에 안겨 주었다.
    
-자기 한계 속에서도 하나님의 제한 없는 생명의 능력을 신뢰한 지도자를 통해 한 가정에 슬픔이 걷혔으며, 선지자의 발을 움켜쥐고 선지자를 책망하던 여인이 그 발 앞에 엎드려 경배하는 여인으로 변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바를 능히 이루시는 분이시다(17절). 엘리사가 축복한 대로 아이를 잉태한 지 1년 만에 아들을 낳았다. 하나님은 신실하게 그의 말씀하신 것을 이루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약속을 불신하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님이 주신 아이가 갑자기 죽었다(18~20절). 때로 희망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이때는 우리의 믿음이 연단을 받아 더욱 견고해질 기회이다. 수넴 여인의 믿음 역시 이 시험을 거쳐서 더욱 온전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하여도 깊이 알게 될 것이다. 고난은 우리를, 하나님을 더욱 알게 하여 우리의 믿음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어 준다. 고난은 믿음을 연단시킨다.
    
*수넴 여인에게 볼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태도는 “어려움을 만나자 즉시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달려갔다”라는 점이다(21~25절). 그녀는 엘리사의 도움으로 하나님이 아들을 고쳐 주실 것으로 생각했다. 어려움에 직면할 때 실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깊으신 뜻을 포기하지 말고 구해야 할 것이다.
    
*엘리사는 4:13절에서 수넴 여인의 섬김에 왕과 군대장관에게 필요한 것을 말해줄 수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적절하지 못하다. 또, 아이의 죽음을 고하는 여인에게 게하시에게 지팡을 들려주며 그 얼굴에 올려 놓으라고 했다. 그런데 여인의 간청으로 수넴까지 동행한 거다. 지팡이로 충분하다고 교만하게 생각한 것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모든 초점을 맞추어야 함을, 자신은 그저 전달자, 통로에 불과함을 처절하게 깨우쳤을 것이다. 나 역시 엘리사와 비슷한 점이 있지 않을까? 심각하게 고민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엘리사는 다른 사람을 돌보는 자였다(25~30절). 수넴 여인이 찾아오는 것을 보고 그녀에게 문제가 있음을 바로 알아차린다. 상황을 듣고서는 게하시에게 지팡이를 주며 급히 가서 지팡이를 아이 위에 올려놓으라고 했다. 나는 다른 사람의 사정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을 돕기 위해 나의 시간과 물질을 기꺼이 드리는가?
    
*하나님은 엘리사의 기도를 들으시고 수넴 여인의 죽은 아이를 살려 주셨다(32~37절). 엘리사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하여 아이의 생명을 회복시켰다. 이것은 죽은 자의 부활을 선취한 것이며, 미리 맛보게 해 준 것이다. 주님을 믿는 자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해 생명으로 일으키심을 받는다.
    
*이 기적은 엘리야의 사르밧 과부의 아들을 살린(왕상 17장) 이야기와 함께 예수님께서 시작하신 하나님 나라의 생명력을 드러낸 야이로의 딸, 나사로의 부활을 거쳐 예수님의 부활을 예표하는 사건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은 곧 마지막 날에 우리의 부활을 약속하는 증표다. 믿는 자에게 진정한 행복은 부활의 주님과 함께 부활된 존재로 영원히 함께 살게되는 최후의 심판의순간이 아닐까? 그 날 이후 영원한 평안과 안식을 온전히 누리기 때문이다. 그 날에 이르기까지 예표로 보여주신 놀라운 기적의 이야기가 나의 믿음의 걸음도 꿋꿋이 걸어가도록 돕는 은혜로 역사할 줄 믿는다.
 
    
    
*주님, 여인의 절박함의 믿음이 꺼진 생명에 생기가 돌아오게 하는 통로가 되었습니다. 저도 이렇게 영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열정을 주십시오.
*주님, 여인을 상대하는 엘리사의 모습에서 많은 목양의 심정이 드러납니다. 아이의 생명을 포기하지 않고, 위하여 기도하는 예수님의 포기하지 않으시는 사랑을 봅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아이의 부활은 주님의 부활, 주님의 부활은 나의 부활을 약속하는 놀라운 증거임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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