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신뢰한 선왕들과 달리 아하스는 하나님을 떠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그는 종교적으로는 북이스라엘 왕들과 가나안 주민들이 행했던 온갖 우상숭배와 잘못된 예배를 융성하게 하고 아람의 종교를 가져온다. 정치적으로는 앗수르를 의지하여 원조를 청하여, 아람과 북이스라엘의 손아귀에서 벗어났지만, 대신 앗수르의 손아귀에 붙잡히고 만다. 하나님을 불신하고 악행을 일삼는 지도자와 함께 유다도 죄악의 구렁으로 빠져 들어갔다.
이 시기의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앗수르는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 이스라엘 왕 베가를 죽이고, 그를 대신하여 친앗수르 인물인 이스라엘의 마지막 왕인 호세아를 세운다. 이렇게 국운이 거의 기우는 때에 남유다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받아 앗수르의 지배하에 들어가지 않는다. 하지만 요담 이후 왕이 된 아하스부터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면서 유다에도 어려움들이 엄습하기 시작한다.
1. 유다 왕 아하스의 등극(1~4절).
유다 왕 요담의 뒤를 이어 요담의 아들 아하스가 20세에 왕이 되어 16년을 다스린다. 그는 이전 왕들과 그의 조상 다윗과 달리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지 않았다. 3~4절은 구체적으로 아하스의 악행에 대하여 기록했는데, 먼저, 이스라엘 왕들의 길로 행하였다고 고발한다. 이스라엘 왕들의 길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여로보암이 만든 여호와 예배와 이방 제의를 혼합한 길과 아합처럼 이방신을 섬기는 것이다. 아하스는 이 두 가지의 죄를 모두 범했다.
3절에서는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했다(불에 태워 번제로 드리는 제사_겔 20:31) 라고 하는데, 이는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이었다. 신명기 18:10에서는 이런 행위는 하나님께서 본받지 말라고 명령한 가나안 민족의 가증한 행위였다. 이것뿐만 아니라 아하스는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와 같은 이방신을 섬기는 모든 장소에서 제사하고 분향하면서 이방신을 섬기는 데 매우 열정적이었다. 이전의 왕들은 백성들이 산당에서 분향하는 것을 막지 않는 정도였지만, 그는 자신이 매우 적극적으로 이방신을 섬기고 제사를 드린 것이다.
아하스가 이렇게 행한 이유는 당시 앗수르가 매우 강성해져서 이스라엘과 유다를 침입하고 압박했기 때문이다. 아람과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대항하기 위해 동맹을 맺고 유다도 이에 동참하라고 압박하였다. 이런 압박에 시달리며 유다의 정세가 불안해지자 아하스는 여호와든, 이방 종교든 종교적 힘으로 이 위기를 넘기려고 각종 우상들에게 제사를 드리는데 열심을 냈던 것이다.
유다의 위기는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않은 데서 온 것이었기에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 외에는 구원과 회복의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아하스와 당대의 지도자들은 그것을 모른 채 더욱 헛된 열정으로 죄를 지었다.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제사는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미가 6:7~8).
2. 아람과의 전쟁에서 앗수르의 도움을 청한 아하스(5~9절)
앗수르의 세력을 막기 위해 아람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동맹하였고, 이에 함께하지 않은 아하스를 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쳐들어온다. 하지만 예루살렘은 점령하지 못한다. 대신 아람 왕 르신은 엘랏을 회복하고, 그곳에 있던 유다 사람을 쫓아낸다. 역대하 28:5에 따르면 아람 왕은 유다 사람을 사로잡아 다메섹으로 간다. 이렇게 유다가 아람에게 점령당할 위기에 처하자, 아하스는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에게 도움을 청한다. 아하스는 자신은 앗수르 왕의 신하요, 왕의 아들이라고 하며 절대적 복종을 맹세하며 자신을 구원해달라고 요청했다.
당시 상황으로 판단하면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보이지만, 신앙적으로 보면 하나님 백성은 하나님만을 주인으로 섬기며, 그에게 복종하며, 하나님께 도움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아하스는 눈에 안보이는 하나님이 아닌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의지하고 도움을 청했다. 그 대가로 여호와의 전과 왕궁에 있던 금은을 모두 보내야 했다. 개역개정은 이것을 “예물(쇼하드)”로 번역을 했지만, “뇌물”의 의미도 있다. 아하스의 행동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다. 뇌물은 신명기 10:17과 16:19 등에서 금지된 범죄이다. 뇌물로 상황을 변화 시키려는 시도는 결코 옳지 않은 것이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의뢰하는 정정당당한 방법 대신 이방 왕에게 뇌물을 주고 그의 도움을 구하는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일시적으로는 성공적이었다. 앗수르 왕이 그 요청을 듣고 올라와서 아람이 점령한 다메섹을 쳐서 점령하였고, 다메섹에 있던 사람들을 기르로 사로잡아 간다. 이는 아람 왕 르신이 엘랏을 점령하고 유다 사람들을 사로잡아 간 것과 반대로, 이번에는 아람 사람들이 앗수르로 끌려간 것이다. 이때 아람 왕 르신이 죽임을 당한다. 이 전쟁으로 인해 아람은 이제 더 이상 유다의 위협이 되지 못했다.
3. 예루살렘 성전에 새로운 제단을 만든 아하스(10~16절)
앗수르가 다메섹을 점령하자 아하스는 다메섹으로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간다. 전쟁 승리에 대한 축하와 아람을 물리쳐 준 것에 대한 감사의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아하스가 직접 앗수르 왕을 알현하기 위해 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곳에 갔다가 “제단”을 보고 그것의 구조와 양식을 그려서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낸다.
역대하 28:23에서는 이 단을 아람 신들을 위한 제단이라고 하면서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하지만 열왕기에서는 다메섹의 제단에 대한 객관적인 서술만 있을 뿐 제단이 이방신을 위한 것이라는 언급이 없다. 오히려 왕은 다메섹 양식으로 만들어진 제단을 여호와의 성전의 뜰에서 이전의 제단이 있던 곳에 두고 그곳에서 여호와께 제사 드리는 데 사용하라고 명령한다. 15절에서 아하스가 새로운 제단에서 드리는 각종 제사의 종류를 언급하는 것은 새로운 제단을 공식적인 제단으로 삼으라는 의미다. 새 제단에 대하여”커다란”이란 수식어를 붙이는데, 이것은 제단이 이전 제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음을 나타낸다. 그 규모는 12~13절에 따르면 왕이 제단에 올라가서 제사를 지낼 만큼 매우 규모가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다메섹에 있는 제단이 예루살렘 성전에 있던 작고 단순한 놋 제단에 비해 크고 화려했기 때문에, 이 제단이 아하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듯 하다. 특징적인 것인 이 제단을 만들어 설치하는 일은 아하스 혼자 한 것이 아니라 당시 대제사장이었던 우리야와 함께 진행하였다. 그럼에도 저자는 이에 대한 평가를 별도로 내리지 않았다.
4. 아하스가 예루살렘 성전의 구조를 옮김(17~20절)
아하스는 성전 뜰에 있던 물두멍의 구조를 바꾸고 놋바다를 놋으로 만든 소 형상의 받침대에서 내려 돌판 위에 둔다. 이것은 예루살렘 성전 기명들을 재배열 하면서 물두멍과 바다의 놋 지지대를 없앴음을 의미한다. 이동을 순조롭게 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부족한 놋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런 재배치에 대해서도 저자는 어떤 평가도 하지 않는다.
또한 아하스는 앗수르 왕에게 복종하는 의미로 안식일에 사용되었던 별궁과 밖에서 들어가는 별궁을 예루살렘 성전 안에 세운다. 이것이 정확히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다. 현재 아하스는 비록 아람의 위협에서는 벗어났지만, 앗수르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렇게 아하스는 한편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앗수르 왕을 섬기는 이중적인 면을 드러낸다.
그가 죽은 후에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왕위를 잇는다.
나는?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우상에게 자신을 더 의탁했다. 그는 산당의 우상숭배를 묵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신부터 우상숭배에 앞장섰다. 자신의 아들을 인신제사로 바치기까지 했고, 백성은 푸른 나무 아래에서 음행을 저지르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물론 하나님께도 예배하면서 그런 짓을 했다. *탐욕스러운 삶을 용인하는 복음은 진정한 복음일 수 없다. 세속 가치를 복음의 은혜와 열매처럼 치장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각성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에 집중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이렇게 아하스의 죄는 가증하기 짝이 없었지만, 하나님은 아람과 이스라엘 연합군의 공격에서 유다를 보호해주신다. 그럼에도 엘랏은 아람 왕 르신에게 빼앗겼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해석하기 어려운 것은 모든 일이 깔끔한 인과응보의 공식대로 되지 않기 때문이다. 불의가 제때 심판을 당하지 않고 도리어 더 잘되는 일이 세상에 참 많다. 하지만 그것은 들키지 않은 죄가 아니라 아직 집행되지 않고 연기된 심판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군사력을 더 의지하였다. 더 심각한 것은 자기 군사력이 아니라 앗수르의 군사력이었다. 그는 스스로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 왕의 신복이자 아들로 자청할 정도였다. 그 앗수르의 힘으로 아람 세력을 격퇴할 수 있었지만, 아람에게 빼앗길 성전과 왕궁의 값진 것을 앗수르에게 뇌물로 갖다 바쳐야 했다.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것에 대한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되어 있다.
-아하스는 하나님보다 앗수르 왕을 더 의식했다. 그의 관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온통 앗수르 왕이었다는 것이다. 아하스는 하나님이 명령하신 대로 만들고 배치된 성전 기물들을 맘대로 변형하고 재배치하였다. 당연히 초강대국 앗수르의 제단이 기준이었다. 더 많은 제사를 드리도록 성전 공간을 확대하고 큰 제단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은 앗수르 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였다. 본래 있던 놋제단은 개인적인 용도로만 사용하려고 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오로지 자신의 안전과 만족, 필요를 위해서 성전을 드나드는 사람이었다.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기 보다는 성전에서 세속적인 성공을 앙망한 것이다.
-참으로 허탈하기 짝이 없다. 아하스는 하나님에 대하여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유다의 왕으로 어떻게 통치해야 할지를 이해하지 못한 처사가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아하스는 하나님에 대하여 무지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통치하는 것에 무책임하였다. 하나님에 대한 무지와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지도력에 대한 무책임이 그를 하나님과 상관없는 지도자, 더 나아가 하나님을 배역한 지도자로 서게 했다. 선조 왕들이 걸었던 다윗의 길은 무시하고 도리어 이방보다 더 이방스러운 왕이 되고 말았다.
-더구나 앗수르를 의지하므로 이겨도 이기지 못하는 함정에 스스로 빠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여호와만 섬겨야 할 신앙을 크게 훼손하고, 여호와의 말씀대로 지켜야 할 성전 제의를 마음대로 분탕질을 하고 만다. 참담한 사실은 이런 아하스의 난동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한 제사장 우리야이다. 왕의 무지를 막아야 할 그가 그 책임을 회피하고 한통속이 되어 여호와 신앙을 무너뜨렸다.
-선명하게 주의 말씀대로 살아갈 용기가 제사장 우리야에게는 없었다. 그런데 나는 어떨까? 지금 정치 지도자들은 어떨까? 정치적인 이슈 앞에 하나님의 뜻을 담대하게 고수할 수 있을까? 우리의 신앙을 훼손시키려하고, 마음대로 편집하려는 세상의 조직적인 행동들 앞에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따라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신앙을 잘 지켜내고 있는가?
*주님, 그저 분노가 치밉니다. 아하스의 행태에 화가 누그러지지 않습니다. 하물며 주님은 어떠실까요? 그런데 지금 우리의 모습이 별반 다르지 않아서 더 고통스럽습니다. 혼탁한 세상 속에서 그저 꿋꿋이 하나님만 의지하는 걸음 걸어보겠습니다.
*주님, 우리야처럼 세상과 부화뇌동하지 않겠습니다. 말씀대로 살아내어 하나님의 아름다운 이름을 드러내겠습니다. 세상이 하나님을 자기 욕망을 부추기고 이루어주는 존재로 편집하려해도, 우리는 오직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섬기며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