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헤립이 그의 강력한 군대로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하고 랍사게를 히스기야에게 보내 항복만이 살길임을 선포한다. 그는 히스기야와 유다 백성이 의지할 대상은 앗수르 왕이며, 히스기야가 의지하는 여호와는 유다를 앗수르의 손에서 구원할 수 없다고 조롱한다. 히스기야의 군대도 무력하기만 하고, 애굽도 부서진 갈대 지팡이와 같으니 의지할 바 못된다고 소리친다. 어떤 신도 앗수르의 손에서 그 땅을 건져내지 못한 것이 그 증거하고 말한다.
이 사건은 히스기야 제14년(주전 701년)에 앗수르 왕 산헤립의 유다 원정이 배경이다. 산헤립의 실록에 의하면 그는 제3차 원정 때 베니게와 블레셋 및 유다를 침략했다. 이 지역들은 애굽을 정복하기 전에 점령해야 할 곳들이었다. 그는 유다의 46개 성읍을 약탈했고 백성 20만명 이상을 사로잡는다. 또 예루살렘 남서쪽 48km에 위치한 라기스를 기지로 삼고 군대를 보내 예루살렘을 포위한다. 히스기야는 “새장에 갇힌 새”로 비유 되었지만, 실제로는 함락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록의 마지막 부분에는 히스기야가 금 30달란트(약 1톤)와 은 800달란트(약 25톤) 및 인질과 여러 물품을 니느웨로 보냈다고 나온다. 이는 산헤립이 퇴각했지만, 유다는 여전히 앗수르에 종속되었음을 함축한다.
1. 앗수르의 예루살렘 공격(17~18절)
산헤립이 앗수르의 왕정을 정리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갖게 되자, 잠시 느슨해졌던 팔레스타인 정복에 들어간다. 단, 자신이 직접 출정하는 대신 다르단과 랍사리스와 랍사게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라기스부터 예루살렘까지 정복하라고 출정 시킨다. 당시 라기스 성은 강력한 성 중의 하나였고 왕의 요새였다. 이 성은 르호보암이 요새화한 곳으로 유다 산지와 해안 평야 사이의 쉐펠라 기슭에 있으며, 사방으로 깊은 골짜기에 둘러싸인 천연 요새이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요충지였다. 라기스는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주요 관문이었다.
산헤립의 명령을 따라 랍사게의 대군은 견고한 라기스 성을 함락시키고 예루살렘까지 진격한다. 예루살렘 성 근처까지 진격한 이들은 히스기야 왕을 불러낸다. 고대 전쟁의 전쟁은 무력으로 맞붙기 전에 먼저 말로 항복하라고 설득하거나 협박하는 말싸움을 벌인다. 유다는 왕을 대신하여 왕궁 책임자 엘리야김과 서기관 셉나, 사관 요아가 대응하기 위해 나선다.
2. 랍사게의 선동 1 _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19~25절)
랍사게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말을 그대로 전달한다. “너희가 믿는 것이 무엇이냐(19, 20절)”는 질문을 반복하며 유다가 누구를 믿고 반역하느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유다 왕이 싸울 능력이나 계략이 있다는 말은 오직 말뿐이라고 일갈하며 유다의 전쟁능력을 폄훼한다.
더 나아가 그런 유다가 의지한다고 생각하는 대상들을 21절부터 신랄하게 비판한다. 앗수르 왕은 유다가 애굽과 동맹을 맺고 앗수르에게 반란을 일으켰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물론 히스기야가 애굽과의 동맹을 시도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사야 선지자의 비난으로 이 동맹은 성공하지 못했다. 랍사게는 애굽을 부러진(상한) 갈대 지팡이로 비유하며 애굽은 동맹국을 도울 힘이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동맹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라고 조롱한다. 당시 애굽은 이전의 힘을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이지만, 앗수르에 맞설 상태는 안됐다.
또, 랍사게는 22절에서 유다의 믿음의 근간이 되는 여호와 신앙도 히스기야 때문에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고 선동하는데, 이는 히스기야가 산당과 제단들을 제거하고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예배하라고 한 것이 여호와의 분노를 일으켜 정작 여호와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다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랍사게의 이런 발언은 여호와 신앙을 잘 알지 못했거나 설혹 알았더라도 그동안 히스기야의 종교개혁에 불만이 있거나 불안한 마음을 가진 백성들에게 히스기야에 대한 불신을 만들어 내기 위한 것이었다.
또, 내기를 하자면서 말을 타고 싸울 수 있는 병사 이천 명을 세울 수 있다면 자기가 기꺼이 말 이천 마리를 주겠다고 한다. 이는 유다는 말을 탈 병사 이천 명도 없는 주제에 무슨 전쟁을 하겠다고 버티느냐고 조롱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전쟁은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이스라엘의 신학을 이용해 놀린다. 자신이 이곳에 전쟁을 하러 온 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며 자신은 유다를 멸망시키라는 신탁을 받았다고 허풍을 친다.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들이 여호와의 명을 받고 유다를 치러 왔다는 것이다. 이와같은 랍사게의 말은 매우 교묘하고 간교하다. 이스라엘의 신학을 비틀어 자신의 공격을 합리화하는 데 사용한 것이다. 여호와의 뜻을 바로 알지 못하면 속아 넘어갈 만큼 랍사게는 탁월한 언변을 가지고 있었다.
3. 유다 관리들과 랍사게의 협상(26~27절)
랍사게의 교묘하고 탁월한 언변에 당황한 히스기야의 신하들은 랍사게에게 아람 말로 말해달라고 요청한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었으니 백성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히브리 말이 아닌 아람어로 말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랍사게의 선동을 듣고 백성이 히스기야 왕에 대한 불신이 생겨 불만이 커질 것을 두려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랍사게는 당시 국제 통용어인 아람어 사용 요청을 무시한다. 왜냐하면 성에 있는 군인이나 백성이 자신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 줄 알아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포위된 예루살렘은 앗수르의 철통같은 포위로 식량이 떨어져 극심한 기아에 시달리게 될 것을 백성도 알아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모든 책임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히스기야에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4. 랍사게의 선동 2 _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28~35절)
랍사게는 신하들의 요청을 무시하고 더 크게 유다 말로 위대한 앗수르 왕의 말을 들으라고 외친다. 그리고 히스기야의 말에 속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 이유는 히스기야가 너희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믿으라고 해도 듣지 말라고 경고한다. 여호와가 앗수르 왕의 손에서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라고 말해도 듣지 말라고 반복적으로 경고한다. 대신 앗수르 왕의 말을 들으라고 권고한다.
31절은 랍사게가 앗수르 왕의 말을 그대로 전달한다. 만일 항복하면 너희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각기 우물물을 마실 것이라고 한다. 이는 함락 후 볼모로 끌려가고 성읍과 포도원이 완전히 파괴되는 것과 반대의 모습이다. 또한 더 좋은 곳으로,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이 가득한 지역으로 인도하겠다고 약속한다. 이는 신명기 8:7~8에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나안 땅을 주겠다고 약속하실 때 하신 말씀을 랍사게가 인용하면서 여호와께서 주신 땅보다 더 좋은 땅으로 앗수르 왕이 인도해줄 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랍사게는 앗수르 왕을 믿으라고 말하면서 반복적으로 여호와와 히스기야를 믿지 말라고 강조한다.
33~35절은 앗수르 왕의 손에서 자신의 땅을 구한 신이 없다는 사실을 실제 예를 들어 가면서 반복적으로 말한다. 이것은 랍사게가 직접적으로 여호와를 공격하는 것이다. 여호와가 앗수르 왕보다 무능하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이 말은 경험적으로 보면 매우 설득력이 있다. 유다보다 강한 나라들도 모두 멸망당했고 특히 같은 여호와를 믿는 이스라엘(사마리아)도 앗수르에게 멸망당한 상황 속에서 여호와께서 유다를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신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랍사게는 매우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예루살렘의 항복을 강요한 것이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여호와를 믿는다는 것은 이런 논리와 통계와 합리적인 것을 넘는 일이다. 나라가 흥하고 멸망하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고, 전쟁의 승패가 여호와의 손에 있으며, 사람의 살고 죽는 것이 여호와의 손에 있다는 것을 믿으면서 여호와를 의지하면, 주께서는 결코 그런 믿음의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며, 이 모든 상황을 뛰어넘으실 것이다.
5. 유다 백성의 반응(36~37절)
유다 백성은 랍사게의 말에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왕을 신뢰하고 그 명령을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랍사게의 이간질은 실패했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심각했기에 신하들은 옷을 찢고 히스기야에게 이 모든 것을 알린다.
나는?
-랍사게는 하나님을 조롱하고 있다. 히스기야 왕의 전의를 꺾기 위해 그가 의뢰하는 대상이 얼마나 미덥지 못한지를 지적한다. 싸울 계교와 용력이 있다는 말도 입에 붙은 말뿐이라고 폄훼한다. 앗수르를 등지고 선택한 애굽은 움켜쥔 손을 찌르는 상한 갈대 지팡이일 뿐이요, 지방에서 산당이 제거되고 예루살렘에서만 예배를 받는 여호와는 믿을 게 못된다고 외친다.
-랍사게의 조롱은 오늘날 세상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대하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세상은 교회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분석하고 평가하지만, 실상 하나님의 백성이 왜 하나님을 의뢰하는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털끝 만큼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조롱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말에 일일이 대꾸하기보다 내 마음을 찢으면서 정말 내가 하나님을 알고 신뢰하는지를 점검하면 되는 것이다.
-랍사게는 부실한 군사력과 전투력, 그리고 허약한 애굽과의 동맹관계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모두 이치에 맞는 말이다. 말 이천 마리를 주어도 탈 장수가 없고, 앗수르의 갑옷 하나 건들지 못할 만큼 유다는 허약하다. 애굽도 얼마나, 그리고 언제까지 이스라엘의 우방이 되어줄지 장담할 수도 없다. 그야말로 첩첩산중이고, 막막하기 그지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나님 나라 공동체가 세상에 늘 항복해야 하는 거은 아니다. 그런 조건들만 가지고 승패가 갈리는 전쟁이라면 이스라엘(유다)는 처음부터 존재할 수 없었다. 오늘날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인 교회도 마찬가지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같이 낙오자가 되어야 마땅하다. 이런 연약함이 엄연한 현실이지만, 늘 굴복해야 하는 현실도 아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하나님 나라 백성과 함께 하신다. 세상이 보기에 유약하고 변변치 않게 보일지라도 그들과 함께 계신 여호와는 크고 강대한 분이시다. 창조조 하나님이시다.
-랍사게의 청산유수와 같은 말에 자칫 현혹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하나님의 뜻조차 자신의 현란한 말솜씨로 포장하는 것에 능숙하다. 앗수르가 유다를 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당당하게 외친다. 그런데 이방 나라가 심판의 도구로 사용될 때도 있었으니 그 말이 맞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성도가 직면하는 고난은 언제나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없다.
-랍사게는 유다 말로 백성이 알아듣게 말하여 계층간의 불화를 조장하고 저항 의지를 꺾으려 했다. 만약 항복하면 좋은 땅과 안전과 생명을 선물할 것이라고 회유한다. 한편으로 앗수르의 손에서 살아남은 나라가 없었던 역사를 상기시키면서 여호와를 의뢰하라는 히스기야의 말에 속지 말라고 위협한다.
-여호와와 하나님과 우상을 구분할 줄 모르는 다신론자의 어리석은 궤변일 뿐이었다. 진리에 바로 서서 세상의 조롱을 일축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앗수르는 자신의 힘을 자랑하며 자신의 계획이 곧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교만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의 삶 속에서도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면서 각자가 처해 있는 상황을 합리화하지 않는가?
-랍사게는 유다의 말로 하나님과 히스기야를 모욕하고 조롱하는 말을 쏟아낸다. 사탄은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낙담하게 하여 하나님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감언이설과 같은 그럴듯한 사탄의 소리가 들려올 때 단호히 하나님을 바라보며 귀를 막고 일축해야 한다.
-여호와를 모욕하는 랍사게의 긴 조롱에 백성은 한 마디도 대꾸하지 않았고, 유다의 대신들은 옷을 찢으며 왕에게 나아갔다. 세상의 거친 조롱에 직면하고 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그저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가장 굳건하고 올바르게 살아내는 길이다. 사탄의 유혹에 부화뇌동하면 안 된다.
*주님, 랍사게의 혀가 간사합니다. 이렇듯 세상은 오늘날의 랍사게와 같은 인물들의 혀를 통해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뒤흔듭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비하여 더욱 단단하게 직면하며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