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영광이 떠난 시온(예루살렘)에서 부르는 슬픈 노래 [애 1:1-11]
 – 2024년 10월 17일
– 2024년 10월 17일 –
애가는 모두 다섯 개의 노래로 구성 되어있다. 1장, 2장, 4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순서를 따라 지은 시로 히브리어 알파벳 개수를 따라 각각 22절로 구성되어 있다. 재난의 의미를 곱씹어 깊이 생각하도록 이끌어 주는 시이다. 1장은 예루살렘 성의 멸망을 슬퍼하는 탄식으로, 예루살렘의 현재 상황에 대한 탄식과 여호와를 향한 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파괴된 도시 시온(예루살렘)은 능욕당하고 버림받은 여성의 이미지로 의인화하였다. 황폐한 도시 시온은 죽음과 고통으로 암울하게 얼룩져 있다. 성전이 있는 도시지만, 그 도시로 향하는 길은 텅 비어있다. 적막하기만 한 도시는 고립되어 도와줄 사람 하나 없이 비웃음거리가 되었다. 시인은 지난날의 영광이 사라진 도시의 죽음을 탄식하며 하나님께 호소한다.
 
애가 1장은 주전 586년 바벨론의 침략으로 예루살렘이 바벨론에게 멸망하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이 파괴된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시는 생생하게 예루살렘이 멸망한 직후에 성과 성전이 무너진 상태를 바라보면서 작성한 애가다. “시온”은 본래 예루살렘 남동쪽 언덕에 있던 산성의 이름이다. 다윗이 여기를 점령한 뒤에는 다윗성이라고 불렸다. 나중에는 예루살렘 전체를 가리키는(사 10:24; 33:20) 말로 쓰이게 되었다. 특히 시온 산은 성전이 있는 언덕을 가리키는(사 8:18; 18:7) 말이 되었다. 애가에서는 시온을 유다 백성 전체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사용하였다(사 51:16; 슥 2:7).
 
 
 
1. 포로가 된 성(1~3절)
애가는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황폐하게 된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아무런 희망이 없고 시온이 사람들의 조롱거리가 되고 말았다. 적들은 승승장구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인은 여호와께서 시온을 돌봐주시기를 간구한다. 1절은 “슬프다”로 시작한다. 1절의 첫 소절을 직역하면, “슬프다. 어찌하여 이 도시가 적막하게 앉아 있는가?”이다. 전에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이제는 적막하기만 하다. 하반절에서는 사람들의 많았던 것과 적막한 상황을 과부와 공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4절 하반절에서는 열국중에서 큰 자와 과부를 비교한다. 이로써 힘 있음과 없음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많은 백성을 가지고 힘을 과시하던 모습과 자녀도 없고 받은 유산도 없는 과부의 모습이 극단적으로 비교된다.
 
또한 공주와 노예의 비교는 신분적인 비교로, 가장 고귀한 신분이 이제는 노예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노예가 되었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바벨론의 속국이 되었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전의 비참한 상태로 되돌아갔다는 뜻이다. 2절에서는 이런 상황으로 인해 밤새도록 통곡하며 계속 울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더 큰 비극은 이 성을 위로할 자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이다. 그녀를 사랑하던 자들(예루살렘과 동맹을 맺은 나라와 성읍들) 중에 위로할 자가 없고 그녀의 친구들도 모두 다 배반하여 그녀에게 원수가 되었다. 예루살렘이 성이 파괴되는 순간 아무도 돕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오히려 적과 결탁하여 이 성을 치는데 거들기까지 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대신 인간의 동맹을 의지하던 성읍이 이제는 철저히 배신을 당하게 된 것이다.
 
3절은 성의 텅 빈 상황과는 다르게 성에 있던 유다 사람들이 다른 곳에 거주하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본 절에서 ‘유다’는 땅이 아니라 유다 사람들을 뜻한다. 유다 사람들이 바벨론으로 끌려가 그곳에서 쉴 곳을 얻지 못하고 고달프게 살아가는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유배와 노예의 삶을 피하려고 도망했지만, 모든 추적자가 그들을 붙잡아간 상황을 말한다. 즉, 유다 사람들은 도망갈 곳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을 뜻한다.
 
 
 
2. 딸 시온의 상황(4~6절)
4절에서 성의 이름이 시온으로 등장하며 시온의 길들을 애곡한다. 그 이유는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오는 사람들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1년에 세 차례, 곧 유월절과 맥추절, 초막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와서 예배드리는 관습이 있어서 시온으로 향하는 도로는 절기 때마다 순례자들로 가득했었다. 그런데 이제는 순례를 오는 사람들이 없기 길들이 슬퍼한다. 그리고 사람들이 오지 않기에 성문들도 황폐하게 되었다. 부서지고 망가졌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다니지 않아 쓸쓸하고 조용하게 되었다는 의미다.
 
제사장들이 한숨을 쉰다는 것은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이 없기에 제사장들이 할 일이 없다는 것을 가리킨다. 처녀들은 일반적으로 종교 예식이 진행되는 동안 기뻐하고 춤을 추며 기쁨을 표현하는 역할을 하였지만, 이제는 더 이상 축제도 제사도 없기에 이런 기쁨을 표현할 기회도 없고 오직 근심만 남게 되었다. 시온은 “곤고(마르)”하다. ‘곤고하다’로 번역된 단어의 뜻은 “쓰다”이다. 이 단어는 나오미가 모압에서 남편과 아들들을 잃고 돌아온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한 단어이다. 현재 시온은 과부 나오미처럼 아무런 희망도 없는 상황이라는 뜻이다.
 
5절은 이스라엘의 희망 없음과 대조적으로 원수들의 승승장구를 묘사한다. 이렇게 된 이유는 시온이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시온의 죄는 오랫동안의 불순종과 반역을 가리킨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적들과 반대로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로 전락하게 되었고 자녀들은 노예로 끌려가게 되었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시온이 왜 이런 재앙을 만나게 되었는지 고백한다. 여호와의 딸이었던 시온에서 하나님의 모든 영광이 떠났다. 지도자들은 원수와 제대로 싸울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사냥꾼 앞의 사슴처럼 자기 혼자 살고자 도망갔다.
 
여호와께서 시온을 떠나시니 그곳을 지킬 자가 아무도 없게 되었다.
 
 
 
3. 조소 거리가 된 예루살렘과 여호와께 대한 탄원(7~11절).
7절에서 시인은 시온을 예루살렘으로 바꿔 부른다. 시인은 예루살렘이 재앙을 당하는 동안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다고 고백한다. 이는 재앙을 당하고 나서야 하나님이 주셨던 보호와 풍요와 즐거움을 깨닫게 되었고 비로소 여호와를 기억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다.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되었고 조소 거리와 비방거리가 되고 업신여김을 받게 되었다.
 
9절에서 더러운 것이 옷깃에 묻어 있으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은 더러운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렇게 철저하게 하나님을 무시한 결과 이들을 위로할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되었다. 여호와만이 이스라엘의 위로자이신데 여호와께 버림을 받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들의 위로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계속해서 9절 후반절은 화자가 일인칭으로 바뀌며 여호와께 탄원한다. 원수가 너무나도 강력해졌기 때문에 화자는 여호와께 이 환란을 봐달라고 요청한다. 화자는 여호와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10절은 적들이 함부로 여호와의 성소를 침범하고 여호와의 성물을 빼앗아 가는 것에 대한 고발이다. 그리고 11절은 실제적인 고난에 대한 호소로 모든 것을 팔아 양식을 구해야만 하는 굶주림의 상황을 호소한다. 시인은 다시 한번 여호와께 돌봐달라고 요청하면서 자신의 무가치함과 무기력함과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음을 고백한다.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만을 구하는 가장 절박한 탄원과 기도를 드린 것이다.
 
 
 
나는?
-영화가 사라진 도시의 처절한 애곡. 시인은 옛적에 누렸던 존귀와 영화가 사라진 하나님의 도성 예루살렘을 보면서 밤새도록 애곡하고 울며 탄식한다. 사람들로 북적이며 생기 가득하던 도시가 정적만 감도는 폐허의 도시가 되었고 부러움과 조공의 대상이던 곳이 수치와 배반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자신을 위로해 줄 친구 하나 곁에 두지 못한 채 버려져 있었다. 하나님을 떠나는 것은 미래를 버리는 일이요 스스로 고립을 자처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도시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님이 떠난 도시에는 적막만이 남아있다. 하나님을 떠난 유다가 쉴 곳과 피할 곳은 없었다. 저항해 보았지만 비참하게 무너진 후 사로잡혀 갔다. 바벨론의 칼날을 피하여 흩어졌지만, 그들을 안전하게 받아줄 곳은 없었다. 어디든지 그들을 사로잡으려는 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유다를 버리시자, 순례자들의 행렬도 끊기고 제사도 중단되고 절기를 달구었던 여인들의 즐거운 춤과 노래도 사라졌다.
 
-무기력한 어린 자녀들에서부터 무책임하게 탈출을 시도하던 지도자들까지 모두 속절없이 먼 나라로 붙들려가니 그 번잡하던 성문 앞에는 침묵만 흘렀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예배의 특권이 권태로운 일상으로 전락하고 탐욕스러운 충동에 나의 마음을 내어줄 때, 손가락 사이로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하나님의 축복은 떠나가고 말 것이다.
 
-이런 참담한 예루살렘 성의 상황을 바라보며 시인은 자기 죄를 인정한다. 언약하신 대로(신 28:13~14) 말씀을 지켜 치우치지 않았을 때는 열국의 머리가 되게 하셨지만(1절), “크게” 죄를 범하자, 대적이 머리가 되게 하시고 자기 백성은 놀랄 만큼 낮추신다. 선지자는 예루살렘의 멸망과 성전의 수치가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줄 모르고 더럽고 불결한 삶에 몰두하였던 하나님 백성들의 죄 때문임을 인정한다.
 
-동시에 이방인들에 의해 하나님의 명예가 땅에 떨어진 현실도 함께 고발한다. 회개하는 자기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을 모욕하는 자들을 향한 그의 공의만이 살길임을 안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 공의로움을 신뢰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있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선지자는 폐허로 바뀐 예루살렘에서 과거의 영화를 떠올리며 슬퍼한다. 그러나 슬픔에 머물러 있는 것만은 아니다. 비록 유다가 범죄로 인해 위로받을 곳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중보자로서 그들을 감찰하시고 권고하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크고 많은 죄를 범한 자기 백성을 고통스럽게(곤고케) 하셨다. 말씀을 지켜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면 머리가 되게 하겠다고 하셨으나, 선지자를 통해서 거듭 경고했음에도 듣지 않자 그들의 원수가 머리가 되게 하고, 그들의 자녀들부터 지도자들까지 사로잡혀 가게 하신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이 계신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은 절대 점령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거짓된 신학을 믿었으나, 하나님은 그곳을, 환난을 겪고, 제사가 끊기고, 성소가 유린되고, 성전 기물이 탈취당하게 하셨다. 자기 백성이 죄 가운데서 돌이키지 않자 단호하게 심판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내게 무엇을 요구하시는 것 같은가?
 
*참 위로자이신 하나님을 배반한 결과는 사람들로 북적이던 거리에 고요만이 가득하고 열국이 우러러보던 나라가 남편(하나님)과 자식(백성)을 잃어 미래가 없어진 과부로 전락했다. 그들의 눈물을 멈추게 하고 위로해 줄 애인도 없고, 친구들(동맹국)도 배반한 것이다.
 
*하나님 없는 정치적 안정이나 종교적인 번영은 사상누각이다. 예루살렘처럼 단 한 순간에 슬픔으로 변할 것이다. 하나님을 놓치면 안 된다.
 
*자기 죄를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고 그 결국을 생각하지 않았던 유다 백성은 성전이 유린당하는 영적인 곤경과 양식이 떨어지는 육적인 빈곤을 당한다. 그런 와중에 선지자는 환난 중에도 그들의 중보자가 되어 하나님의 긍휼을 호소한다. 죄 가운데 있는 이들과 교회를 바라보는 나의 심정은 선지자의 심정과 동일할까?
 
 
*”전에는 … 이제는”의 차이가 분명하다(1~3절). 많은 사람들 … 적막하게, 크던 자 … 과부같이, 열방 가운데 공주같던 … 강제 노동하는 자(1절), 친구들 … 원수(2절), 고통과 고된 노역과 쉴 곳 없는 처지가 되었다(3절). 모든 것을 잃고서야 지금까지 누렸던 것의 소중함이 깨달아 진 것이다. 얼마나 어리석은가? 그런데 이런 어리석음이 지금 나에게도 반복되고 있지 않는가? 죄는 하나님께서 누리도록 베풀어 주셨던 것을 빼앗아 간다.
 
*빼앗긴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곤고(마라르, 쓰다 쓰라리다)가 덮쳤다. 죄가 많으므로 쓰라린 고통을 내리신 것이다(4~5절). 어린 자녀가 붙잡혀 갔다는 것은 미래가 사라졌다는 의미다. 죄에 미래가 강탈당했다. 죄와 함께하는 삶의 대가는 분명하다. “쓰라림”이다. 미래가 사로잡혀 가버린다. 이런 삶을 초래하는 죄와 계속 벗할 것인가?
 
*결국 죄와 함께 거니는 인생은 그를 돕는 자가 없다(7절). 그를 업신여긴다(멸시한다_8절). 그런 그를 위로한 자 아무도 없다(9절). 그런데 이런 자라도 여호와께 울부짖는다. 비참한 지경에 떨어진 자신을 돌보아 달라고 간청한다(9절 하반절-11절). 특히 “감찰하다(9절 하반절_라아)”와 “돌보시옵소서(11절_나바트)”의 기본 의미는 “보다, 바라보다”이다. 하나님께 그저 바라만 달라고 간절히 구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을 바라봐 달라는 자녀의 간청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주님, 참담한 노래에 마음이 무너집니다. 예루살렘만의 이야기가 아니기에 더욱 그런듯합니다.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주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인생이 이렇게 처참합니다. 그렇기에 그저 하나님만 바라보며 살아가겠습니다.

Leave a Comment

매일성경 묵상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 [시편 112:1-10]

 111편과 쌍을 이루는 지혜 시편이다. 동시에 할렐루야 시편 모음집의 두 번째 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묘사하는데 이 사람이 지닌 신앙적 성품은 111편이

자세히 보기 »
매일성경 묵상

다윗이 바라본 메시아 [시편 110:1-7]

 본 시편은 150개의 시편 중에서 신약성경과 가장 밀접한 관련이 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자기 변증에 1절이 사용되고(마 22:44; 막 12:36; 눅 20:43), 히브리서 5:6절은 4절을 인용한다.

자세히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