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그토록 영화로웠던 예루살렘이 …. [애 4:1-10]
 – 2024년 10월 25일
– 2024년 10월 25일 –
본문의 상황은 처참하기만 하다. 기근과 기아에 시달리는 시온의 백성들에 대하여 자세하게 언급한다. 특히 선택받은 자들처럼 호화롭게 살던 지도자들조차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막대기처럼 말라버렸다. 칼에 죽는 것이 차리리 굶어 죽는 것보다 낫다고 말하는 참혹한 현실과 어머니들의 최소한의 인간성과 모성애마저 사라져 버린 참상 속에서 예레미야는 비통함을 감추지 않는다.
 
4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시온의 참상에 대한 개인적인 탄식(1~10절), 지도츠의 책임과 참상에 대한 탄식(11~16절), 공동체의 탄식(17~20절)이다. 그리고 에돔과 시온에게 건네는 예레미야의 말(21~22절)이다. 본문에서는 주로 시온의 굶주림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금처럼 빛나던 시온에서 갓난아기는 젖을 먹지 못하고 아이들은 먹을 것을 찾으며 부유한 자들도 가장 비참한 상태가 된다. 그들은 모두 비쩍 마른 상태가 되고 심지어 자기 자식까지 잡아먹게 되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진다.
 
 
 
1. 성전의 돌처럼 흩어진 아이들(1~2절)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다(1절)는 모두 현재 예루살렘의 상황을 가리킨다.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 황금처럼 빛나던 옛 영화가 사라지고 돌만 굴러다니는 폐허가 된 예루살렘을 묘사한 것이다. 둘째, 황금과 성소의 돌들이란 표현에서 특별히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묘사한 것이다. 솔로몬이 성전을 건추갛ㄹ 때 성소와 지성소의 벽과 바닥은 금으로 입혔다. 그곳에서 사용하는 모든 기물들도 금으로 만들어졌었다. 하지만 예루살렘을 점령한 바벨론이 성전의 모든 금과 기명을 가져갔다(렘 52:19). 예레미야는 금처럼 빛나던 성전을 비롯한 예루살렘의 모든 것이 퇴색되고 파괴되었다며 현재의 상황을 탄식한다.
 
2절은 시온의 아들들에 대한 설명이다. 먼저 시온의 아들들이 금보다 보배롭다고 소개한다. 그런데 그들이 어쩌다가 토기장이의 토기처럼 여겨지게 되었다며 한탄한다. 여기서 토기는 금과 대조를 이룬다. 토기는 금처럼 귀하게 다루지 않는다. 일상에서 토기는 막 다루어지고 그만큼 쉽게 깨지는 그릇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보물같은 백성들이 이렇게 함부로 다루어 지는 것에 대해 매우 비통해한다.
 
 
 
2. 굶주림에 허덕이는 아이들(3~5절)
두 가지의 비유를 통해 예루살렘의 아이들의 비참한 상황이 묘사된다. 3절에서는 들개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다. “들개(탄님)”로 번역된 단어는 짝을 이루거나 떼를 지어 다니면서 시체를 뜯어먹는 들짐승이다. 개나 자칼의 일종으로 여겨진다. 구약에서 ‘탄님’은 보통 하나님의 심판으로 황폐해진 성읍에 사는 동물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백성이 보기에도 부정하고 야비한 동물이다. 하지만 그런 동물이라도 가슴에 끌어다가 자신의 새끼에게 젖을 준다. 하지만 ‘딸 나의 백성’은 광야에 있는 잔인한 타조와 같다. 타조는 모래에 알을 낳고 둥지에 내버려둔 채 사냥하러 나가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새끼를 잘 돌보지 않는 짐승으로 여긴다. 즉, 딸 시온(예루살렘)이 자신들이 경멸하던 들개보다 못한 상황이라고 말하면서 시인은 시온의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4절은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었다고 한다. 젖을 먹지 못해 목말라 하는 모습인 것이다. 어머니가 물도 젖도 주지 못하는 상황을 표현한 것으로 봐도 무방하다. 하반절은 어린아이들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 다니는 모습이다. 아이들이 양식을 구하나 나누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부모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한다. 젖 한 모금, 떡 한 조각 줄 수 없는 전적으로 무능한 어미로서의 시온의 모습을 보여준다.
 
5절은 어른들이 당하는 고통을 묘사한다. 진수성찬을 먹던 사람들이 거리에서 외롭게 되었다. 사람들과 흥겹게 잔치를 즐기던 사람들이 이제 먹을 것도 없이 쓸쓸하게 길거리에 앉아 있다. 자색옷(귀족과 왕족들)을 입은 사람들이 이제 거름더미를 안았다. 즉 쓰레기 더미에서 살게 되었다. 예전의 영화는 사라진 지 오래다.
 
 
 
3. 소돔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예루살렘과 현재 지도자들의 상황(6~10절)
6절에서 예레미야는 딸 내 백성, 즉 시온의 죄가 소돔보다 크다는 놀아운 말을 한다. 예레미야는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않았지만 순식간에 무너졌다고 말한다(창 19장). 즉 하나님의 심판으로 무너졌다는 것이다. 구약은 소돔을 가장 악한 도시의 상징으로 이야기해왔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보다 무겁다고 말한다. 에스겔의 선포와도 비슷하다(겔 5:6; 16:46~47). 이렇게 소돔보다 시온의 죄가 무겁다고 보는 이유는 소돔은 순식간에 무너져 고통의 시간이 짧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시온은 천천히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소돔과 자신들의 죄를 소돔과 연결시키는 것은 시인의 괴로움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었다.
 
7~10절은 다시 시온의 참상을 고백하는 부분이다. 젖먹이, 아이들, 부유한 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이야기하던 예레미야는 이제 귀족들과 지도자들의 비참한 모습을 노래한다. 7절에서는 이스라엘을 나실인으로 언급하고 이들을 눈보다 빛났고 우유보다 밝고 잘 깍인 사파이오보다 붉다고 노래한다. ㅇ/ㅔ레미야는 자신이 아는 순결하고 아름답고 귀한 모든 것을 들어서 선택받은 나실인, 즉 이스라엘 백성의 아름다움에 대해 강조한다.
 
8절에서는 눈처럼 희던 시온이 이 칠흑같은 어둠이 되었다고 노래한다. 얼굴과 몸 상태는 마른 나무같이 말랐다. 귀하던 모습은 사라지고 기근으로 인해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수척해진 것이다. 9절에서는 기근이 얼마나 심한지 전쟁에서 칼에 찔려 죽은 자가 낫다고 말한다. 토지의 소산이 끊겪다는 것도 신명기 28:47~51의 저주가 온전하게 성취된 상황을 노래한 것이다.예레미야는 시온이 멸망할 때 자비로운 여자들일지라도 자신들의 아기를 삶아 먹는다고 탄식한다. 살아남기 위해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사랑인 자식에 대한 사랑마저 버린 무서운 상황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림으로 상황이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예레미야의 말을 통해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지만 동시에 두려운 분리아는 것을 알 수 있다.
 
예루살렘의 비참한 멸망의 역사는 하나님의 자비만을 기억해서는 안될 것을, 그렇기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자만하지 않도록 경고한다.
 
 
 
나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인간의 존귀함이 바람에 날리듯 날아가 버렸다. 하나님께서 얼굴을 돌리시자 보배로운 정금 같던 시온의 아들들이 빛을 잃고 토기장이의 천한 질그릇이 되고 말았다. 거룩한 성소의 돌과 같았던 예루살렘 백성들이 길거리에 굶주려 쓰러졌다. 하나님의 보배로운 자녀의 신분이 아닌 다른 그 무엇도 나와 우리 자녀들에게 참다운 존귀함을 안겨줄 수 없다.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륜도 함께 무너졌다. 예루살렘이 무너지고 성전이 유린될 때 어미들은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들개만도 못한 처지가 되어 광야의 타조처럼 자식을 방치할 뿐 아니라, 삶아서 약식으로 삼기까지 했다. 생명을 얻는 신앙을 전수하지 못한다면, 세상이 우러르는 그 무엇을 자녀에게 안겨준다고 한들 헛되다. 하나님을 거절하고 알지 못한 인생은 반드시 심판에 직면할 때가 오기 때문이다.
 
-기근과 굶주림을 낳은 불순종이었다. 전쟁 후 기근이 찾아오자 기름진 음식을 먹고 값진 옷으로 장식하던 사람들이 자식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고,어린아이에게 떡을 나누지 못할 만큼 인색해졌다. 젖먹이는 목말라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소리 없이 죽어갔다. 갈수록 성경과 복음과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칠 기회조차 허락하지 않는 지금이 사실상 영적인 기근이 아니겠나! 혹시 지금 우리의 아이들은 말씀의 젖 한 방울조차 먹지 못해 혀가 입천장에 붙어 있지는 않는가?
 
-전쟁과 죽음을 불러온 불순종을 잊으면 안된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고 하나님의 불로 순식간에 무너진 소돔이 차라리 나았다. 예루살렘은 “칼에 죽는 자가 주려 죽는 자보다 낫다(9절)”고 말할 만큼 원수들이 침입하여 약탈하고 살육하고 왕은 눈알이 뽑힌 채 끌려갔다. 처자식이 죽는 것을 보아야 했고 양식이 없어 자식을 삶아 먹어야 했다. 소돔보다 예루살렘이 더 악했기 때문이다.
 
-전쟁과 기근에 흉측하게 말라버린 예루살렘 사람들의 몰골에서윤기 나고 말끔했던 과거를 떠올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복음의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아 서서히 영적으로 죽어가는 물질주의 시대는 이미 심판 중인지도 모른다.
 
*이사야는 시온의 아들들이 보배로운 정금에 비할 수 없다고 했다(사 62:3). 그런 그들이 토기장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깨뜨릴 수 있는 천한 질그릇 같이 되어 버렸다. 금, 정, 성소의 돌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리킨다(슥 9:16). 세상의 그 어떤 직위나 신분도 하나님 나라 시민권보다 더 귀하지 않다.
 
*심판 받은 예루살렘의 어머니들은 최소한의 모성애마저 잃어버렸다.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광야의 타조처럼 자식을 방치하고 심지어 삶아먹기까지 했다. 오늘날 부도덕하게 임신한 후 자식을 버리고 낙태하는 세태와 다를 바 없다. 심판은 그들 마음속에 이미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외적인 화려함보다 하나님 없는 삶의 비참한 실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자녀들에게 특별한 분유, 여러 교육을 시키려고 하면서 영적인 양식을 먹지 못해 입이 천장에 붙도록 방치하지 않는가?
 
*예루살렘 죄는 순식간에 무너진 소돔보다 더 심각했다. 그래서 일찍 죽은 자가 굶으면서 서서히 주려 죽은 자보다 더 낫다고 한 것이다. 금방 죽을것 같니 않다고 하여 다시 세상을 향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지는 않는가?
 
*아름답고 윤택한 삶은 사라지고 막대기 같이 말라 비틀어진 몰골이 되어 알아보는 사람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을 외면한 자는 모두 세속적인 것에 중독된 환자들과 같다. 나의 영적인 모습은 어떠한가?
 
 
 
*주님, 하나님만 섬기고 의지할 때 그 영화로움을 주체할 수 없었지만. 하나님을 떠나 불순종한 그들에게 말라 비틀어진 초라함만 남았습니다. 아이들은 거리에 버려지고 부모들은 아이들을 잡아먹을 정도로 무정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늘 하나님을 붙잡으므로 인생의 비극을 자초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비록 가난하여 초라할 지언정 주님의 거룩하고 의로운 백성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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