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레미야는 이렇게 예루살렘에 휘몰아친 여호와의 맹렬한 진노의 원인이 예언자들과 제사장들, 곧 종교 지도자들의 악행 때문임을 밝힌다. 그러면서 간절하게 여호와께 다시 탄원한다.
1. 시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11~12절)
11절에서 다시 시온에 임한 재앙이 하나님의 진노에 따른 심판이라고 고백한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심판의 완성으로 해석한다. 하나님이 소돔을 심판하신 것처럼 시온에 불을 지르시고 그의 기본 토대를 삼켜 버리셨다. 즉, 하나님이 시온을 완전히 파괴하셨다. 실제로는 바벨론이 불을 지르고 파괴하였으나 예레미야는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한다. 이 사건은 12절의 표현을 통해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라고 강조한다.
예루살렘 성읍이나 성문은 예루살렘 거민들이 지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방패이고 도움이시고 전사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절대 침입할 수 없다. 이것이 예레미야의 신앙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계속해서 하신 말씀이다. 이와 같은 예레미야의 신앙은 오늘 우리에게 많은 도전을 준다. 세상 풍조와 타 종교가 공격하고 불신자들이 공격하여 교회가 약화하고 망할 것이라는 헛된 소리가 흥왕한다. 하지만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곳이다. 그렇기에 성도들이 신앙을 지키며 말씀대로만 살아간다면 교회는 하나님이 지키신다. 교회를 지키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교회 안의 불의와 죄와 불신앙이다. 예레미야가 예루살렘 멸망의 이유로 외친 것도 바로 이스라엘의 죄악과 우상숭배였다(렘 7:14; 26:6, 9).
2. 시온 지도자들의 죄(13~16절)
시인은 예루살렘 멸망의 원인을 선지자들과 제사장들의 죄 때문이며 그들이 성안에서 의인들의 피를 흘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예레미야는 종교 지도자들이 이들의 죄가 가장 크다고 비판한다. 특히 이들이 저지른 죄목은 의인들의 피를 흘렸다는 것이다. 제사장들은 재판에 관여했기 때문에 부정한 판결을 해 의인을 악인으로 만드는 데 관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전하라는 말씀이 아닌 거짓 예언과 거짓 평안을 전하였다. 예레미야는 거짓 선지자 하나냐를 비롯하여 여러 거짓 선지자와 싸웠고, 제사장 바스홀에 매를 맞기도 했다. 더구나 그들은 하나님 말씀의 파수꾼이었지만 그의 의로운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고 지키지 않았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들의 죄를 가장 심각한 것으로 보셨다.
14절은 피로 자신을 더럽힌 사람들, 곧 부정하게 된 사람들의 상황을 보여준다. “피”는 13절과 연결하여 해석하면 “의인들의 피”다. 이들은 무고한 피를 흘렸고 이에 따라 제의적으로 부정해졌다. 제의적으로 부정해지는 원인은 두 가지인데, 제의적으로 부정하다고 규정된 것을 만지는 경우와 죄를 지었을 때다. 본문은 의인을 죽인 죄로 인해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해졌다. 종교 지도자 특히 제사장과 선지자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결인데, 이들은 의인들을 죽이면서 부정하게 되어 이제 더는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부정한 상태를 보지 못하고 계속해서 제사를 드리고 거짓 예언을 하며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특권만을 누리며 살았다. 하지만 자신의 죄를 모르고 종교 지도자로의 권세를 부리려는 모습은 역겨운 것이었다.
15절에서는 종교 지도자들에 대한 비난이 더욱 거세진다. 사람들이 이들을 부정한 사람 취급하며 “부정하다 돌아가라 돌아가라 자신을 만지지 말라”라고 외치면서 종교 지도자들을 내쫓고 피한다. 사람들로부터 존경의 대상이 되어야 할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한 사람의 대명사가 되어 기피 거리가 되고 쫓겨 다니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들이 그 땅에서도 도망하여 방황할 때도 이방인들은 자신의 나라에 그들이 거하지 못하게 내쫓는다.
16절에서 예레미야는 지도자들이 비난과 조롱을 받게 된 것이 여호와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여호와의 얼굴이 그들을 흩으셨다고 표현하며 여호와께서 직접 그들을 흩으셨음을 고백한다. 일반적으로 “여호와의 얼굴”은 자기 백성을 돌보기 위해 오시는 여호와의 임재의 상징이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심판하시기 위해 여호와가 오신 것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여호와가 제사장에게서 얼굴을 돌리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제사장의 얼굴을 높이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한 장로들에게도 호의를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외면을 받는 제사장과 지도자들이 사람들로부터도 외면받게 되었다고 예레미야는 비판한다. *많은 이들이 교회의 직면한 어려움들의 원인에 대해 시대조류 탓을 하고 외부의 문제 요인들을 들먹인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에 발생하는 문제의 일차적인 책임은 언제나 지도자들에게 있다. 교회의 지도자가 바로 서지 못하면 교회는 쇠퇴하게 되고, 지도자들은 조롱거리가 되며 배척의 대상자들이 된다.
3. 우리의 어려움에 대한 탄식(17~20절)
이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를 동일시하며 우리의 어려움에 대해 깊이 탄식한다. 예레미야는 우리들이 헛된 도움을 계속 바라보느라 눈이 상했다고 고백한다. 이스라엘은 망하기 전까지 계속해서 주변 나라들과 동맹을 맺으며 그들의 도움을 구하였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구원에 대한 희망이 주어질 것이라고 은근히 기대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분명히 주변 나라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께 회개하라고 선포했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예레미야의 경고를 귀담아듣지 않다가 결국 망하게 되었다.
18절부터는 도움을 받지 못한 이스라엘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적들이 자신의 걸음을 엿보기 때문에 길로 다닐 수가 없다고 고백한다. 이는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 추적하는 모습을 연상시킨다. “엿보다(추드)”라는 동사는 “사냥하다”라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적들로부터 언제 공격을 당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마음 놓고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이런 위협적인 상황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이제 자신들의 끝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끝”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예레미야는 망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19절은 18절을 이어받으면서 적들을 “추적하는 자”로 부른다. 적들은 독수리보다 산꼭대기까지도 올라가고 광야에서도 매복하고 있다. 이들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도망하지 못하게 모든 곳에서 철저하게 추적한다. 20절은 이런 적들의 추적에 우리의 콧김(우리 생명의 숨결이라는 의미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자라는 뜻의 관용어), 즉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도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고 말한다. 시드기야가 예루살렘 성 함락 직후 도망하였다가 붙잡히게 되어 처형된 것을 가리킨다. 적들이 여호와의 왕국을 완전히 무너지게 하였다는 뜻이다. 하나님 대신 왕과 외세를 의지하던 이스라엘은 철저하게 멸망하게 되었다.
4. 딸 에돔에 대한 심판(21~22절)
이 단락은 에돔의 멸망을 선언한다. 예레미야는 에돔에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고 말하는데, 이는 에돔에 대한 비꼼이다. 곧 너희에게도 멸망이 임할 것이라는 말이다. “취하여 벌거벗으리라”라는 에돔이 무력하게 수치를 겪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21절은 시온에 내린 징벌이 끝날 때 에돔이 징벌을 받게 될 것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에돔은 예레미야로부터 비난을 면치 못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어려움에 빠져 있을 때, 그들은 돕기는커녕 오히려 배반했기 때문이다.
나는?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의 멸망이 그릇된 지도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이었다고 노래한다. 앗수르의 군대가 포위하고도 함락하지 못한 예루살렘에 원수들이 드나들며 약탈하고 살육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왕하 19:32). 하나님의 성전이 있는 도성이 기초까지 불살라져 재건의 희망마저 사라질 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경고는 전하지 않고 백성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거짓 평안을 예언하는 선지자들과 거짓 축복을 빌고 말씀을 가르치지 않은 제사장들이 이 같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온 주범들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의인들을 죽였다. 그런데 이제 부정한지를 판결하던 제사장들이 나병 환자처럼 부정하다며 배척을 받고 부정한 이방인들에게마저 쫓겨났다. 하나님이 그들을 돌아보시지 않자 그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아무도 제사장들을 존경하지 않았고 장로들을 대접하지 않았다.
*기막히게도 오늘날 이 땅의 목회자들을 향한 세상의 시선이 딱 이렇다. 더 참담한 것은 그런 목회자들 중의 일부는 이런 상황도 파악하지 못한 채, 교회를 더 큰 위기로 몰아넣는 행동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한다.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따라 하나님과 씨름하기보다, 드러내놓고 자신들의 세를 규합한다. 그래서 세상과 다를 바 없는 규모의 완력으로 원하는 바를 쟁취하려고 한다. 세상 단체들과 하등의 구별된 것이 없다. 그래서 더욱 참담하다.
*하나님 말씀의 가치는 가장 먼저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에서 영향력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런데 세력을 규합하는 몇몇 목회자들의 삶은 속임과 불법을 마치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포장하며 기만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어찌하란 말인가. 말씀의 가르침과 삶이 다른 저들의 말에 준동하는 이들을 보는 것도 괴롭다. 가르침과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한 삶이라면 좋겠다.
*이것이 오랜 시간 삶으로 사람들에게 증명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의 심판도 심판이지만 세상 사람들이 먼저 단죄한다. 지금 교회가 딱 이 상황이다. 그래서 괴롭다.
-그릇된 믿음이 참담한 심판을 가져왔다. 유다는 하나님 대신 애굽을 의지하여 바벨론을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허망한 소망으로 끝났다. 원수에게 쫓겨 길거리를 다닐 수도 없었고 산꼭대기와 광야에도 원수가 매복하여 숨 쉴 곳이 없었다. 마지막 남은 희망인 왕(시드기야)마저 도망하다 붙잡혀 처참하게 죽고 만다(렘 39:1~9).
-하나님을 떠나서는 우리가 숨을 곳도 숨 쉴 곳도 없다. 나의 “의존 목록”을 아무리 많이 나열할 수 있다고 해도 하나님이 맨 위에 있지 않으면 다 헛것이다.
-심판 끝에 주어진 희망의 메시지가 있다. 예레미야는 유다의 대표적인 원수 에돔의 멸망과 유다의 구원을 예언한다. 대적의 즐거움은 그치고 유다의 탄식도 그칠 것이다. 대적의 죄악과 허물은 수치로 끝나고 유다의 죄악은 용서로 끝날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격이 있어서 이런 은혜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에 주신 은혜이고, 그들의 회개를 보고서 베푸실 구원이 될 것이다.
*예레미야는 에돔의 심판과 유다의 회복을 확신한다. 가장 큰 슬픔은 가장 큰 희망과 잇닿아 있다. 나의 죄에 대한 절망과 애통함이 참된 위로의 자리로 이끌 것이다.
*주님, 지도자들의 문제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듯합니다.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과 행함이 동일하고, 행함의 본이 되어 가르침이 무색하지 않은 삶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