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극심한 고통과 설움을 기억해 주십시오 [애 5:1-10]
 – 2024년 10월 27일
– 2024년 10월 27일 –
애가의 마지막 장은 가장 강력한 어조의 호소와 기도다. 이 슬픈 노래의 핵심은 그들이 당한 수치다. 5장은 앞 장과 다르게 알파벳 시는 아니다. 1~4장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화자는 시인, 땅 시온, 남자, 우리로 다양하게 교차하는 구성이었다. 5장의 화자는 “우리”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 함락을 목격한 생존자들이다. 개인이 아닌 공동체의 시선이기에 마치 합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데 이 마지막 합창은 처음부터 끝까지 절망을 노래한다. 1~10절은 하나님을 향해 고통과 불평을 토로하는 목소리와 생존을 위한 외침 어우러진 구성이다.
    
예레미야는 4장에서 예루살렘의 극심한 기근과 굶주림에 대해 말하며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책임이 지도자들에게 있음을 밝혔다. 5장은 그런 극한 형편에 처해 있는 자신들을 보고 기억해 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1. 우리를 기억해 주십시오(1절)
5장은 여호와께 우리를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며 시작한다. 기억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은 3:19에 이어 다시 등장했다. “기억”은 여호와께서 어려운 현재 상황에 개입하고 구원하시는 첫 단계이다. 출 2:25에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혹독한 노예의 삶을 살아갈 때 모세를 보내 구원하기로 하신 것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고 기억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에 예레미야도 여기에서 “우리가 당한 것을 기억해달라, 우리가 받은 치욕을 살펴봐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또 이제까지는 예레미야 혼자 기도하였으나 지금은 “우리”라는 표현을 통해 공동체가 같이 기도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한다.
    
    
    
2. 약속의 땅에서 배고프고 쉴 수 없는 백성을 기억해 주십시오(2~5절)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꼭 보시기 원하는 치욕적인 상황을 구체적으로 표현한다. 2절은 우리의 기업이 낯선 사람에게, 우리의 집이 이방인들에게 넘어갔다고 호소한다. “기업”은 하나님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집안별로 나누어주신 땅이다. 이 땅은 사고팔아서는 안 되고 남에게 넘겨주거나 빼앗겨서도 안 된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도 물론 불가하다. 그런데 이따위 이제 이방인의 손에 넘어갔다. 땅뿐만 아니라 집까지도 남의 손에 넘어갔다. 가나안 땅에서 삶의 터전을 완전히 빼앗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모습은 신명기 28장 30절에 따르면 집을 건축하지만, 거기에 거주하지 못할 것이며, 포도원을 심었으나 네가 그 열매를 따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다. 모두 이방인들에게 빼앗긴 상황을 묘사한 것이다. 이런 상황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심판이었다.
    
한편 신명기 8장에서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아름다운 땅을 주시겠지만,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여호와를 잊어버리면 반드시 망하게 할 것이라고 선언(신 8:19)하셨다. 그러므로 현재 이스라엘이 기업을 빼앗긴 것은 여호와가 그들의 기업이 되신 것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잊었기에 멸망했지만, 이제 다시 공동체는 여호와께 자신들을 기억해달라고 호소하면서 어려움을 호소하고 있다. *기억해야 한다. 완전히 멸망하는 고통을 겪기 전에 여호와를 기억하고 돌아오는 것이 지혜다.
    
3절은 현재 자신들의 형편을 아버지 없는 고아에 비유하고 자신들의 어머니를 과부에 비유한다. 고아와 과부와 이방인들은 모두 기업이 없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들은 경제, 사회적으로 가장 어려운 형편에 속한 이들이다. 그런데 2절에서는 상황이 역전되어 이방인이 기업을 갖게 되었고, 이스라엘 백성은 기업 없는 이방인들처럼 살게 되었다. 그리고 3절에서 자신들에게 기업을 물려줄 아버지도 없는 고아와 과부같이 되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 백성이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된 것이다.
    
4절에서는 물과 나무를 돈 주고 사와야 한다고 말한다. 나무와 물은 생필품으로 당시 자연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물은 마을의 공동 우물에서, 나무는 산이나 들에서 공짜로 얻을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마을과 산과 모든 곳을 점령하였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자유롭게 물을 떠 올 수 없게 되었다. 또 산이나 들에서 나무를 할 수도 없는 통제되고 억압된 상황에서 살게 되었다. 젖과 꿀이 흐르는 풍요의 땅에서 예루살렘 사람들은 물 한 모금을 구하기 위해 큰 대가를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5절은 억눌리고 평안이 없는 삶을 묘사한다. 적들에게 목까지 추적당했다는 것은 정복자들이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몰아붙이며 괴롭히는 상황을 표현한다. 심한 괴롭힘 때문에 예루살렘 사람들은 피곤하지만 쉴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 예루살렘, 즉 평화의 도시에서 이스라엘은 평안을 누리지 못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부닥치게 된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들이 시온에서 겪는 심각한 상황을 토로하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기억하고 돌아보시길 기원한다.
    
    
    
3. 이방을 의지한 죄를 고백하다(6~7절)
예레미야는 다시 시온의 죄를 고백한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기 위해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먼저 회복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죄에 대한 고백과 회개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 고난이 자신의 숨겨진 죄 때문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시험인지 알려면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그러는 중에 자기 안에서 죄를 찾으면 회개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고난이 멈춘다. 하나님의 시험이면 그 시험 기간이 지날 때까지 하나님을 신뢰하며 잠잠히 견디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예레미야는 4장에서 지도자들의 잘못을 지적했었다. 6절은 그 지도자들이 주변 강대국을 의지한 것에 대한 죄를 고백한다. 유다는 북이스라엘이 멸망한 후 내내 앗수르의 속국으로 있으면서 그들을 의지했다. 앗수르가 멸망한 후에는 애굽의 속국이 되어 의지했다. 그리고 바벨론이 침략했을 때는 애굽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애굽을 의지하지 말라고 계속 경고하였다(사 19장; 30:2~7; 31:1~3; 렘 42:14~19). 하지만 유다 사람들은 예언자들을 통한 경고를 듣지 않고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애굽을 의지하였다. 하나님은 자신이 먹을 것을 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셨지만(신 8:9~10).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이방을 의지하였다. 하나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저버린 것이다.
    
7절은 예레미야가 조상들이 범죄하여 없어졌고 그들의 죗값을 현재의 공동체가 짊어지고 있다고 고백한다. 예레미야는 여기서 자신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다고 말한 것과 달리 자신들이 조상들의 죗값을 대신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예레미야는 자신들의 죄에 대해 눈을 돌린 적이 없으며, 자신들이 무죄하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이 표현은 현재 심판이 조상 때부터 저지른 죄와 자기들 죄의 산물이라는 뜻이다. 한편으로는 몇 세대에 걸친 죄의 무게가 매우 무겁다는 뜻이기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이 참으셨다는 것도 보여준다.
    
    
    
4. 적의 핍박으로 배고픈 백성들(8~10절)
다시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묘사로 돌아온다. 그들은 이전에 종들이었던 자들의 지배를 받는다. “종”은 바벨론 관리들을 가리키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상황의 역전을 효과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9절에서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양식을 구할 수 없어 영양실조에 걸린 아들도 있다. 영양실조로 수척한 모습을 표현한다. 이런 어려움을 호소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있다.
    
    
    
나는?
-본문을 통해 붙잡아야 할 중요한 메시지는 먼저 심판 중에도 그치지 않는 기도를 드리고 있다는 점이다. 예레미야는 유다가 겪은 모든 고초는 자초한 것이지만, “인생으로 고생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이 여호와의 본심이 아님”을 알기에 다시 중보자적 기도를 드린다. 자신들이 당한 것을 기억하고 수욕을 돌아봐달라고 요청한다. 눈에 보이는 평탄함이 건강한 영적 상태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이 순조롭지만, 하나님과의 관계가 황폐하다면 지금 그에게는 울부짖는 기도가 필요할 때이다.
    
-여호와의 심판은 당연한 일상을 철저하게 파괴한다. 예레미야는 예루살렘은 땅도, 집도, 아비나 남편도 잃어버린 고아와 과부와 같이 되었다고 탄식한다. 유다는 미래를 잃었다. 하나님만을 자신들의 기업으로 여기지 않았기에 유다는 그 기업을 이방인에게 빼앗겼고, 강대국에 마음을 뺏긴 어미 예루살렘은 자녀(백성)와 남편(하나님)을 모두 잃어버린 것이다.
    
-땅도, 집도, 아비도, 남편도 없어졌다. 돈이 없으면 물과 섶(나무)마저 맘대로 쓸 수 없었으며, 압제자의 가혹한 통치는 쉴 틈조차 얻을 수 없이 사는 삶이 되게 했다(2~5절). 하나님께서 원수들로 “목이 곧은 백성”의 목에 멍에를 메어 교만을 꺾으셨기 때문이다.
    
-바벨론의 압제 아래서는 흔하디 흔하지만 물과 섶(나무)마저 이방인들에게 빼앗겨 이젠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의 가혹한 통치를 벗어나려 해보지만, 적들에게 추격당해 목이 눌리고 잠시도 피곤한 몸을 누일 틈을 얻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통해 목이 곧고 교만한 자기 백성의 목에 멍에를 메어 그 교만을 꺾으려 하셨기 때문이다.
    
-예루살렘 멸망은 하나님보다 열강을 더 의지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이었다. 유다는 자기 땅에 미친 압제와 굶주림을 피해 애굽과 앗수르에게 손을 벌리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들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을 버린 유다는 갈대아인들의 종이 되었다. 광야까지 나가서도 목숨을 걸고 양식을 구해야 했으며, 영양 결핍으로 얼굴은 시커멓게 변했다.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보다 열강을 더 의지했던 열조의 죄와 그 결과를 보고도 깨닫지 못하고 더욱 큰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요즘 내 영혼의 안색은 어떤가? 주인에게 좋은 양식을 받아먹는 주의 종으로 사는가? 아니면, 세상 열강의 종이 되어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있는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버리면 이처럼 무정한 세상의 종이 되고 만다.
    
-유다는 원수였던 애굽과 앗수르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이는 조상들의 죄와 이를 보고도 회개치 않고 더욱 악을 행한 그들의 죄 때문이다(렘 16:11~13). 돈을 의지하다 돈의 노예가 되고, 거리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도, 여전히 자녀들에게 돈 잘 버는 것이 성공이라고 가르치고 있지는 않는가?
    
    
    
*주님, 은혜 아니면 살 수 없는 세상임을 다시 또 깨닫습니다. 오직 의지할 분은 하나님밖에 없음을 절감합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합니다.
*주님, 하나님보다 더 의지하는 세상 나라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나를 지켜주실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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