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비참함의 노래가 끝이 끝이 아니다. 반드시 회복이 일어난다. [애 5:11-22]
 – 2024년 10월 28일
– 2024년 10월 28일 –
멸망 당한 예루살렘의 생존자들이 당하는 극한의 고통이 토로 된다. 여전히 침묵하시는 하나님께 필사적으로 함께 부르는 합창이다. 하나님이 보고 듣고 기억하시기에 죄에 대한 통렬한 고백과 황폐해진 시온에 대한 비통함을 쏟아낸다. 극단적인 현실로 인한 고난은(11~14절)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하고 회복되어야 하기에 애가의 마지막 호소는 끝까지 하나님이 우리를 돌이켜 구하시길 바라는 요청과 우리가 돌아가겠다는 맹세로 이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침묵하신다.
    
하나님의 침묵은 고통의 진실이 담긴 것으로서 시편의 탄식시와 욥의 탄식과 같은 결을 드러낸다. 그러나 하나님의 침묵 절정은 예수님의 부활이 있기 전 십자가의 고통과 버림받음과 죽음이다(시 22편; 막 15:34). 이것이 하나님의 침묵 본질이다. 이 침묵이 있어야 구원이 완성된다. 심판이 온전하게 집행되어야 진정한 회복이 시작된다. 온전한 회복의 시작을 위해 지금은 침묵하셔야 한다.
    
하나님의 침묵 속에 애가의 처음과 마지막이 슬픔과 황폐함으로 고난에 대한 한탄으로 마친다. 그런 상황에서도 예레미야는 여호와를 바라보며 다시 자신들을 돌이켜 봐달라는 간절한 기원으로 애가를 마친다.
    
    
    
1. 시온 성안의 비참한 상황에 대한 탄식(11~16절)
11절은 예레미야가 전쟁으로 고통당하는 여성들에 대해 탄식한다. 성안의 여성들이 욕보인 것에 대한 탄식이었다. “욕보이다”로 번역된 동사 ‘아나’는 ‘강제로 몹쓸 짓을 당하다’라는 뜻이다. 히브리어 원문은 성안을 강조한다. 본래 성안에는 사람들이 많아 이런 일이 쉽게 일어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은 여성들이 소리를 치며 도움을 구해도 도와줄 사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비참하게도 고대 사회의 전쟁에서 승리하면 여성을 성폭행하고 전리품으로 취하여 성노예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예레미야는 이런 끔찍한 폭력의 상황에 놓인 예루살렘 성을 보며 한탄한다.
    
12절은 지도자들이 겪는 고통이다. 지도자들이 그들의 손에 매달렸다는 것은 바벨론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시체를 나무에 매달아 두었다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나무에 달린 시체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것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이들은 예루살렘 백성에게 공포감을 주어 감히 반항하지 못하게 하려고 이런 잔혹한 짓을 한 것이다. 장로들은 사람들로부터 전혀 존경을 받지 못한다. 이들도 정복자들에 의해 함부로 다루어지고 모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13절은 젊은 남자들이 겪는 고통이다. 젊은 남자들은 맷돌을 돌리고 그보다 작은 소년들은 나무를 하느라 고통을 당한다. 맷돌을 돌리고 나무를 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전쟁에 패한 자들에게 시키는 노동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도 가나안 민족을 진멸하지 않고 그들을 나무하거나 물 긷는 노예로 삼는 경우가 있었다. 13절은 11절의 상황과 함께 모두 전쟁 포로가 된 젊은 남녀의 비참한 상황을 보여준다. 14절은 노인과 청년들이 대조된다. 성문은 공공장소로서 장로들이 재판을 열거나 어려운 문제를 상의하며 해결해 주는 곳이었다. 따라서 성문에 노인이 앉아 있다는 것은 장로들이 조언하고 판단하는 권위와 명예를 가졌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들은 더는 그런 명예와 권위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청년들은 축제나 여러 행사에서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하고 춤을 췄는데, 이런 축제도 사라지게 되었다.
11~14절의 히브리어 문장에서 모두 주어가 맨 앞에 배치된 동일한 문장 구조를 가진다. 문장 형식으로 각양각색의 모든 사람이 전쟁의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15~16절은 이런 상황을 겪는 예루살렘 백성의 생각과 슬픔을 표현한다. 예레미야는 먼저 우리의 마음에 기쁨이 그쳤고 춤이 변하여 슬픔이 되었다고 노래한다(15절). “슬픔(에벨)”으로 번역된 단어는 “애곡, 통곡”이라는 뜻으로 기쁨의 춤이 죽음을 애도하는 통곡으로 바뀌었다는 의미다. 16절에서 “면류관(아타라)”으로 번역된 단어는 왕관을 가리키며 왕과 같은 고귀함을 나타낸다. “우리의 머리에서 면류관이 떨어졌다”라는 것은 유다 백성의 고귀함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유다 백성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었다. 하지만 예루살렘 함락으로 그 명성과 자부심이 모두 사라졌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장탄식을 하며 이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16절 하).
    
죄에 대한 인정이 수치스러운 것이지만, 예레미야는 결코 회피하려 하지 않는다. 자신의 현실과 죄를 직시하는 힘이 있었기에, 19절 이하에서 예레미야는 하나님께 돌이켜 달라고 간곡히 요청할 수 있었다.
    
    
    
2. 완전히 황폐해진 시온의 상황(17~18절)
17절은 “이렇기 때문에”로 시작한다.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2~16절에서 언급한 시온의 비참한 상황들을 말한다. 이런 비참한 상황 때문에 예레미야의 마음이 무기력하다고 고백한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전혀 없다. 언제 이런 상황이 끝날지, 얼마나 더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야 할 지, 하나님이 이 심판을 언제 어떻게 멈추실 것인지, 우리를 괴롭히던 악인들을 심판하실지 전혀 알 수 없다. 예레미야와 예루살렘 공동체는 철저하게 무기력했었다.
    
17절 하반절에서 우리 눈이 어두워졌다고 한 것은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너무 울어서 눈이 상했다는 뜻일 수 있다. 재난으로 인해 몸과 마음이 모두 마음이 약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둘째는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상황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마음이 무력하고 절망적인 마음 상태를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해석이든 간에 현재 예레미야는 매우 힘들고 절망적인 상황이라고 표현한다.
    
18절은 성읍 이스라엘도 황폐하게 되어 더는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 여우와 같은 들짐승들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왕래하며 번성하던 아름다운 성읍이 이제는 황폐해져 들짐승이 왕래하는 곳이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는 예레미야의 마음은 매우 비참했을 것이다.
    
예레미야는 자신과 시온의 철저한 무기력과 황폐함을 고백하면서 여호와께로 나아간다. 여호와만이 오직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3. 여호와께로 나아가는 예레미야(19~22절)
19절에서 예레미야는 다시 여호와를 부른다. 19절은 여호와가 영원히 계신다는 것과 그의 보좌에 계속해서 여호와가 앉아 계신다는 것을 송축한다. 이것이 예레미야가 믿고 의지하는 희망의 보루이며 신앙이다.
    
지금은 시온의 멸망으로 여호와가 안 계신 것처럼 보이고 여호와의 보좌가 무너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시온은 멸망해도 여호와는 살아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영원히 있으며, 여전히 왕으로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이 믿음은 결국 이 세상의 역사가 여호와의 손안에 있어서 여호와의 백성에게 닥친 재앙도 언젠가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을 품게 한다.
    
예레미야는 20절에서 여호와가 자신들을 어떻게 영원히 잊으시며 오랫동안 버리시겠냐고 반문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버리지도 않으실 것이라는 신앙을 표현한다. “영원히”라는 단어를 반복하며(19, 20절) 영원히 계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영원히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21절에서 예레미야는 여호와께 자신들에게로 돌아와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비심에 의지하여 자신들도 하나님께 돌아갈 것이며, 그렇게 되면 이전처럼 완전히 회복될 수 있다고 희망한다. 철저하게 하나님의 자비를 먼저 구하고 있다. 예레미야는 전적으로 용서를 하나님의 주권에 맡긴다.
    
22절의 개역개정의 번역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부정적인 상황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다른 번역은 21절에 대한 부연 설명으로 해석한다. “완전히 버리신 것이 아니라면” 혹은 “진노하심이 매우 크시지 않다면”으로 해석한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지하여 끝까지 하나님을 붙잡고 희망을 품으려 한다. 이런 예레미야의 모습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도 본받아야 한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고 고난을 통과하는 인내와 희망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여정 속에서도 필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애가를 부른 예레미야의 처절한 고통의 울부짖음은 (되려 강력한 희망을 품게 하여) 오늘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선사한다.
    
    
    
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을 보면서 세상의 가장 약한 자들이라도 보호받지 못하는 하나님의 단호한 심판의 모습을 보게 된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거처인 성전을 떠나시자, 시온(예루살렘)과 유다 각 성에서는 부녀들과 처녀들이 욕을 당한다. 왕자들은 나무에 매달려 죽고(렘 39:9), 마땅히 존경받아야 할 장로(노인)들은 업신여김을 당했다. 종교와 정치, 사회의 모든 질서가 다 무너진 것이다.
    
-예루살렘이 무너지자, 소년들이 그 무거운 맷돌을 지고, 아이들이 나무를 하다가 엎드러졌다. 노인들은 성문에 앉아 어른 노릇을 못 하고, 성문 앞 광장에서 흥겹게 춤추고 노래하는 소년들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명예와 배려, 흥과 즐거움이 사라진 사회가 되어 버렸다.
    
-하나님보다 물질을, 하나님 나라보다 지교회의 확장을 더 중요시한다면, 세상이든 교회든 사람은 존경과 존중의 대상이 아니라 도구와 수단으로 전락할 것이다. 젊은이와 가진 자를 환대하고 도움을 더 많이 주어야 할 사람은 환영받지 못하는 시대가 오늘날 아닐까?
    
-예레미야는 시온의 영광(면류관)이 떨어지고 희락이 애통으로 변한 것은 자신들의 죄 때문이라고 고백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전이 있는 시온이 여우가 노는 곳으로 바뀐 것을 보고 선지자의 마음은 피곤하고 그의 눈은 많은 눈물을 상했다. 이처럼 오늘날의 나는 과연 나와 이 땅의 교회가 다시 주께 돌아와 우리의 날이 새롭게 되도록 기도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절망의 먹구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언약은 파기되어야 마땅하지만,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아직은 소망이 있다. 주님만 돌아오시면 그 백성도 돌아올 수 있고, 옛적같이 주와 교제하는 새날을 기대할 수 있다.
    
    
    
*주님, 마지막까지 울부짖지만, 결국 그 통곡 너머의 다시 회복됨의 소망을 바라봅니다. 지금 슬퍼해야 그때 온전히 기뻐할 수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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