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의 1차 투옥 이후 잠시 풀려난 바울은 여러 지역에서 선교 사역을 이어간다. 구체적인 장소를 단정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스페인과 크레타섬 지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 기간에 거짓 교사들로 인해 문제가 생긴 에베소 지역의 교회들을 담당하고 있던 디모데에게 편지를 썼다. 거짓 교사들은 유대교와 관련된 기독교인들이었을 가능성이 있고,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가르침으로 교회에 영향을 끼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에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 상황을 잘 처리하기를 편지를 써서 독려한 것이다. 특히 거짓 교사들의 문제를 잘 처리하기를 당부한다.
에베소 교회는 바울이 제3차 전도 여행에서 개척한 교회로 바울이 오랫동안 목회를 했던 곳이다. 자신이 떠난 후에 악한 이리와 같은 거짓 교사들이 나타나서 교회를 어지럽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행 20:29).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서 잠시 석방되어 다시 에베소 교회를 방문했을 때 그가 염려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바울은 디모데를 그곳에 남겨두고 떠났다.
1. 문안 인사(1~2절)
이 부분은 자기 자신에 대한 소개와 이 서신을 받는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원한다. 또한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소개하며 어떻게 사도가 되었는지도 간단하게 설명한다. 특이한 점은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되었다고 주로 말하였지만, 본문에서는 “명령을 따라” 되었다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사도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와 사명감에 대해서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뜻에 따라”라는 표현이 주는 사도직의 기원에 대한 변증으로 자신의 사도 됨의 정당성을 표현하는 것과 비교된다. 아마도 에베소 교회에서는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권위에 도전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제3차 전도 여행 중에 많은 시간을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를 참된 아들로 묘사한다. “참 아들”이란 표현은 친밀감의 표현임과 동시에 디모데가 바울 복음의 참된 계승자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베소 교회의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둘 때 이 표현의 중요성은 더욱 드러난다. 바울은 오직 디모데만이 복음의 참된 계승자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2. 디모데를 에베소에 남겨둔 목적(3~5절)
역사에 의하면 바울은 로마 감옥에서 풀려난 후 약 5년 동안 다시 선교 활동을 펼친다. 그는 먼저 평소 원했던 대로 스페인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그 후에 다시 소아시아에 들러 과거에 사역했던 교회들을 순회하며 돌아보았다. 이 여행에 함께 간 사람은 디모데와 디도였다. 이때 바울은 거짓 교사들에 의해서 문제가 발생한 에베소와 그레데에 가장 신실한 동역자인 디모데와 디도를 각각 남겨두어 거짓 교사들의 문제를 해결하고 교회를 바로 세우도록 했다.
짐작건대 젊은 디모데는 혼자서 거짓 교사들을 상대하기가 두려워서 에베소에 남기를 꺼렸을 수 있다. 바울은 그러한 디모데를 남겨둔 것이 걱정되어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디모데에게 서신을 보내 격려하고 교회를 어떻게 다스릴지에 대해 조언한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는 거짓 교사들의 정체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들은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여 이런 것들을 가르쳤고, 그것은 성도들 사이에 분쟁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 여기에서 언급하는 “신화”는 그리스-로마 신화를 가리는 것이 아니라 구약과 유대적 전통을 헬라적 관점에서 해석한 것을 의미한다. 굳이 현재까지 남아있는 유물로 설명하자면, 헬라적 유대인들에 의해 생겼을 것으로 추정하는 “희년서”와 같은 책들이다.
이와 비교하여 바울은 5절에서 올바른 교훈의 목적에 관해서 설명한다. 복음의 교훈은 성도들로 하여금 사랑을 행하도록 하는 데 있다. 거짓 교사들의 다른 복음이 잘못된 이유는 그것이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논쟁만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요소는 복음이 가지는 중요한 특징이다.
복음에 대한 거짓 없는 믿음은 마음을 청결케 하고 선한 양심을 갖게 한다. 정결한 마음은 거짓 교사들의 교만하고 부패한 마음(딤전 6:3)과 비교된다. 선한 양심 역시 거짓 교사들의 화인 맞은 양심과(딤전 4:2) 대조된다. 거짓 없는 믿음은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거짓 교사들의 신앙과(딤전 4:1) 대조된다.
3. 거짓 교사들의 모습(6~7절)
거짓 교사들은 교훈의 참된 목적에서 벗어난 자들이다. 벗어났다고 하는 말에서 거짓 교사들도 처음에는 참된 복음을 받았던 자들임을 암시한다. 목회 서신의 거짓 교사들은 교회 밖에서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자들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었지만, 올바른 목적을 향해서 계속 나아가지 않고 중간에 벗어나 다른 곳으로 빠진 자들이다.
그들이 빠진 곳은 “헛된 말” 곧 공허한 논쟁이다. 복음은 사변적인 논쟁을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한 것이다. 복음을 사변적으로 따지고 논쟁하는 것은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이는 복음에 관한 진지한 연구와 변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복음의 목적에서 벗어난 잘못된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을 신기한 방식으로 해석하여 자신들의 지식을 자랑하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해석이 아무리 신기하고 색다른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복음의 참된 진리가 아니다.
거짓 교사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자신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확신에 찬 신념으로 말하고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지만, 그것은 참된 깨달음이 아니라 공허한 말장난과 논쟁에 불과하다. 복음을 가르치는 선생된 자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은 다른 사람들이 듣지도 생각지도 못한 신기한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마치 자신이 새로운 진리를 발견한 것처럼 드러내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4. 율법의 올바른 사용은?(8~11절)
바울은 율법의 올바른 사용에 대하여 설명한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잘못 사용하여 공허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교회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율법을 올바르게 사용하면 그것은 선한 것이다. 율법은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한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해석은 사람들을 선한 길로 인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종 불의와 불법을 한 자로 만들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자들이 아니라 율법을 파괴하고 불법을 한 자들이다.
바울은 9~10절에서 율법의 목적과 반대되는 열다섯 가지의 불의한 목록을 소개한다. 이 목록은 불법에서 시작하여 올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것으로 끝나고 있다. 즉, 불법이나 올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것은 모두 교훈의 참된 목적에서 벗어난 것이다. 거짓 교사들이 아무리 율법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가르친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것을 파괴하고 배척하는 행위를 하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는 것에 대한 언급과 인신매매에 대한 언급은 매우 의아하지만, 바울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교훈이 가져올 수 있는 파괴적인 결과에 대해 총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음을 짐작게 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올바른 교훈에 반대되는 것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다시 올바른 교훈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한다(11절). 바울이 가르치는 올바른 교훈은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 따른 것이다. 여기서 복음의 특징이 두 가지로 소개되는데, 복음은 “복된 것이고 영광스러운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예수님의 명령대로 사도가 된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경륜)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일꾼을 보내 다른 교훈의 위험성을 알린다. 에베소 교회는 신화와 족보에 정신이 팔린 거짓 교사들이 출몰하여 공동체에 전혀 유익이 없는 변론만 만들어 냈다. 하지만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 그런 가르침을 중단시킴으로써 공동체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을 갖게 한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의 사도가 된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말한다(1~2절).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은 그의 인생 경로를 바꾸고 사명(使命)을 확신하기에 충분했다. 이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로 자신을 부르신 주님의 뜻이었다. 눈에 보이는 세상보다 나를 부르신 분에게 더 충성하면서 그분의 뜻을 받들며 살아야 하겠다.
-바울이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이유는 공동체를 위협하는 “다른 교훈”을 물리치고 성도들은 “바른 교훈” 안에 세우기 위함이었다(3~4절).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심취한 자기 복음에 심취한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하나님의 구원 경륜(계획)을 이루기보다 전혀 유익이 없는 변론과 분열만 일으켜 공동체를 위태롭게 할 뿐이었다. 다른 교훈은 교만하여 분열을 조장하지만, 바른 교훈은 겸손한 사랑으로 공동체를 세운다.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가르칠 만한 합당한 인격도 갖추지 못했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게 주장하는 자기 가르침의 내용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선생만 되려고 하였다. 사람들 앞에서 가르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은 청결하고 양심은 선하고 믿음은 진실하며, 무엇보다 나 자신이 사랑의 사람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거짓 교사들은 이론적인 공론에 심취할 뿐 정작 공동체를 세우는 참 원리인 믿음과 사랑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또 자기가 가르치는 내용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면서 선생만 되려고 했다. 바울은 바른 교훈의 목적에서 벗어난 그들의 가르침과 행실이 얼마나 무지하고 무모하며 무익한지를 지적한다(5~7절). 나도 사람들 앞에 가르치는 자로 서기 전에 먼저 정결한 마음과 양심,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추구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내 말과 행실은 자기만족과 허영을 채우기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교회에 유익을 가져오고 있는지도 놓치면 안 된다.
-율법을 그릇되게 가르치는 자들이 문제일 뿐 율법은 여전히 악을 제어하고 죄를 정죄하며 신자들을 가르치고 권면하는 선한 도구이다. 율법을 거스르는 죄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좇는 바른 교훈도 거스른다. 바른 교훈을 좇을 때 율법의 의로운 요구를 성취할 수 있다. 거짓 교사들의 문제는 율법 준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복음을 따르지 않는 데 있었다.
-에베소의 거짓 교사들은 율법을 무익한 변론을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다. 하지만 바울은 적법하게만 사용한다면 율법은 선한 것이라고 주장한다(8~11절). 문제는 율법에 있지 않고 그 의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사용하는 데 있는 것이다. 나는 기록된 말씀을 어떻게 가르치는가? 말씀의 가르침이 무익한 변론에 심취하도록 이끄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알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가!
-에베소 지역의 교회 성도들이 신화와 족보에 천착한 거짓 복음에 현혹된 중요한 배경에는 당시 에베소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에베소는 로마제국이 점령한 아시아 지방의 수도였다. 제국 안에서도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이기도 했다. 또한 고대의 유명한 여신 아데미(아르테미스)의 거대한 신전이 있었으며, 그것은 당시 세계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로 불렸던 당대에 가장 큰 거대한 헬라 신전이었다. 이와 무관하지 않게 에베소 사람들의 종교성은 잘 알려져 있었고, 편지 전체에서 반박하고 있는 “다른 교훈”은 에베소 사람들의 지나친 종교성과 깊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복음을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이라면 원하든지 원치 않든지 간에 이미 가르치는 사람들로 살아간다. 그렇다면 진지하게 성찰해 보아야 한다. 나를 통해 남들은 무엇을 배우고 있을까? 다른 교훈일까? 바른 교훈일까? 특히 나를 보고 배운 사람들은 논쟁하기 좋아하는가? 아니면 섬기고 사랑하고 희생하기를 좋아하는가? 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끼쳐지는 영향력이 무엇인지 늘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나의 가르침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도록 해야 하리라. 가르침을 통해 예수는 주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도록 해야 하겠다. 이것은 복음의 핵심임과 동시에 교회가 생명을 걸고 강조하고 가르쳐야 할 기초 중의 기초이다.
*주님, 다른 교훈이 아니라 바른 교훈, 하나님 나라 복음만을 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보이고 가르치겠습니다.
*주님, 내 가르침의 열매가 허탄한 논쟁이 아니라 사랑의 수고와 섬김이 되기를 구합니다. 도와주십시오.
*주님, 복음을 가르치면, 사랑과 섬김으로 인해 기쁨이 풍성하여질 것을 믿습니다. 나는 복음의 통로가 되겠습니다. 다른 교훈의 통로가 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