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주의 은혜와 능력을 믿는 믿음과 선한 양심으로 선한 싸움을! [딤전 1:12-20]
 – 2024년 11월 02일
– 2024년 11월 02일 –
바울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풍성한 은혜에 대하여 설명한다(12~17절). 하나님이 이렇게 풍성한 은혜를 가진 분인 것은 그에게서 나온 복음이 또한 그렇게 풍성한 것임을 증명한다. 복음의 은혜와 거짓 교사들의 불의한 가르침은 이렇게 대조된다. 18~20절은 디모데에 대한 권면으로 내용상으로 보면 3~5절과 연결된다.
    
이 단락은 바울이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가져오는 각종 불의와 불법에 대하여 설명했는데, 이제 복음의 은혜와 영광에 관해 설명한다. 거짓된 가르침이 논쟁을 일으키고 각종 죄악을 양산하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변화시켜 하나님의 일꾼이 되게 한다. 바울은 이에 대한 구체적인 예로 자기 자신을 소개한다. 바울은 과거에 죄인 중에 괴수였으나 지금은 변화되어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된 것이다.
    
바울의 회심은 예수가 부활한 주후 30년에 일어났을 가능성이 높다. 유대교를 열심히 하였던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었기에 초대 교회의 선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성도들을 잡으러 가는 과정에서 부활한 예수를 만나 비유대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았다. 이후 30여 년 동안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다메섹 사건을 주의 은혜의 핵심으로 여기며 사역했다.
    
    
    
1. 바울이 경험한 넘치는 주의 은혜(12~17절)
바울은 9~10절에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이 가져온 각종 불의와 죄악에 대해 나열했었다. 그리고 11절에서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에서 나온 것이라고 했다. 본 단락은 그 영광스러운 복음을 주신 하나님이 얼마나 큰 능력과 은혜를 가지신 분인지 설명한다.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면 그의 복음도 그런 것임을 증명하려는 것이다.
    
12~13절은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설명한다. 그 예로 자신을 변화시킨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불의함과 대조하여 설명한다. 과거에 바울은 그리스도를 비방하고 성도들을 핍박하고 폭행하는 자였다.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할 만큼 열성적인 복음의 반대자였다. 그런 바울을 변화시켜 복음의 일꾼이 되게 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충성되이 여겨(12절)”라는 말은 신실한 자로 여기셨다는 의미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을 이렇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 주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을 죽이려는 자를 자신을 위하여 죽는 자로 변화시킨 분이시다. 그것이 복음이다. 바울은 이러한 자신의 변화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알았기에 감사하고 있다.
    
그런데 죄인 중에 괴수였던 바울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믿지 않았을 때 “알지 못하고 행하였기” 때문이었다(12절). 이것은 단순한 변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그만큼 강조하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무지에 의한 죄에 긍휼을 베푸신다. 무지와 위선은 명백하게 다르다. 무지는 모르고 죄를 범하는 것이지만, 위선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죄를 범하는 것이다. 당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질타하시며 사탄의 자식이라고 정죄 받았다. 그런데 그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바울은 위선자는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양심적으로 행동한 무지했지만, 선한 양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14절은 비방자요 핍박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여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으신 것 자체가 너무도 큰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다. 바울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가 차고 넘칠 만큼 풍성한 것이라고 말한다. 분만 아니라 그 은혜 가운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이 함께 주어졌다. 즉, 바울은 거짓 교사들과 달리 하나님의 은혜로 진실한 믿음과 사랑을 받았고 또한 그것을 행하는 자이다.
    
15~16절은 이렇게 바울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도 설명해 준다. 복음의 핵심은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이다. 이 복음은 거짓 교사들의 헛된 가르침과 다르다. 복음은 얼마나 믿을 만하고 신실한 것인지 모든 사람이 받아들여야 할 만큼 가치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구원이 얼마나 큰 은혜와 사랑을 가진 것인지 죄인 중에 괴수인 자신까지도 구원받았다고 강조한다. 이와 같은 표현은 만약 바울조차 하나님의 긍휼을 입고 구원을 받았다면, 이 구원의 복음 앞에 은혜를 받지 못할 자가 있겠냐는 뜻이다. 또한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스스로 정죄하면서까지 강조하는 것은 죄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인내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설명하려는 것이다.
    
바울의 구원은 모든 세상 사람에게 본을 보이는 것이라는 의미도 되겠다. 그리스도께서 박해자였던 바울까지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셨다는 것은 그 은혜와 긍휼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세상 사람들에게 밝혀 드러내는 것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소수의 엘리트에게만 계시의 지식을 보이시고 그 계시를 받은 자들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던 것을 선명하게 반박하는 것이다. 가장 큰 죄인인 바울조차 은혜를 받고 구원받았다는 사실은 구원이 소수 엘리트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바울이 곳곳에서 자신의 회심을 간증하는 분명한 이유다. 구원은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엡 2:8).
    
17절은 그러한 위대한 구원의 복음을 주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을 드리며 하나님의 속성에 대하여 세 가지 설명을 한다. 먼저, 하나님은 영원한 왕이시다. 둘째, 그는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시는 분이다. 셋째, 그는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이다. 이러한 설명은 구원이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의 복음을 통해서만 주어지는 것이며 그 구원은 썩지 않고 영원한 것임을 드러낸다. 이는 거짓 교사들이 복음을 물질적 이익을 챙기는 방도로 사용했던 것을 비판한 것이다(딤전 6:5). 거짓 교사들은 썩어 없어질 물질을 얻기 위하여 복음의 진리를 버렸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구원은 영원히 썩지 않는 영광스러운 것이다.
    
    
    
2. 그러므로 선한 싸움을 싸우라(18~20절)
이렇게 거짓 교사들의 다른 교훈과 차별화되는 바른 복음의 은혜와 영광을 설명한 후에 다시 디모데를 향한 권면이 시작된다. 이미 3~5절에서 어떤 사람들이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못하게 하라고 명령했는데, 다시 그 권면으로 돌아가고 있다. 참된 교훈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하면서 중단되었던 디모데를 향한 권면이다.
    
18~19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명령한다. 선한 싸움은 거짓 교사들의 악한 다툼과 반대되는 것이다.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의 악한 다툼에 휘말려 들어서는 안 된다. 선한 싸움은 거짓된 가르침을 물리치고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서 경건한 행위와 사랑을 행하는 것이다(딤전 6:11~12). 선한 싸움의 무기는 “믿음과 착한 양심”이다. 바울은 1:5에서 이미 믿음과 착한 양심을 연결했었다. 바른 가르침(교훈)을 통해서만 거짓 없는 믿음과 착한 양심이 작동하여 사랑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20절은 바울이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한 거짓 교사 두 명을 지적한다. 믿음이 파선한 자들의 문제는 “착한 양심”을 버렸다는 점이다. 만약 믿음이 양심과 함께 가지 않으면 파선은 불가피하다. 이렇게 파선한 사람 둘을 언급하는데 그들이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다. 후메내오는 디모데후서 2:17~18에 등장한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알렉산더는 디모데후서 4:14에서 언급되는데, 다만 그가 어떤 잘못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유추해 보면 후메내오와 함께 언급된 것을 보면 부활에 대한 잘못된 견해 때문에 그의 신앙이 파선했을 것으로 본다.
    
바울은 충격적이게도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 주었다고 표현한다. 추측건대 바울은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알고 출교 조처를 내렸던 것 같다. 하지만 출교를 시키면서도 여전히 훈계 받기를 원하는 마음도 담았다. 단지 그들에게 범죄에 대한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들이 교훈을 받고 깨닫게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징계의 목적은 그들이 훈계받아(직역하면 그들이 배워서) 하나님을 다시 모독하지 않게 되도록 하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그들을 최종적으로 심판한 것이 아니다. 참고로 고린도전서 5:5에서 치리의 궁극적인 목적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였던 자기가 하나님을 모독하며 살다가 구원받았던 놀라운 은혜를 고백했었다. 그러므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를 출교시키는 바울의 마음은 이렇게 해서라도 하나님의 구원 은혜에서 그들이 떨어지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 틀림없다.
    
    
    
나는?
-주님은 자신을 핍박하던 바울을 돌이켜 세워 그에게 능력을 주시고, 충성할 마음을 주시며, 직분도 맡기셔서 자기의 종으로 살게 하셨다. 은혜의 강이 넘쳐흘러서 불신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믿음을 넘치게 채워주시고, 미움으로 가득 찼던 마음에 사랑이 차고 넘치게 하셨다.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이 직분을 감당하려고 경주한 것은 이 주님의 크고 놀라운 은혜의 능력 때문이었다. 주체할 할 수 없는 감사의 마음으로 어느 자리이든 어떤 직분이든 충성을 다하는 것 말고 달리 무엇으로 구원의 은혜를 화답할 수 있겠는가!
    
-긍휼로 구원의 길을 여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긍휼이 임하기 전에 바울은 가장 강력한 복음의 훼방자요 그리스도인을 가장 앞장서서 박해하던 “죄인 중의 괴수”였다. 무지와 불신에 사로잡혀 있던 그가 구원받고, 또 갖은 수모와 수치와 수고를 감수하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직분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때문이었다(12~15절). 이 긍휼함이 없다면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도, 맡겨진 사명을 이룰 수도 없다. 그러므로 내 신앙과 힘을 자랑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긍휼과 주권 앞에 감사함과 기쁨으로 나아가야 하리라.
    
-자신을 핍박하던 바울을 변화시켜 이후에 주님을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셨다. 죄인 중에 괴수인 그를 “은혜의 증거”로 삼으신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들이 아무 자격 없는 자들에게 베푸신 은혜를 대대로 깨달아서 이 사랑에 완악한 마음이 녹아 하나님을 찬양하고 인정하는 백성들로 돌아오기를 기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직분을 맡은 자는 누구든지 그 직분을 자랑스러워하고 신실하게 감당하되 인간적인 자랑거리와 권력으로 삼으면 안 된다.
    
-거짓 교사의 다른 복음과는 달리 바울을 변화시킨 바른 교훈(영광스러운 복음)은 우리를 겸허하게 한다.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을 찬양하고 오직 세세토록 왕이 되실 한 분 하나님만 높이는 사람이 되게 한다. 바른 복음은 자기 지식을 자랑하는 선생이 되려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자격 없는 사람이며 반대로 복음은 얼마나 영광스러운지 아는 사람이 되게 한다. 나의 삶을 통해 내가 다른 복음을 따라가는지, 바른 복음에 취해 있는지 분별이 될 것이다.
    
-바울은 지도자 디모데에게 공동체를 어지럽게 하는 이들을 대할 때 먼저 자신의 믿음과 착한 양심을 잘 지키라고 권면한다. 이미 출교를 받은 이들을 대할 때라도, 죄인에게 긍휼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안수 때 받은 예언을 따라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악과 싸우다가도 내가 악해지지 않고 악한 방법을 쓰지 않으며 또 다른 악을 만들어내지 않도록 늘 자신을 살피고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구해야 한다.
 
-바울은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서 파선한 자들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디모데에게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당부한다. 바울이 그들을 공동체 밖으로 추방하여 징계받게 한 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고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징벌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죄에서 돌이켜 돌아오기를 바라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에서였다. 잠시 사람을 잃지 않으려고 치리를 미룬다면 공동체를 위험에 빠뜨리고, 그 사람의 영혼마저 잃을 수 있다.
    
-성도의 싸움의 대상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인 세력이다. 아무리 복음을 방해하는 자라도 포기하거나 원수로 삼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모데도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을 따라 선한 양심을 가지고 싸우라고 촉구하는 이유이다. 무엇보다 눈앞의 대상보다 자신의 속사람과 먼저 싸워야 하지 않겠는가!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복음은 가장 악한 괴수라도 믿음의 사람이 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착한 양심”이라는 인격적인 변화를 불러오는 믿음이다(1:5, 19; 4:1~2). 그러므로 믿음을 버린 자는 이 양심마저 잃게 된다. “거짓 없는 믿음”은 이웃을 향한 사랑을 낳고 실제 삶에서 경건한 삶을 낳는 것이다.
 
 
*바울의 충성은 가히 경이롭다. 그런데 그 출발은 자신이 죄인 중에 괴수임을 깨달은 것에서부터다. 참된 충성은 자신의 상태를 처절하게 깨닫고 겸손하게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주님께 충성하기 위한 걸음은 이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충성된 삶을 요청한다. 그런데 충성에 있어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당부한다. “믿음과 착한 양심”이다. 충성의 근거를 잊지 말라는 당부다. 자신이 죄인 중의 괴수임을 잊지 않았던 바울은 디모데에게도 자신의 죄인됨을 잊지 않고 착한 양심을 지키도록도록 요청한 것이다.
 
*그런데 이 충성된 길에서 파선된 이들이 있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다. 그들은 바울이나 디모데와는 반대의 모습으로 공동체 안에서 행했을 것이다. 굳이 예를 들자면 자신의 죄인됨을 쉽게 망각했고, 겸손보다는 교만이나 자랑이 넘쳤을 수 있다. 무엇보다 자기과시를 위해 최소한의 양심조차 외면했을 가능성도 크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도 이 늪에 빠지지 않도록 경각심을 놓쳐서는 안 된다.
 
*나의 죄인됨에서 의인되게 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는 말씀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늘 확인할 수 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과 뜻이 나의 마음과 뜻이 되기를 소망하며 나아가는 하루 하루는 나의 죄인 됨을 일깨워주며 은혜안에 거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준다. 믿음안에 거하게 하고 착한 양심을 지키도록 도와준다.
 
*이 땅의 교회의 아픔은 선한 싸움을 싸울 의지를 잃어버렸다는 데 있을 것이다. 또한 선한 싸움이 무엇인지에 대한 분별조차 못하고 있지 않나 싶다. 뭔가 열심히 하는듯한데, 마음을 얻지 못하고 공허함만 넓힌다. 어떤 경우에는 선한 싸움을 명분삼지만, 되려 “아전인수(자기 논에만 물을 준다는 뜻으로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행태를 꼬집는 말)”격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된 존재지만, 세상을 향해 빛된 존재로, 소금된 존재로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빛만 비추고, 소금으로 절이는 형국이다. 사회의 아픔에는 관심이 없는데, 자기 주장만 강하게 주장한다. 이런 짓을 선한 싸움이라고 포장하여 순수한 성도의 마음을 휘잡는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바울은 디모데에게 “안수 때 받은 예언의 말씀을 따르라고 권면했다(18절). 말씀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으면 양심이 버려지고, 믿음에 관해 파선한다고 경고 했다(19절). 하지만 아쉽게도 이런 경고에도 후메내오와 알렉산더는 믿음에서 파선하고 만 것이다. 최근 한국교회안의 일부가 자신들이 가진 특권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세습을 서슴치 않고, 사랑과 평화 대신 증오와 분쟁을 도구 삼는 것도 이와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 아닐까 감히 생각해 본다. 그런 이들이 한국교회에서 큰소리치고 있는 형국에 가슴이 저민다.
 
*우리부터 우리에게 주신 말씀을 따라 겸손하게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며 살아냈으면 좋겠다. 누구라도 실수할 수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신 그 말씀을 잊지 않고, 죄인 중의 죄인이었던 나를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붙잡는 착한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내면 좋겠다. 그러면 살아날 수 있다.
 
 
    
    
*주님, 주님 긍휼의 은혜와 능력을 따라 선한 양심을 지키며, 믿음의 선함 싸움을 싸우겠습니다.
*주님, 나의 선한 싸움은 내 눈에 보이는 어떤 이보다 나의 속사람이 되게 하겠습니다. 상황과 사람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되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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