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복음, 우리가 부탁받은 아름다운 것 [딤후 1:9-18]
 – 2024년 11월 13일
– 2024년 11월 13일 –
바울은 8절에서 디모데에게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했는데, 이제 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한지를 설명한다. 바울과 디모데가 복음 선포자로 부름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목적과 뜻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이 분명하다면,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을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기록할 무렵 그는 로마 감옥에 두 번째로 갇힌 상태였다. 1차 투옥 때보다 2차 투옥 때는 상황이 더 힘들고 어려웠다. 건강은 나빠졌고,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았고, 많은 사람이 그를 떠나서 외로운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도 바울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소명 의식과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도 그러한 소명 의식을 갖기를 원했다.
 
 
 
1.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를 부르심(9절)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 말한다. 하나님이 바울과 디모데를 복음 사역자로 부르신 것은 그들의 행위에 따라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은혜로 부르셨다. 자신의 행위에 따라 부름을 받았다면 그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다. 지금 바울은 갇혀 있고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님도 인간적으로 볼 때 자랑스러운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은 그 십자가의 복음과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면서 떠나버렸다. 예수님도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바울도 실패한 것 같고, 디모데도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면 지금 당하는 고난의 상황은 실패가 아니라 그의 뜻에 따라 된 일이고 성취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가 어려운 현실만 보고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을 보고 담대해지도록 인도하고 있다. 바울의 투옥이나 디모데가 두려워하는 현실이 자신들이 무능해서 실패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마땅히 일어날 일이었고 심지어 은혜였다면, 디모데는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2.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은혜의 복음(10절)
바울은 이제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설명한다. 복음의 위대함을 깨닫는다면 그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받는 것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계획하신 구원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 드러났다.
 
그러면 지금 우리 눈앞에 있는 이 복음은 무엇을 드러냈는가? 사망을 멸하고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을 드러냈다. 사망을 멸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죽음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한다는 뜻이다. 사망이 멸망한 결과로 영원한 생명이 드러났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셨다. 예수의 죽음만을 바라보고 부활하심을 보지 못하면 복음을 부끄러운 것으로 여길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바라본다면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영광스러운 것이 될 것이다.
 
디모데는 이 복음의 실체를 정확히 깨닫고 부끄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3. 바울은 복음의 일꾼으로 세움 받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음(11~12절)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광스러운 복음을 선포하는 자로 세움받은 것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말한다.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움을 받았다(11절)”라는 것은 자신의 사명에 대한 바울의 자부심을 드러낸다. 바울은 감옥에서 외롭고 쓸쓸한 가운데 있으나 복음의 선포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것에 대해서는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이와 같은 고백은 자신을 부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잘 알고 있으므로 가능하다. “내가 믿는 자를 내가 안다”라는 것은 하나님은 결코 자신을 부끄럽게 하실 분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는 뜻이다. 바울이 의탁한 것을 그날까지 능히 지키실 것을 확신하고 있다. “내가 의탁한 것”은 아마 죽음을 앞두고 바울이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의 손에 맡겼다는 뜻일 것이다. 이는 10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바울의 생명을 썩지 아니할 것으로 지켜주실 것임을 확신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있었기에 바울은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죽음조차 바울을 두렵게 할 수 없었는데,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망의 권세를 멸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나타나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4.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것(13~14절)
바울은 이런 자기 모습을 디모데가 본받기를 원했다. “내게 들은 바 바른말을 본받아 지키라”는 것은 바울이 선포한 복음을 지키라는 뜻이다. “바른말”이라는 표현은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을 염두에 둔 것인데, 반대자들의 가르침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지혜롭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속이는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바른 진리의 말씀은 오직 바울이 선포한 복음밖에 없다.
 
또 바울은 자신이 복음을 가르친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과 사랑으로 한 것이라고 말한다. 이미 7절에서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는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영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짓 교사들은 사랑으로 가르치지 않는다. 그들은 겉으로는 경건한 척하지만, 사실은 교만하고 비방하고 거역하며 무정하며 모함하는 자들이다(딤후 3:2~5).
 
14절에서 바울은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고 권면하면서 복음이 얼마나 선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상기시키고 있다. 복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복음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을 지키는 것은 단지 인간의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가능하다.
 
 
 
5.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삶(15~18절)
마지막으로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것과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에 대한 실례를 소개한다. 디모데가 어떤 예를 쫓아야 하는지는 분명하다.
 
먼저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그를 버리고 떠나버린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이다. 바울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버렸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부겔로와 허모게네를 거론한다.
 
반면 감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찾아와준 사람도 있었다. 오네시보로는 에베소 출신이면서 로마까지 와서 바울을 만나려고 했다. 하지만 감옥에 갇힌 바울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찾아서 바울을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다. 바울은 그러한 오네시보로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다.
 
이제 디모데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분명해졌다.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않았고 또 자신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지도 않았으며 도리어 열심히 찾아 만났던 것처럼, 디모데도 그리스도의 복음이나 그 복음을 위해서 고난을 마다하지 않은 바울을 그렇게 대해야 한다. 디모데는 마음속에 있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담대하게 바울이 전한 복음을 선포하고 지켜야 한다. 바울이 걸어간 길이 곧 그의 길이 되어야 한다.
 
바울을 부끄러워한 것은 사실상 복음을 부끄러워한 것이고 그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부끄러워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바울 자신에 대한 돌봄이나 관심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라 디모데가 바울이 전한 복음과 그리스도를 어떤 상황에서도 따르고 신뢰하라는 격려이다.
 
 
 
나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히 살게 하시려고 부르셨다(9절). 이는 우리의 행실이나 소원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두신 하나님의 뜻과 은혜로 된 것이다. 내가 구원받은 것이 어느 날 우연히 어떤 사람을 통해 이뤄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이루신 것이라는 사실에 감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깊이 묵상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으라”라고 한 이유를 설명한다.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주신 은혜를 따라 우리를 거룩한 구원으로 부르셨기 때문이다. 이제 그 은혜가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나타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로 사망을 폐하시고 생명과 썩지 않을 장래의 부활을 환히 보여 주셨다. 바울에게 이 복음은 그것을 위하여 죽고, 그것을 위하여 살 만큼 가치 있는 것이었다. 그에게는 곧 생명의 길이었다. 바울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이 죽음의 고난이 기다리는 길로 초대한 것이다.
 
-바울은 복음의 선포자, 사도와 교사로 살다가 옥에 갇혀 죽음을 앞두고 있다. 하지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복음의 영광을 알았고 자신이 의뢰하고 있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승리의 그날까지 자신에게 맡기신 것(복음)을 지켜주실 것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을 본보기로 삼아 바른말을 꼭 붙잡되 믿음과 사랑으로 하고 아름답고 참된 복음의 진리를 지키되 성령을 의지하여서 하라고 권면한다. 믿음과 사랑이 있을 때 복음 증거가 나의 의나 자랑이 되지 않으며 성령을 의지할 때 고난 중에도 타협하지 않고 인내할 수 있다.
 
-바울은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11~12절). 자신의 복음 전파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른 거라는 확고한 정체성과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이 넉넉히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정확히 알고 자신의 사명을 깨닫는 자는 두려움 없이 사역에 임할 수 있다. 내가 혹시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만 집중해야 한다.
 
-감옥에 갇힌 바울이 부끄러워 떠난 자가 있고, 남아서 고난에 동참한 자가 있었다. 복음이 주는 영광만 기대하고 고난은 외면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긍휼의 사람 오네시보로는 에베소뿐 아니라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도 바울을 방문하여 기운을 북돋아 주었다. 흔히 성공한 사역자에게만 찬사를 보내기 쉽다. 복음을 위해 애매한 고난을 당하고 사역이 중단되는 고통을 겪는 분들을 찾아보자. 그들에게 나는 어떻게 오네시보로가 될 수 있을까?
 
-바울은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반드시 전해야 할 복음의 영광스러움을 증거한 후 디모데에게 이 복음을 위해 살 것을 강력하게 요청한다. 이 복음은 오늘 우리뿐 아니라 우리 후손들도 반드시 지켜 나가야 할 바른 말이요 아름다운 것이다. 나는 이 복음을 부탁할 사람이 있을까?
 
 
 
*주님, 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내게 부탁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자랑스러워하며 이 복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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