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26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깨끗한 그릇”으로 쓰임을 받고 가르치기를 잘하는 종이 되라고 권면했다. 이제 거짓 교사들의 잘못된 가르침과 행태에 대해 폭로한다. 디모데는 그들이 어떤 자들인지 정확하게 파악하여 그들로부터 자신과 성도들을 지켜야 한다.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은 불의한 행위를 동반했다. 그들은 말과 종교적인 행위에 있어서는 경건한 것처럼 행동했지만 실상 불의하고 악한 자들이었다. 그들이 교묘하게 자신들의 불의를 속이기 때문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그들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속아 넘어간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정체가 오래가지 못하고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1. 마지막 때에 일어날 불의한 일들(1~5절)
1절은 종말에 대한 예언이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종말의 시대의 특징을 “고통의 때”로 묘사한다. 종말의 시대에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유대적 전통뿐만 아니라 신약성경에도 설명되어 있다. 그렇기에 만약 지금이 종말의 시대라면 그리스도인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종말의 때가 “곧 이를 것이다”라고 미래 시제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매우 임박한 것이어서 이미 종말의 시대가 시작된 것과 같다.
2~4절은 종말의 특징인 여러 불의한 일에 관해서 설명한다. 모두 열여덟 개의 악을 열거한다. 안타깝게도 이는 모두 에베소 교회가 당면한 문제들이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한 불의한 행위로부터 돌아서라고 명령한다. 여기에서 “돌아서라”라는 명령은 현재 시제이다. 종말이 현재적인 실재지만, 미래 시제로 표현한 것은 종말의 특징인 불의한 일들이 앞으로 갈수록 더 심해질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디모데가 현재 경험하는 불의와 고난은 지금이 종말의 때라는 증거이다. 그러나 종말의 때가 완전히 도래한 것은 아니며 앞으로 더 큰 고통의 때가 올 것이다.
종말의 특징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신앙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사랑의 대상은 하나님과 이웃이다. 그러나 불의한 자들은 이기적인 자기 사랑에 집착하여 하나님과 이웃 대신 자신과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과 돈에 대한 사랑은 “자기 자랑과 교만”으로 표현된다. 다른 이들을 무시하고 자신을 드높이는 자랑과 교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자주 경고하신 대표적인 불의한 행위이다.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것”도 이기적인 자기 사랑과 관련 있다. 이기적인 자기애는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부모를 거역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감사하지도 않고 거룩하지도 않은 것”은 하나님을 향한 불의한 태도이다. *불의한 자들의 특징은 자신을 향하여서는 자랑과 교만으로, 다른 사람을 향하여서는 비방과 불순종으로, 하나님을 향하여서는 감사하지 않고 거룩하게 행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난다.
3절의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불의가 말의 비방을 넘어 악한 행위로 표출되는 것을 의미한다. 무정함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가져야 할 자연스러운 사랑의 마음조차 상실한 악한 마음을 가리킨다.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사탄적인 본성을 가진 타락한 마음을 가리킨다. “모함하며”라는 단어는 2:26의 “마귀”라는 단어와 동일하다. 마귀의 특징이 속이고 모함하는 것이다. 절제하지 못하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특히 성적인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6절). “사나운 것과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은 불의한 자들의 난폭하고 악한 본성을 말한다. 이러한 성격은 결코 지도자의 자질이 아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온유함으로 거역하는 자들을 가르치라고 했다(딤후 2:25).
4절의 “배신하며 조급한 것”은 사려 깊지 못하고 인내하지 못하는 것이다. “자만하고 쾌락을 사랑하는 것”은 2절에서 말했던 자기 사랑과 교만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다. 특히 사랑의 대상이 여기서는 하나님 대신 쾌락으로 등장한다. 인간은 무엇인가를 사랑하며 살게 되어 있다. 그러나 무엇을 사랑하느냐에 따라 거룩하고 경건한 자가 될 수도 있고, 불의하고 악한 자가 될 수도 있다.
5절은 종말의 특징인 위선적인 신앙에 대하여 언급한다. 2~4절에서 언급한 모든 악의 목록을 행하는 자들을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로 규정한다. 이는 거짓 교사들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러므로 위에서 언급한 악의 목록들은 거짓 교사들의 불의함을 드러내는 증거들이다. 거짓 교사들은 경건의 모양으로 불의함을 감추고 있다. 겉으로 드러내는 말과 행위는 아주 종교적이고 경건한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의 속에는 복음의 진리가 없다. 바리새인들처럼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위선자들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러한 사람들로부터 돌아서라고 명령한다. 이는 지금 디모데도 조심하지 않으면 그러한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된다.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위선적인 신앙은 특히 목회자들이 빠지기 쉬운 대표적인 불의이다.
2. 불의를 행하는 거짓 교사들(6~9절)
바울은 이제 직접적으로 에베소 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짓 교사들의 불의한 행위 중 한 가지를 지적한다. 그것은 성적인 욕구를 절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6~7절에서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간다는 것은 거짓 교사들의 속이는 특징을 묘사한 것이다. 겉으로는 성도들을 돌아보기 위해서 방문하는 척하지만, 사실은 다른 목적을 위해서 몰래 들어가는 도적과 같은 자들이다. 그들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혹하기 위해 몰래 들어간다. “어리석은 여자”는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여인을 가리킨다. 바울은 이미 디모데전서 5:11~15에서 정욕적인 젊은 과부들에 대해서 말했는데, 어리석은 여자는 이런 여자들을 말한다. 이런 여자들은 오랫동안 정욕으로 인해 음란의 죄를 지어온 여자들이다. 그들은 죄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아무리 배워도 진리를 잘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여자들이다.
8절은 진리를 대적하는 거짓 교사들을 얀네와 얌브레에 비유한다. 얀네와 얌브레는 모세를 대적했던 애굽의 술사들이다. 모세는 하나님이 보낸 자이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마찬가지로 바울과 디모데는 하나님의 종이지만, 거짓 교사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일 뿐 결코 복음의 사역자들이 아니다. 디모데와 에베소 교회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의 이러한 정체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그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며 마음이 부패하여 믿음을 저버린 자들이다.
9절에서 바울은 마지막으로 이런 거짓 교사들이 결국 오래지 않아 멸망할 것임을 확신한다. 얀네와 얌브레처럼 거짓 교사들도 불의한 정체가 곧 드러날 것이다. 비록 지금은 거짓 교사들이 득세해서 많은 성도에게서 인기를 얻고 있을지 몰라도, 오래지 않아 버림을 받고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지금 거짓 교사들 때문에 고통당하고 있는 디모데에게는 희망적이고 격려가 되는 말이다. 따라서 디모데는 거짓 교사들의 일시적인 성공을 보면서 너무 실망할 필요가 없다. 믿음으로 인내하면 결국 진리가 거짓을 이기는 것을 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종말은 끔찍할 만큼 고통의 시대이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좀 더 편하게, 좀 더 성취하고 누리며 살겠다고 애쓰지만, 돌아오는 것은 위장된 만족이요 남는 것은 고통뿐이다. 나누지 않으면 모자라는 세상이기에 다른 이들의 고통을 등에 업지 않고는 누릴 수 없는 쾌락이다. 그 속에서 신앙인답게 살려고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고난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일부다. 따라서 고난 없는 삶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우리를 새롭게 지으시는 하나님의 새 창조 역사를 깨닫고 믿음으로 참여하는 것이 참된 복이며 생명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종말은 경건을 꾸미는 시대이다. 그리스도인이 멀리해야 할 종말의 삶의 방식은 모든 관계를 희생하면서까지 자신과 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자기 쾌락을 더 사랑하는 것이다. 돈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고 사람과 자연, 심지어 하나님보다 돈과 쾌락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복음에서 멀어지고 경건을 훼손하는 이 세상의 모습이다. 또 진리를 떠난 자의 두드러진 점은 “교만”이다. 하나님께 대한 교만이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드러난다.
-진리에서 떠난 자는 참가치를 거부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상식과 덕으로 여기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기 부정과 희생과 섬김을 통해 훨씬 더 높은 차원의 기름지고 선한 관계를 맺는 존재들이다. 진리의 공동체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도 진리를 외면하면 거짓과 위선이 자연스레 스며든다. 십자가에 순종하는 삶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참 능력을 그럴듯한 분주한 활동으로 흉내만 내게 되는 것이다.
-종말은 미혹의 시대이다. 에베소 교회 안의 어리석은 일부 여인들은 욕심을 자극하는 거짓 교사들의 미혹에 넘어갔다. 그들은 “항상” 배웠지만, 그들 안에 가득 찬 욕심이 진리가 열매를 맺지 못하도록 막았다. 단호하게 인간의 욕심을 지적하고 자기중심성을 버리도록 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더 자기 확신이 강한 위선자를 만들어내는 데 그칠 것이다.
*바울은 마지막 때의 증상들을 그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영적, 사회적 상태가 얼마나 심각하게 타락했는지 설명하면서 에베소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경고한다. 먼저 이 세상이 영원하지 않고 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1절). 우리가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때의 현상에 대해서는 알 수 있다. 마지막 때에는 고통이 닥쳐온다. 말씀으로 미리 경고를 받은 대로 기억하여 고통의 때를 이겨야 할 것이다.
*말세의 고통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이다(2~4절).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말씀을 거부하며, 오직 자기만을 사랑하므로 사람들의 삶이 갈수록 고통으로 치닫게 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자기 자신을 떠받들고 허풍과 거만으로 거들먹거리는지 모른다. 부모와 권위자들에 대해서는 또 얼마나 냉소적인 태도로 무시하는지 모른다. 바울이 말하는 이런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세상 속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과연 우리는 이런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답게 세상 사람들과 선명한 차이를 내며 살고 있는가?
*종말의 때에 나타나는 또 중요한 특징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양을 갖추는데, 그들의 삶에는 그리스도와 일치되어 드러나는 변화가 없다는 것이다. 즉, 교회에 출석하고 예배를 드리는 것과 같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일상에서 다시 자기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느라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다.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서 단호하게 돌아서라고 명령한다. 우리는 어떤가? 누구에게서, 어디에서 돌아서야 할까?
*경건의 모양만 있고 능력은 없는 거짓 교사들은 교활한 의도로 이집 저집에 몰래 들어가 성경을 가르친다. 주로 그들의 가르침에 넘어가는 자는 갖가지 욕심에 이끌려 죄에 빠져 있는 어리석은 여자들이었다. 거짓 교사들은 이처럼 죄책감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여자들의 약점을 파고들어 자신들의 목적을 성취한다. 오늘날에도 이와 같은 방식으로 성도들을 넘어뜨리는 이단이 성행한다. 진리의 말씀에 바로 깨어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은 죄 사함의 확신 위에 서 있지 않으면, 늘 말씀을 듣고 배우나 이처럼 넘어질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연약함은 오직 그리스도께만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주님, 종말의 때를 살고 있는 저에게 바울의 가르침이 마치 제 앞에서 말하고 있는 듯 생생하기만 합니다. 교회 안에 일어나는 여러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없는 불의한 모습들을 분별하고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깨우치겠습니다. 힘과 능력을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