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참담한 여호와의 명령에 담긴 타락한 이스라엘의 현주소 [호 1:1-11]
 – 2024년 11월 20일
– 2024년 11월 20일 –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가정을 이스라엘에게 주는 메시지로 사용하신다. 호세아의 결혼과 그의 세 자녀 이스르엘과 로루하마와 로암미는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메시지가 된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죄를 범했음에도 언약 관계가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긍휼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분의 긍휼은 이스라엘이 요청하면 언제나 주어지는 값싼 은총이나, 자식을 방종에 빠뜨리는 맹목적인 사랑이 아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라는 원초적인 신앙고백이 소중하기는 하나, 생명 없는 고백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보장할 수 없다.
    
    
    
1. 호세아에게 말씀이 임한 시대(1절)
호세아가 예언자로 부름을 받은 시대를 알려준다. 그런데 유다 왕 웃시야부터 히스기야 통치까지(주전 792-686년) 거의 100년이다. 북이스라엘 여로보암 2세 통치 기간은 40년이다(주전 793-753년). 전통적으로 호세아의 활동 시기는 여로보암 통치 후반(주전 787)부터 사마리아가 함락되기 전(주전 723)까지, 약 삼십 년가량이었다. “호세아”라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도와주셨다”이다.
    
    
    
2. 고멜과의 결혼과 자녀의 출생(2~9절)
2~3절의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는 여호와의 명령은 충격적이다. “음란한 여자”는 우상 숭배에 물든 여자를 가리킨다. 구약성경은 자주 우상 숭배를 음란으로 고발한다. 여호와께서는 호세아의 비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당신과 이스라엘 사이의 뒤틀린 관계를 보여주신다. 호세아의 음란한 아내는 남편 여호와를 배반하고 애인과 음란을 즐기는 아내 이스라엘을 상징한다. 음란한 여자가 남편을 배반하고 정부와 놀아나듯 이스라엘은 신의를 저버리고 노골적으로 음란을 즐긴다. 이스라엘이 범한 음란은 2장에 의하면 가나안의 풍요 다산 제의를 가리킨다.
    
4~5절에서 고멜이 첫째 아들을 낳자,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로 짓게 하시고 그 의미를 해석해 주신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신다”라는 의미다. 또 갈멜 북쪽 평야 지대의 지명이기도 하다. 그 자체로는 축복의 소망을 담고 있으나 본문에서는 심판의 표상으로 사용된다. “이스르엘의 피”는 여로보암 2세의 증조부였던 예후가 오므리 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때 흘린 피를 가리킨다. 이를 통해 예후 왕조의 처음과 여로보암 2세 시대의 폭력적 연속성을 보여주는 표현이기도 하다.
    
여로보암 2세 시대의 폭력은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라 왕조를 세운 예후로부터 시작된 뿌리 깊은 죄악이었다. 즉, 예후 왕조의 폭력성이 여로보암 2세의 통치 시기에서 여호와께서 인내하실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음을 표현한 것이다. 이제 머지않아 여호와께서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시고 이스라엘 집의 나라를 폐하실 것이다. “그날에(5절)”는 4절의 “조금 후에”를 받는다. 심판의 시점이 언제인지는 감춰져 있지만, 이스라엘의 심판은 여호와의 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예후에 의해 많은 사람이 피를 흘렸던 “이스르엘 골짜기”를 여호와께서 전쟁 무대로 활용해 음란을 범한 이스라엘을 심판하신다. “이스라엘의 활을 꺾다”는 이스라엘이 전쟁에서 패배할 것을 시사한다.
    
6절은 여호와께서 둘째 딸의 이름을 “로루하마”로 짓게 하시는데 그 의미가 충격적이다. “그녀는 긍휼을 받지 못했다”라는 뜻의 저주받은 이름이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더 이상 긍휼히 여기지 않으신다는 표현이다.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이 없어진다. 여호와와의 언약 관계 안에서 누릴 수 있었던 긍휼(값없이 주어지는 애정과 돌봄과 축복)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된 것이다.
    
7절에서는 북이스라엘에서 긍휼을 거두셨으나 남 유다는 긍휼히 여겨 구원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달리 언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로 구원하겠고”라는 표현을 통해 남 유다가 언약 관계 안에 있음을 시사해 준다.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섬기는 한 유다는 하나님의 도움을 기대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은 군사력에 의지하지 않는다. 역사와 민족들의 운명을 주관하시는 여호와의 긍휼이 활과 칼과 말과 마병으로 중무장한 군대로부터 유다를 구원해 주신다.
    
8~9절은 셋째 아이 로암미에 대해 언급한다. 셋째는 “로루하마를 젖 뗀 후에”로 임신 시기를 특별히 언급한다. 당시에는 대략 삼 년 정도 아이에게 젖을 먹였기에, 심판이 최종적으로 확정되기까지 얼마간 기다림의 기간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즉, 구원의 문이 완전히 닫히기 전에 여호와께서 마지막 기회를 주시지만, 이스라엘은 이 기회를 붙잡지 않는다.
    
셋째 아이의 이름 “로암미”의 이름의 뜻은 “내 백성이 아님”을 의미한다. 이는 여호와께서 마지막 기다리시는 동안 이스라엘이 하나님으로부터 더 멀리 떠나갔음을 시사해 준다. 이스라엘은 멸망의 운명을 되돌릴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무시해 버린다. 기다림이 헛된 소망으로 끝나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단호하게 정리하시겠다는 의지를 보이신 것이다. 특히 “내 백성이 아님”이라는 의미의 로암미 이름에는 이스라엘이 출애굽 이전 단계로 되돌아감을 의미한다. 출애굽으로 시작된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언약 관계가 완전히 끝났다는 뜻이다. 출애굽에서 시작한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는 이스라엘의 음란이라는 암초에 걸려 좌초하고 만다.
    
    
    
3. 이스라엘의 회복과 축복(10~11절)
그러나 구속사와 언약 관계의 단절을 선언하셨던 여호와께서 멸망의 심판 이후에 새로운 출발이 있을 것을 약속해 주신다. 앗수르의 침략으로 이스라엘은 생존이 어려울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지만 끝장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주도하셔서 언약 관계가 회복되고 축복이 내려진다.
    
10절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후손의 약속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이다. 실현 가능성이 전혀 없어 보이는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후손의 약속이 그대로 성취된 것처럼 멸망한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약속도 마찬가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그분의 구원사적 개입을 기다리면 된다.
    
10절 하반절은 9절에서 선포된 심판의 극복을 선언한다. 이스라엘의 음란으로 깨졌던 관계가 다시 회복된다. “로암미”로 내치셨던 이스라엘을 다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로 인정하신다. 생명이 없는 우상을 섬기다가 죽은 이스라엘을 생명의 하나님께서 다시 생명을 주어 살리신다.
    
이렇게 구원받은 미래의 구원 시대는 유다와 이스라엘의 분열과 다툼도 끝난다. 한 우두머리 아래 다시 통합된다(겔 37:15~28). 다시 하나가 된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속한 의로운 지도자의 통치를 받게 된다. “그 땅에서부터”는 유배지를 가리키는 듯하다. 여호와께서 모세를 세워 바로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을 이끌어내셨던 것처럼, 포로로 잡혀갔던 이스라엘과 유다의 자손이 유배지에서 한 우두머리의 인도를 받으며 고향으로 돌아온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활을 꺾으신 심판의 장소(5절) 이스르엘이 축복의 장소로 바뀐다. 그때에는 이스르엘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하나님께서 이스르엘에다가 유배민을 옮겨 심으신다.
    
    
    
나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이기에 가장 강력한 나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떠난 이스라엘은 가장 음란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가장 번성하던 여로보암 2세 통치 시기에 가장 혹독한 심판의 메시지를 주신다. 정치, 경제적으로는 유례없이 부요하고 강했지만, 그 번성이 백성의 영적인 시야를 가리고 낯 뜨거울 만큼 음란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화려하고 부강한 번성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을 떠나는 음란에 빠지지 않도록 회개하고 지혜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부강했지만, 유례없이 악한 시대에 호세아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는다. 풍요와 번영을 축복으로 착각하고 부정과 불의를 일삼는 배역한 이스라엘을 향한 심판을 선언하신다.
    
-이와 같은 호세아 시대의 모습은 오늘날 장밋빛 복음이 무성하나, 회개와 심판의 소리는 잦아들고 성장과 성공의 소리만 난무하는 삶의 현장과 다를 바 없다. 지금 대한민국은 역사상 가장 부강한 나라지만,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가장 강력한 대항이 무성한 악한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렇다면 우리는 호세아 시대 하나님의 심판을 왜 두려워하지 않는 것일까?
    
-하나님을 배반하고 외도하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경고를 전하기 위해 호세아에게 바알 제의에 물든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라고 명령하신다. 호세아는 말이 아니라 삶 전체로 주의 메시지를 전하려고 결혼과 가정생활의 기쁨마저 포기해야 했다. 호세아의 가정(아내 고멜, 세 자녀 이스르엘, 로루하마, 로암미)은 이스라엘의 절망적인 영적 현주소를 알려주는 산 메시지였다.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명령을 호세아에게 명령하셨다(2절). 음란한 여인을 아내로 맞아 음란한 자녀를 낳으라는 명령은 선지자에게 윤리적으로나 제의적으로, 신학적인 전통과 사회적 관습 어느 것 하나 용인될 수 없는 명령이었다. 선지자에게는 너무도 가혹한 명령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명령을 통해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일그러진 관계에 있음을 보여주려 하셨다.
    
-하나님 편에서 이 정도로 “낯설게” 말씀하지 않으시면 안 될 만큼 이스라엘의 음란함은 심각하기에 그지없었다. 혹시 우리는 어떤가?
    
-음란한 여인이 낳은 세 자녀의 이름을 통해 이스라엘이 점한 죄의 결과와 하나님의 심판 의지를 보여주신다(3~9절). 피로 얼룩진 예후 왕조처럼, 우상 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은 머지않아 파국적인 운명을 맞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시며 이제 긍휼을 거두고 언약을 깨뜨린 그들과 결별하시겠다고 하신다.
    
-이처럼 죄를 버리지 않고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면서 안전한 미래를 기대할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을 떠나 부질없는 것만 좇던 헛된 삶을 멈추고 이제라도 궁색한 변명 그치고 죄를 실토하며 하나님께 돌아가야 할 것이다.
    
-회복의 미래를 약속하신다(10~11절). 칼과 병거보다 하나님을 의뢰할 때 전쟁의 위험에서 유다를 건져내 주시고 남과 북이 하나 되어 하나님의 통치 아래 거하는 회복의 그날을 주실 것이다. 하지만 음란한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 있고서야 영광스러운 회복과 구원도 있을 것이다.
    
-심판 이후 새로운 출발을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로 내쳐졌던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암미(내 백성)”으로 인정받는다. 심판을 거치며 음란이 완전히 걷히고서야 도래할 미래이다. 참된 회개가 다시 생명의 하나님이 주시는 회복을 맛볼 수 있다.
    
-모든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관계는 하나님의 용서와 은총에서 나온다. 언약을 기억하시는 하나님만이 인간에게 소망이 되는 이유다.
    
-지금 우리나라는 그 어느 때보다 부강하다. 우리의 문화를 전 세계가 열광한다. 전쟁 무기는 세계시장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한국교회는 더욱 하나님께 겸손하게 은혜를 구해야 하지 않겠는가! 칼과 병거, 경제가 우리를 책임지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선하신 돌보심의 손길이 이 나라를 지키신다.
    
    
*주님, 호세아 묵상을 통해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깊이 깨닫고 경험하게 해 주십시오.
*주님, 하나님을 떠난 음란한 백성을 단호히 심판하시되, 심판 이후 구원도 회개하여 돌이키는 백성에게 주시려고 준비하시는 사랑도 봅니다. 죄에 대하여 단호하고, 심판 이후 회복의 은혜를 준비하시는 사랑을 의지하며 오늘의 걸음을 믿음으로 걷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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