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께서 고발인과 재판장의 자격으로 이스라엘의 음란을 고발한다. 본문은 전체적으로 알레고리적 은유에 가까운 시 형태를 띤다. 여호와께서 남편으로, 이스라엘은 그분의 아내로 등장한다. 결혼 관계는 언약 관계를, 아내의 간음은 이스라엘에 의한 언약의 파기를 상징한다. 음란은 우상숭배를, 음란을 즐기기 위해 여자가 찾아가는 애인들은 가나안의 신인 바알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경건은 물질적이고 이기적이었다. 그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보이는 경건의 목적은 풍요의 확보에 있었다. 이들에게 하나님은 풍요와 축복의 신이었다. 즉, 풍요를 제공해 주는 신이 곧 그들의 하나님이 되었다.
1. 너희는 “암미”이자 “루하마”다(1절)
여호와와 이스라엘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이름인 “로암미(1:9)”와 “로루하마(1:6)”가 구원 시대의 이스라엘에게 적용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적대적 관계를 청산하고 화해의 길로 나설 것을 명령하신다. 이제 이스라엘과 유다는 서로에게 “내 백성(암미)”이,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루하마)”가 되어야 한다.
호세아와 고멜의 결혼은 이스라엘의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반역과 음행을 고발하는 상징 행위였다. 이는 언약 백성의 죄악에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의지 표명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돌연 회복을 선언하셨다(1:10-11). 그리고 본 구절에서 그 회복을 내다보는 또 다른 선언이 이어진 것이다. 고멜이 낳은 아들과 딸이 로암미(내 백성이 아니다)와 로루하마(긍휼이 없다)였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이름을 빗대어 이스라엘의 심판을 경고하셨으나 동시에 자기 백성의 지위를 회복시키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자기 백성에게 버림받고 상처받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배신한 백성을 용서하고 다시 끌어안으시는 사랑을 보이시는 것이다. 인간의 사랑은 편협하나, 하나님의 사랑은 그 편협함을 가뿐히 뛰어넘으신다.
2. 하나님의 고발과 경고(2~5절)
2절은 하나님의 고발(소송)이다. 여자의 음행은 이혼의 충분조건에 해당한다. 그런데 남편은 이혼을 통지하지 않고 결혼 관계가 깨졌다고 말한다. “그는 내 아내가 아니요 나는 그의 남편이 아니라”라는 이혼 선언이 아니다. 통상적인 결혼 양식(그는 내 아내요 나는 그의 남편이라)을 부정문으로 바꾼 것이다. 즉, 혼인 관계를 파기하고 음란을 범한 아내의 배반을 고발하는 표현이다. 즉, 아내의 간음에도 불구하고 혼인 계약이 유지되기를 바라는 남편은 아내에게 계약당사자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더 허락한다. 그래서 여자는 얼굴과 유방 사이에서 음란과 음행(이방 제의에 속한 표지)을 몸과 마음에서 제거해야 한다. 결혼 관계가 지속되려면 여자는 풍요 제의의 음란에서 벗어나야 한다.
3~4절은 남편의 이런 간절하고 단호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음란과 음행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여자는 혹독한 처벌에 넘겨질 것을 경고한다. 매어나서 버려진 아이처럼 될 것이다(참조_겔 16:4~8). 세상에 막 태어난 아이가 부모의 보호를 받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처럼 여자도 남편에게서 받았던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보호(참고_출 21:10)를 다 빼앗기고 세상에 홀로 버려진다. 여호와의 긍휼을 빼앗긴 이스라엘은 죽음에 넘겨진다. 비옥하던 가나안 땅은 황폐하여져서 광야처럼 식물이 자랄 수 없는 메마른 땅이 될 것이다. 이처럼 이스라엘이 음란을 떠나지 않고 우상들과 놀아난다면 여호와께서는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도록 땅을 파괴하여 황무지로 만드실 것이다.
4~5절은 경고의 말씀에 이어 다시 이스라엘의 음행을 고발한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은 가나안 사람들이 풍요 다산 제의를 주관하는 신으로 숭배하는 바알들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이 애인들을 쫓아갔을 때는 물론 이유가 없지 않았다. 애인들이 먹을 것과 마실 것과 입을 것을 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주신 것임에도(8절), 이스라엘은 이를 애인들의 선물로 돌린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 가나안 땅의 결실과 축복은 여호와의 선물이 아니라 바알들과 놀아난 값이었다. 떡과 물은 생존에 기본적인 물품이고, 양털과 삼은 각각 겨울옷과 여름옷을 짓는 소재였다. 기름은 음식을 만들 때뿐만 아니라 화장품과 의약품으로도 당시에 사용되었다. 술은 포도주나 독주를 가리킨다. 이런 것을 애인들이 준다고 굳게 믿었다.
3. 하나님의 판결(6~13절)
6~7절에서 여호와께서 음란을 치유하시기 위해 이스라엘을 징벌하시기로 하신다. 하나님은 여자가 애인을 찾아가지 못하도록 가시와 담으로 길을 막아 방해하신다. 땅을 폐허로 만들어 이스라엘이 바알 제의 장소에 찾아갈 수 없게 하신다. 풍요를 바라면 열심히 바알들을 숭배한 결과는 모든 거주지와 경작지의 파괴뿐임을 분명하게 보여주신다. 여자들은 황폐해져 가는 땅을 보면 도와달라고 애인들을 찾아보지만, 누구 하나 응답하지 않는다. 여자가 수치를 다해도 아무도 나서서 보호해 주지 않는다. 함께 열심히 음란을 즐기던 자들이 모두 사라지고 여자만 절망 가운데 홀로 남겨진다. 여자는 더 이상 애인들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절망적으로 확인한 후에야 처음 남편에게로 돌아간다. 여호와께 돌아가려는 이스라엘의 의도는 다분히 현실적이다. 남편과 함께 살았던 “그때의 형편이 지금보다” 좋았기 때문이다. 비참하게도 풍요와 번영의 박탈이 돌아감의 일차적 동기가 된다.
8절은 진정한 풍요를 누가 주관하는지를 밝힌다. 땅의 결실이 여호와의 축복임에도 이스라엘은 이를 깨닫지 못하고 우상숭배의 결과로 돌렸다.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가나안 땅에서 생산되는 가장 기본적인 농작물로 땅의 모든 소출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께서 더하여 주신 은과 금을 땅의 풍요를 주관한다고 믿는 우상들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 사용했다.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은 이스라엘의 배은망덕과 무지를 신랄하게 고발하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금과 은은 가나안 땅에서 거의 생산되지 않는 바알의 축복에 속하지 않는 귀금속이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바알들의 능력 밖에 있는 금과 은을 넘치게 주셨으나 이스라엘은 이마저도 바알들에게 바친 것이다. 이스라엘은 금과 은을 주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9~10절은 여호와께서 풍요와 번영을 바알의 선물로 돌리는 이스라엘을 징벌하신다. 이스라엘의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셨던 여호와께서 이제 당신 것을 다시 빼앗으신다. 곡식이 무르익어 소출을 거두고 여문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 때(가을의 수장절(초막절)을 앞두고 풍요의 기쁨에 들떠 있을 때) 여호와께서 곡식과 새 포도주를 빼앗아 가신다. 농작물뿐만 아니라 의복을 만드는 데 필요한 양털과 삼도 빼앗긴다. 벌거벗겨져 수치를 당한다. 우상숭배의 간음을 범한 이스라엘이 멸망에 떨어진다. “내 곡식, 내 새 포도주, 내 양털과 내 양(소유대명사)”은 5절에서 애인 바알에게 준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로 착각하는 여인에게 주는 분명한 답변이다.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빼앗긴 뒤에야 땅 소산의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 것이다. 남편이 여자를 발가벗겨 간음을 즐긴 애인들의 눈앞에 그 수치를 드러내지만, 한때 여자의 벌거벗음을 즐겼던 애인들은 바라만 볼 뿐이다.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헐벗게 만들어 징계하실 때 이스라엘이 애써 쫓아다녔던 바알들의 무능력이 극적으로 드러난다.
11~13절에서 이스라엘은 땅의 소산을 모두 빼앗기기에 일상적인 삶뿐만 아니라 제의도 파국을 맞는다. 땅이 열매를 맺지 못하기에 절기가 돌아와도 축제를 즐길 수 없고, 제물로 드릴 것이 없기에 제사를 드리지 못한다. 모든 명절(절기, 월삭, 안식일)이 폐하여졌기에 즐거움도 사라진다.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 임할 징계의 심판은 삶의 토대가 뿌리째 뽑히는 파국적 형벌이다. 여호와께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자라던 과수원을 수풀로 만들어 들짐승의 차지가 되게 하신다. 과수원을 보호해 주던 돌담이 허물어지고 가시덤불로 뒤덮인다. 바알 숭배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의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주기는커녕 땅의 황폐함만 초래한다. 이스라엘은 “절기와 월삭과 안식일”에 여호와께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하지만, 이스라엘의 명절은 바알의 명절에 불과했다. 여호와께 드려져야 할 예배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바알에게 드려졌다. 이스라엘의 혼합주의적 우상숭배에 여호와께서 징벌로 응답하신다. “귀고리와 패물”은 제의와 관련된, 부적처럼 주술적 기능을 갖는 장신구를 가리킨다(참조_출 33:4~6).
나는?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긴 이스라엘을 끝까지 설득하고 돌이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한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이 사랑을 외면한다.
-회복의 날에는(1:10~11) 서로 반목하며 투기하던 유다와 이스라엘도 서로 용납하여 “여호와의 백성”으로 인정하게 하실 것이다(1절). 하나님의 사랑(긍휼)이 자기만 선민이라고 주장하던 그들의 배타적인 생각을 허문 것이다.
-나는 ‘로암미’에서 ‘암미’로, ‘로루하마’에서 ‘루하마’가 되는 은혜를 입은 자인가? 우리 공동체를 이렇게 부를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진실한 공동체를 향한 우리의 몸부림을 헛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다.
-죄를 드러내고 좌와 싸우며 반드시 그 죄를 제거해야 한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하며 감춰 놓은 죄를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낱낱이 들추어내야 살 수 있다. 아직 “로루하마”란 말이 떨어지기 전에 회개하여 “루하마”라는 음성을 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은 음란한 길에서 돌아오기를 바라신다(2~4절). 그래서 이혼을 통보하지 않고 ‘세 번’에 걸쳐 이스라엘의 배반을 고발하신 것이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음란하고 음행을 범했지만, 음녀의 삶을 버리고 돌아오면 받아주겠다고 하신다. 그렇지 않으면 더 이상 남편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신다. 교회의 변질을 참지 못하시는 하나님이 이 시대의 교회를 보시고 혹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하실까 두렵지 않은가?
-이스라엘은 도저히 하나님의 아내로 받아들일 수 없을 만큼 음란했고 음행했지만, 남편 하나님은 다시금 창기의 삶을 청산하면 받아주겠다고 하신다. 하지만 바알을 떠나지 않으면 수치를 당하게 하실 것이다. 광야와 마른 땅에서 목말라 죽게 하심으로써 참된 번영은 바알이 아니라 여호와에게서 나옴을 알게 하실 것이다. 우리의 삶에서 음행(우상숭배)을 제하라!
-이스라엘은 남편(하나님)이 아니라 애인(바알)에게서 풍요를 구한다. 하지만 그들의 음란을 차단하고 결혼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친히 가시와 담으로 그 길을 막으신다. 그들이 열심히 쫓아가지만 미치지 못하고 애써 찾아보지만 만나지 못하게 하신다. 이렇게 해서라도 “본남편”인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바라신다. 아!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닌가! 이 사랑을 진정으로 깨달았다면 적어도 지금과 달라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세상에 마음을 빼앗겨 그것을 따라가는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수치를 안다면 수치 당할 일을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것이다.
-먹을 것(떡, 물)과 입을 것(양털, 삼)과 사치품(기름, 술)을 제공한다는 말에 사랑하는 자(바알)를 앉아 기다리지 않고 적극적으로 찾아 나선 이스라엘의 죄를 고발한다(5절). 음란으로 행하는 길을 막고 담을 쌓아 따라가도 못 만나고 찾아도 못 찾게 하실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본 남편”인 자신에게 돌아오게 하겠다고 하신다. 우리를 절대 포기하지 못하시겠다는 주님의 마음이 찬란하게 놀랍지 않는가! 그 사랑을 깨달은 음란한 여인이 본 남편에게로 돌아가리라는 고백이 절로 나오지 않겠는가!
-이스라엘의 배은망덕을 책망하신다(8~13절). 그들은 땅의 결실을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바알이 준 “제의의 대가”로 여긴다. 이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주신 것을 도로 찾겠다고 하신다. 그들의 일상과 제의는 무너지고 즐거움도 사라지고 삶의 터전마저 황폐하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그들의 우매함과 바알의 무능함이 드러날 것이다. 구하기만 하면 주시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청종하지 않으면 주신 것을 빼앗기도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움에 묵상하지 않을 수 없다.
-이스라엘의 죄는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자신들의 복이 어디에서 왔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스라엘은 바알이 풍요와 결실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주신 복으로 몰래 바알과 연애에 빠졌다. 오늘 내가 누리는 것을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잊고 세상에 취해 산다면 분명히 모든 복을 거두실 때가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땅의 부요(곡식, 포도주, 기름)와 경제적 번영(은과 금),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를 바알에게 제의를 바쳐 얻은 대가로 여겼다. 여호와는 그것들을 다 빼앗으심으로써 원 주인이 누구인지 알게 하신다. 바알 숭배의 온상이던 절기들도 폐하시고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외도한 날만큼 수치를 당하게 하셔서라도 돌이키게 하고 싶어 하신다.
*주님, 포기를 모르는 하나님의 사랑이 찬란합니다. 그 찬란한 은혜 안에서 오늘도 더욱 신실하게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하나님보다 바알을 좇는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스라엘의 악함이 오늘날 세속의 가치를 말씀의 가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는 우리와 다를 바 없음을 봅니다. 가시와 담으로라도 그 길로 빠지는 것을 막아주시는 주님의 사랑이 오늘 나의 삶을 지키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