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망징패조(亡徵敗兆)의 시대_제사장의 완악함과 나태함, 백성의 무지와 고집이 어우러져 [호 4:1-19]
 – 2024년 11월 23일
– 2024년 11월 23일 –
    
4장은 이스라엘의 범죄 사실에 대한 예언자의 신랄한 고발과 심판 신탁이 본격화된다. 1~3장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다룬 전체적인 모형이었다면, 4장부터는 구체적으로 아내 이스라엘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적나라하게 파헤치기 시작한다. 마치 법정에서 검사가 죄를 낱낱이 고발하고 증거를 제시하며 입증하는 과정처럼 진행된다. 하나님이 왜 이스라엘을 향해 책망과 심판을 실행되어야 하는지 일련의 일들을 체계적으로 낱낱이 고발한다. 이를 통해 이스라엘의 죄에 대해 분노한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선명하게 대비시킨다. 하나님께서는 이 과정에서 호세아를 자기 민족을 고발하고 탄핵하는 자로 세우신다. 그를 통해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과 법적 논쟁을 시작하신 것이다. 호세아의 등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촉구와 함께 시작된다.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일부에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다. 성소부터 산당까지, 제사장부터 일반 백성까지 모두 가나안의 풍요 제의에 빠져 음행을 즐겼다. 하나님 백성이라고 자처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심판에 떨어진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할 사명과 책임이 있는 제사장이 하나님을 잊고 속죄제물에만 마음을 둔 탓이다. 그 결과로 여호와와 바알을 구별하지 못하고 혼합주의에 빠져들었다.
    
    
    
1. 이스라엘을 고발하시는 하나님(1~3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진실도 없고 인애(헤세드)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다”라고 고발하신다. 진실은 신뢰에서 나오는 성실함으로 인애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인애가 없는 이스라엘은 더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출애굽에서 가나안 정착까지의 구원사와 시내산 언약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통해 이스라엘은 여호와와 사적 관계를 맺고 그분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진실과 인애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진 필연적 결과로 이스라엘은 폭력과 탐욕의 전쟁터가 된다.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피 흘림이 하나님 말씀의 자리를 대신한다. 진실도, 인애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기에 이스라엘에서는 가장 기본적인 계명조차 무시된다. 사욕을 채우기 위해서라면 이웃의 피를 흘리기에 주저함이 없다. 여호와의 언약공동체로 출발한 이스라엘이 이기적 탐욕과 폭력이 지배하는 동물적 사회로 타락한다. 이스라엘의 불의와 불법이 자기 파멸적 결과를 초래한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이웃의 피를 흘리기에 열심인 자들이 사는 땅은 저주받은 땅으로 생존에 필요한 열매를 맺지 못한다.
    
    
    
2. 제사장을 고발하시는 하나님(4~10절)
4절 하반절을 직역하면 “제사장아, 내가 너를 고소한다”이다. 이스라엘의 타락에 일차적 책임이 있는 제사장을 하나님께서 먼저 고발하신 것이다. 제사장은 일반 사람의 신앙생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종교 지도자였기에, 이들의 부패와 무능력은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 치명적이었다. 제사장이 고발당하는 이유는 율법을 잊어버리고(6B 절) 속죄제물에만 관심을 기울였기(8절)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고소하시기에 제사장이 실족한다. 제사장은 아무도 실족하지 않는 한낮에 헛디뎌 넘어지고 성전 소속의 예언자는 밤에 마찬가지로 넘어진다. 제사장은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해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상을 잘못 풀어 실족한다. 제사장의 징벌 선언에 앞서 하나님의 탄식이 나온다.
    
역설적으로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망한다. 제사장이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기에 백성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멸망의 위기에 직면한다. 하나님 백성을 죄악에 안주하게 만든 제사장에게 “동해복수법”의 원칙에 따라 심판이 선언된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기에 하나님께서 그를 버려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하시며, 제사장이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기에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를 잊어버리신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린 대가로 후손이 끊어져 집안이 완전히 멸망한다.
    
이스라엘에서 무섭고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제사장이 하나님을 버리고 그분의 율법을 잊었는데도 그 수가 더 많아진다(7절). 제사장이 율법을 가르치지 않았기에 백성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기에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죄 가운데 살기에 속죄할 일이 많아지고, 속죄를 위해 양과 소를 끌고 성소를 찾는 사람이 많아지기에 제사장의 수가 늘어난다. 죄를 매개로 종교 사업이 날로 번창하면서 제사장의 삶에 기름져진다. 악순환의 정점에 서있는 제사장에게는 백성이 죄를 지을수록 살림이 윤택해졌기에 차라리 저들이 죄를 많이 범하는 것이 더 좋았다. 급기야 백성의 죄를 먹고 사는 데 길들었기에 백성이 더 죄짓기를 열망한다. 8절 하반절의 “그 마음을 그들의 죄악에 두는도다”를 직역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목구멍을 저들의 죄를 향해 들어 올린다”다. 백성의 죄를 먹고 사는 데 길든 제사장은 백성이 죄를 범하기를 애타는 마음으로 기다린다. 죄로부터 멀리 떠나도록 백성을 가르치고 경계하기는커녕 차라리 죄를 짓도록 부추긴다. 하나님의 율법을 잊고 속죄제물만 탐하는 제사장에게 영화를 박탈하는 징벌이 선포된다.
    
제사장의 부패와 무능력이 백성의 죄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죄의 경중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죄를 범했다는 면에서는 제사장이나 백성이나 다르지 않다(9절). 백성으로서도 양이나 소를 드려 죄와 벌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제의적 속죄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잊고 살다가 속죄 제물로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훨씬 간편하고 경제적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언약신앙을 형식뿐인 제의 종교로 타락시킨 자들에게 준엄한 심판이 선포된다. 그들은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음행을 해도 자손이 번성하지 않을 것이다.
    
    
    
3. 이스라엘의 산당 제의와 이스라엘의 완악함(11~19절)
여호와 신앙이 가나안의 풍요 제의와 뒤섞이며 본래의 모습이 사라졌다. 가을 축제 때 가나안의 풍요 제의에 따라 새로 짜낸 포도즙과 포도주를 마시며 수확의 기쁨을 즐긴다. 포도주에 취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가나안의 신 바알과 동일시한다. 음란의 영에 마음을 빼앗겼기에 바알을 숭배하듯 여호와를 섬긴다. 여호와께 묻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라 할 이스라엘이 “자기 나무와 자기 막대기”에 신탁을 구한다. 자신들이 나무와 막대기에 신적 능력과 권위를 부여하고 그 나무와 막대기에 신의 의지를 물었다. “나무”는 추측건대 제단 곁에 세워져 있는 아세라 상이나 드라빔 같은 신상을, “막대기”는 작은 아세라 상 혹은 던져서 신탁을 구하는 막대기를 가리키는 듯하다.
    
역시 속죄 제물에 맛이 들인 제사장은 백성이 죄짓기만 간절히 바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는 백성은 혼합주의에 빠져 여호와를 버리고 가나안 풍습을 따라 신탁을 구한다. 13~14절은 풍요 제의의 일종으로 높은 산이나 언덕에서 거행되던 산당 제의를 고발한다. 가나안 종교에서 잎이 무성한 참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종종 신목으로 간주했다. 버드나무는 하얀 꽃의 향으로 유명했다. ‘나무 그늘’은 제사에 참여한 자들이 함께 음식을 나누며 축제를 즐길 수 있는 최적의 자리였다. 딸의 음행과 며느리의 간음은 산당에서 거행된 제의적 축제에서 일어날 수 있었던 윤리적 타락뿐 아니라 우상숭배 자체를 고발하는 비유적 의미도 담겨있다.
    
제사장의 무지와 부패가 백성을 타락시켜 혼합주의에 빠뜨린 것처럼 아버지와 시아버지의 음행이 그의 보호와 감독 아래 있는 딸과 며느리의 음행을 초래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바알을 숭배하면서도 이를 깨닫지 못하는 백성에게 멸망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된다. 호세아는 유다를 이스라엘에서 분리해 유다만이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권면한다(15절). 이는 이스라엘의 음행이 한계를 완전히 넘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호세아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이스라엘에게 음행에서 발을 멀리하도록 권면한다.
    
16~19절에서는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에서 떠나라는 호세아의 경고를 거절하고 고집 센 암소처럼 자기 길을 간다고 묘사한다. 이스라엘의 완강한 고집은 나름대로 이유가 없지 않았다. 목자 여호와의 인도를 받는 양 떼로 스스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우상과 연합했으면서도 여호와의 인도와 보호를 주장하는 이스라엘에게는 무지함과 완고함 가운데 살다가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여호와께서 산당 제의에 참여한 자들이 제의적 윤리적 음행을 즐기며 살도록 내버려두시는 것으로 이들을 심판하신다.
    
    
    
나는?
-하나님은 타락의 중심에 서 있는 제사장들과 음란한 영에 미혹되어 바알 숭배와 산당 제의에 빠진 백성의 죄상을 낱낱이 고발하시고 심판하신다. 하나님을 버린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버리셨다. 이스라엘은 언약 유지 조건인 진실과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렸다(1~3절). 그 결과 저주와 속임과 살인과 도둑질과 간음과 피 흘림이 가득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서로서로 파괴했다. 그러자 땅도 그들을 외면했다. 기근과 흉년이 왔고(땅이 슬퍼했다), 자연 생태계가 고통을 당한다. 하나님의 심판은 땅을 통해 이루어졌다.
    
-하나님 나라의 영적인 안전은 회심의 순간을 기억하는 것에 달려 있지 않고 일상에서 맺는 “열매”에 달려 있다.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진실과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버리고 거짓과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속임과 포악함이 가득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이라면 호세아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
    
– 도를 넘은 이스라엘의 패역함 때문에 땅과 모든 생물이 신음하며 고통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인간-땅”은 언약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내가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을 때 온 땅도 신음한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이상 기후, 자연 재앙과 역습은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결과임이 틀림없다. 하나님 나라 백성이 사는 땅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곳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땅,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땅을 가증한 땅이 되게 하는 데 제사장들이 앞장선다(4~10절). 백성을 의의 길로 인도해야 할 제사장이 도리어 부와 권력에 눈이 멀어 죄를 조장하고 만다. 그들은 대낮에도 넘어질 만큼 오만했고, 인자와 진실은 없었다. 사심과 사욕만이 그들의 마음에 가득했다. 백성의 탐욕을 부추기는 지도자, 지도자의 악행과 독선적인 행위를 눈감아주는 백성, 이 가증한 공생관계가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을 일으킨다. 하나님 앞에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전혀 없다면 지도자의 자리는 취하면 안 된다. 자신도 죽고, 민족도 죽는다. 교회도 쇠락한다.
    
-제사장이 지식을 버렸다. 하나님도 그들을 버리셨다. 지식 없는 백성들이 나온 것은 지식을 버리고 율법을 잊은 제사장들 탓이다. 대낮, 대로에서 넘어질 정도로 나태해진 그들의 타락은 종교가 번성할수록 되려 사회가 악해지는 기현상을 초래한다.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 심판은 분명했다. “그들의 영광을 욕되게 하시고 먹어도 배부르지 않고, 음행하여도 많은 자녀를 갖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 묻고 여호와의 뜻을 따라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풍요와 번영을 비는 이방 제사에 참여하여 신탁을 구하고 먹고 마신다.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그들은 무지하고 무사안일하고 무감각하다. 영적인 어떤 경계심도, 경각심도 없다. 진실한 목소리를 듣고서도 완강한 암소처럼 자기 길을 고집한다. 그러고도 자기 정당화, 합리화에 능하다. 기억해야 한다. 수치를 모르는 백성을 수치 한 가운데 두시는 것이 곧 하나님의 진노 심판이다.
    
-우상을 따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아무렇지도 않게 버렸다. 이스라엘은 바알에게 풍요를 비는 제의에 참석하여 먹고 마셨다. 나무와 막대기로 주술을 하였고, 산 위에서는 제사를, 나무 아래서는 음란한 의식을 벌였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따르는데 하나가 되었다.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고 고집 센 암소처럼 자기 길을 갔다. 경악스럽게도 그러면서도 자신들을 여호와의 인도를 받는 양 떼로 착각했다. 하나님의 심판은 자기도취적인 신앙 가운데 버림받은 그대로 두신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 사는 세상에 과연 진실이 존재하는지 자괴감이 든다. 지도자라는 이들이 하는 말이 대개 거짓이고 면피하기 급급하다. 진실을 찾아보기 힘들고 사랑은 메말랐다. 호세아의 시대가 영락없는 이 시대다. 교회는 많으나 신앙은 이미 자기욕망의 도구로 굳건하게 자리잡았다. 구원의 도구일 뿐 하나님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는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제사장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나에게 짓는 죄도 더 많아지니, 내가 그들의 영광을 수치로 바꾸겠다(7절_새번역)” 유구무언이다. “길갈로 가지 말라, 벧아웬으로 올라가지 말라(15절)”는 호소는 오늘날 한국교회에게 더 생생하게 경고하는 듯 하다. 길갈은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 곳으로 인간 왕을 세워 나라를 새롭게 하자고 외쳤던 곳이지만, 과연 사울이 나라를 새롭게 했던가? 벧아웬(죄악의 집)은 벧엘(하나님의 집)이 타락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성경을 제멋대로 이리저리 갖다 붙여 자기 목적을 이루는데 활용하는 전형적인 모습 아니겠나!
 
-이런 에브라임을 향하여 “내 백성이 나를 알지 못하여 망한다. 네가 제사장이라고 하면서 내가 가르쳐 준 것을 버리니, 나도 너를 버려서 네가 다시는 나의 성직을 맡지 못하도록 하겠다. 네 하나님의 율법을 네가 마음에 두지 않으니, 나도 네 아들딸들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6절_새번역)”라고 절규하셨다. 이런 한국교회를 향하여, 그 교회 안에서 목사를 하고 있는 나에게 오늘 호소하신다.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깨닫지 못하는 백성은 망한다(14절 하_새번역).” “에브라임은 우상과 한 패가 되었으니, 그대로 버려 두어라(17절_새번역).”
    
    
    
*주님, 목사인 제가 말씀을 얼마나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지 꾹꾹 다짐하게 됩니다. 성도들에게서도 바른 말씀을 따라 바른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결의가 필요함도 느낍니다. 무지와 고집이 패망으로 이끄는 것을 깨달았으니, 진실과 인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깨우치며 성실하게 순종하면 살겠습니다.
*주님, 분명하게 보이는 “망징패조(亡徵敗兆_망하거나 실패할 징조)”의 시대가 속히 끝났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힘써 알고 말씀을 깨달아 성실하게 살아내겠습니다.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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