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장은 곧 닥쳐올 재앙의 이유와 심판의 필요성, 그리고 심판의 결과를 예고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문제인 언약을 어긴 것을 지적하는데, 두 가지 문제에 초점을 둔다. 그것은 잘못된 예배와 정치다. 왕과 관료들의 그릇된 판단에 따른 정책과 추진을 우상숭배와 연결한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전쟁으로 인해 여러 나라들 사이에 흩어져 쇠락하고 능욕당할 것이고 끝내 그들의 신분은 조상들이 애굽에서 노예처럼 살던 때로 회귀하여 소멸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언약을 어기며 율법을 범하고도 이스라엘은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주장한다. 여호와를 안다면서도 여호와께 묻지 않고 왕을 세우고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든다. 여호와를 안다면서도 사마리아의 정치가들이 벧엘에 만들어 놓은 송아지를 하나님으로 섬긴다. 여호와를 안다면서도 여호와 대신 앗수르를 찾아가 도움을 구한다.
1. 선을 버린 이스라엘(1~3절)
본문은 이스라엘의 제의와 형식적 경건을 고발한다.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며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말하지만, 이스라엘은 이미 선을 버렸다. 여호와의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범한 이스라엘에게 원수가 독수리처럼 덮칠 것이다. 4~14절은 이스라엘이 버린 선(좋은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진술한다.
1절은 여호와께서 누군가에게 나팔을 불어 적의 침략을 경고하라고 명령하신다. 하지만 누가 침략하는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여호와께서 기업(상속재산)으로 주신 가나안 땅이 독수리의 사냥감처럼 적의 침략으로 유린당할 위험에 처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여호와의 집을 덮치는 독수리는 앗수르이다. 앗수르에서 독수리 표상은 자주 앗수르 신과 왕의 위엄이나 능력을 표현한다.
이스라엘의 위기는 이유가 없지는 않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와 맺은 언약을 어기고 그분께서 주신 율법을 거슬러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언약 준수의 의무를 위반하고 우상과 이방 민족을 섬긴 것이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이 언약을 어기며 율법을 범했다고 고발하시지만,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나의 하나님으로 부르며 자신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한다. 언약을 어기고 선을 버렸음에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한계와 위선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여호와는 곤경에 처해 부르짖으면 언제든지 개입하여 도와주시는 구원자였다. 이스라엘은 구원사에 관해서는 잘 알고 있지만, 언약 백성의 의무와 책임에 관해서는 무지했다. 언약을 어겼으면서도 언약 안에 있다고 믿기에 여호와의 징계가 이스라엘로 돌아오게 하는 열매를 맺지 못한다.
본문의 “선”은 하나님과 언약이 관련된 표현이다. 언약과 율법은 여호와의 구원 의지를 담고 있기에 “선”이다. 어리석은 이스라엘은 언약을 어김으로 좋은 것을 버리고 심판과 저주를 택했다. 그 결과 원수에게 쫓기게 된다.
2. 선을 버린 구체적인 예들(4~14절)
4~6절은 사람의 손으로 만든 왕권과 우상을 다룬다.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스라엘이 한 짓은 제 마음대로 왕들을 세우고 우상을 만든 것이었다. 왕들을 세운 것과 우상을 만든 것이 한 묶음으로 언급된다. 먼저 사마리아 왕궁의 권력투쟁을 신학적으로 고발한다. 왕을 세우는 일에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사마리아의 권력자들은 여호와께 물어보지 않고 당파적 이해관계에 따라 왕들과 지도자들을 세우고 폐했다. 이는 여로보암 2세 사후 사마리아 왕궁에서 거듭 발생했던 정변을 가리킨다.
정치에서 여호와의 역할을 인정하지 않은 사마리아의 권력 집단은 종교에서도 여호와를 배반하였다. 이들은 자기 은과 금으로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었다. 정치를 사유한 자들은 소유할 수 없는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만들어 신을 소유한다. 이스라엘이 알고 있는 여호와는 실제로는 우상에 불과했다. 5절의 “사마리아여 네 송아지는 버려졌는지라”라는 표현은 벧엘 제의를 경멸하려고 일부러 만든 표현이다. 벧엘의 송아지는 여호와와 상관없이 사마리아의 국가권력이 사마리아를 위하여 만든 송아지에 불과했다.
선을 버리고 이스라엘이 택한 송아지는 버려질 수밖에 없다. 심판을 되돌릴 수 없는 절망적인 현실에 하나님의 분노가 탄식으로 바뀐다. “그들이 어느 때에야 무죄하겠느냐?” 이어지는 6절은 사마리아의 정치권력이 국가 종교를 만들어 벧엘에 세운 송아지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만든 것이 아니다. 벧엘의 송아지는 하나님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난 장인의 작품에 불과하다.
7~10절에서는 강대국에 의존하는 정치를 고발한다. 여호와를 무시하고 우상숭배의 씨를 뿌린 사마리아의 정치와 종교는 멸망의 결실을 피할 수 없다. 바람의 씨를 심었기에 광풍의 열매를 거두고, 씨가 싹이 터서 줄기가 자라지만, 이삭이 없어 알곡을 맺지 못한다. 극히 일부가 열매를 맺을지라도 이스라엘은 이를 이방인에게 넘겨주어야 한다. *무익하고 헛된 것을 추구하는 이스라엘은 멸망과 죽음의 열매를 거둬야 한다.
이스라엘의 사망은 이제 확정됐다. 용도 폐기된 물건이 버려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이스라엘의 운명도 마찬가지이다. 멸망의 심판을 되돌리고 살아남기에는 너무 늦었다. 에브라임은 마지막까지 바람을 쫓는다. 무리에서 떨어져 혼자 남은 들나귀 신세가 된 에브라임은 자진하여 앗수르로 올라가서 선물을 바치고 사랑을 산다. 어리석게도 광풍과 같은 앗수르에 기생하여 목숨의 연장을 꾀한다.
“홀로 떨어진 들나귀”는 에브라임의 절망적 상황을 반영하는 비유다. 여호와를 무시한 동맹은 여호와의 진노만 돋을 뿐이다. 돈을 주고 앗수르의 사랑을 사서 살아남으려는 에브라임의 시도에 여호와께서는 징벌로 응답하신다. 뇌물과 조공으로 주변 나라들의 환심을 살지 모르지만, 확정된 멸망을 막지는 못한다.
11~14절은 여호와가 없는 희생 제사를 언급한다.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내용이 동맹 정치에서 예배로 전환된다. 에브라임은 선을 버리고 제의적 경건을 선택한다. 제단과 희생 제사로 언약과 율법을 대체했다. 에브라임은 죄를 멀리하고 여호와께 돌아오기보다는 제단을 만들어 지은 죄를 씻는 제의적 방법을 선택했다. 제단을 만들어 지은 죄를 씻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경건도 과시한다. 참담하게도 죄를 많이 범할수록 제단도 더 많이 세워진다. 여호와의 은혜에 속한 속죄가 그 원래적 의미를 상실하고 단지 제의 행위에 종속되고 만다. 에브라임이 곳곳에 만들어 놓은 제단은 범죄를 세탁하는 우상의 제단에 불과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어 우상숭배에 떨어진 에브라임은 제단 쌓기를 통해 여호와를 만날 수 있다고 확신한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은 이해할 수 없는 이방 언어와 다름없지 않았을까?
가나안적 풍요 제의에 익숙해진 에브라임에게 여호와의 기록된 율법의 가르침은 매우 이질적이었다. 바알에 친숙한 에브라임에게 차라리 여호와는 이방신과 다름없었다. 여호와의 말씀을 이상한 것으로 여기는 자들에게는 제사가 전부였다. 여호와와의 친교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제의에 참석한 자들의 친교가 중심에 놓였다.
여호와를 만나는 유일한 통로로 에브라임이 인식하고 있는 제사는 여호와에 의해 거절된다. 에브라임과 여호와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된 것이다. 이제 에브라임은 다시 애굽으로 가야 한다. 구속사 이전의 단계로 되돌아간다. 돌이키기 어려운 “로암미”가 되고 만다. 이스라엘과 유다는 왕궁과 견고한 성읍이 안전을 보장해 주리라 믿지만 허상에 불과했다(14절). 여호와께서 타오르는 진노의 불로 이스라엘과 유다를 공격하시기에 어떤 것으로도 방어할 수 없다.
나는?
-이스라엘이 “선”을 버린 구체적인 증거들을 제시한다. 언약을 어기고 율법을 이상히 여기며 하나님보다 헛된 것을 의지하는 그들을 향해 심판을 예고하신다.
-예고 없는 심판도, 이유 없는 심판도 없다. 언약을 위반하고 선을 버린 이스라엘을 향해 심판의 임박함을 예고하신다(1~3절). 그릇된 신념과 근거 없는 거짓 확신 속에서 자기가 만든 하나님을 자기 맘대로 믿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사는 이스라엘을 심판하실 것이다. 주를 안다고 아무리 외쳐도 선을 버린 그들을 외면하실 것이다. 말씀(언약)을 버린 그들을 하나님도 버리실 것이다.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한다. 하지만 “제대로” 알아야 한다.
-돌이켜도 잘못했으니 살려달라고 해도, 구해주지 않으신다. 적들의 침략을 당하여 “나의 하나님,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라고 부르짖어도, 언약을 어기고 선을 버린 이스라엘에게 원수들을 독수리처럼 보내실 것이다. 사람이 자기 뜻대로 세운 왕들과 지도자를 인정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안다고 고백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부정하신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는 허울뿐인 고백도 헛된 것이지만, 그런 고백이라도 늦어도 너무 늦게 고백하는 이스라엘이다.
-선(언약과 율법)을 버린 이스라엘의 악행은 주로 정치와 종교에서 나타난다(4~6절). 정치적으로는 자기 뜻대로 왕들을 세우고, 종교적으로는 자기를 위해 우상을 만든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반과 정변으로 권력을 차지한 자들을 인정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이 만든 송아지 우상을 깨뜨리신다. 그리고 분노를 자아내는 그들의 고질적인 죄악에 탄식하신다. 돈이든 지위든 권력이든 두 주인을 섬기는 자는 모두 우상숭배자이며, 그것은 분명하게 “악”이다.
-“우상숭배”와 “동맹”의 무익함을 일깨우신다(7~10절). 그들이 만든 우상은 수확의 능력도 보호의 능력도 없다. 주변 강대국이 하나님처럼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내어둘 리 없다. 그러니 우상을 통해 풍성한 결실을 기대하는 것이나 조공을 바치며 외세에 동맹을 구애하는 것은 모두 ‘바람을 심는’ 것처럼 어리석고 헛된 일이다. 더 쇠약해질 뿐이다. 헛된 것을 좇다가 하나님 백성의 존귀함을 잊고 허망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하나님보다 열강을 의지한 이스라엘을 광풍으로 쓸어버리실 것이다. 강한 나라들을 한 자리에 불러 모아 이스라엘을 공격하게 하실 것이다. 왕과 지도자들이 지워준 무거운 짐 때문에 쇠퇴하게 하실 것이다. 바람(헛된 것)을 심었고 자기 멋대로 떠돌아다니는 들나귀처럼 앗수르를 의지했고, 조공을 주고 그들의 사랑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런 에브라임에게 심판은 너무도 자명했다.
-이방과의 동맹을 통해 이방 제의에 익숙한 에브라임은 언약 조건인 율법에 순종하기보다 그것을 낯선 것으로 여긴다. 제의를 통한 풍요에는 관심이 있지만, 율법을 통한 변화에는 무관심하다. 그들은 화려한 왕궁과 요새화된 성읍이 안전한 번영을 보장해 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에브라임의 자의적이고 자기 만족적인 종교 행위는 더 많은 죄를 쌓고 더 큰 심판을 부를 뿐이었다. 하나님 없는 삶, 말씀을 떠난 삶에 남는 것은 심판뿐이지 않은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잊어버리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악을 기억하기로 하셨다. 애굽에서 건져서 자기 나라로 삼으신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이다. 율법에 순종하기보다는 그것을 낯선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많은 제단을 쌓아서 제물을 드렸으나 그만큼 죄는 더 많이 지었고, 하나님 대신에 견고한 성읍과 왕궁들을 많이 쌓아서 스스로 안전을 도모했기 때문이다.
*주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안약과 율법)”을 알고 그 거룩한 선을 따라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예배는 신령과 진리로, 삶은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걸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