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풍요의 배반, 축제의 날이 심판의 날로 [호 9:1-17]
 – 2024년 11월 28일
– 2024년 11월 28일 –
    
에브라임은 이방 민족처럼 결실의 풍성함에만 관심을 보인다. 여호와와 바알이 뒤섞인다. 혼합주의에 물든 이스라엘은 모든 것을 빼앗기고 멸망할 것이다. 예언자는 타작마당에서 초막절을 즐기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앞으로는 축제가 더 이상 없을 것을 선포한다. 제의적으로 불결할 이방 땅으로 쫓겨날 것이기에 명절과 절기가 돌아와도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거나 축제의 모임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초막절의 들뜬 분위기에 젖어있던 자들은 축제를 망쳐버린 예언자에게 욕설로 대응한다.
    
    
    
1. 축제의 끝(1~6절)
1~3절에서는 다시 결실을 얻게 된 이스라엘은 타작마당에서 열광적으로 춤을 추며 수확의 기쁨을 만끽한다.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이 이방 민족들처럼 기뻐 날뛴다. 예언자는 이스라엘이 열광하는 수확의 기쁨에서 가나안의 풍요 제의를 본다. 이는 여호와의 축제가 바알의 축제로 변질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들이 기뻐하는 수확을 음행의 대가로 정죄한다. 매음의 대가로 받은 것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간주하는 자들에게 심판이 선언된다.
    
2절을 직역하면 “타작마당과 술 틀이 그들을 먹이지 못할 것이며 새 포도주는 그들을 속이리라”이다. 이스라엘이 의존하는 타작마당과 술 틀에서 얻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즐기지 못하고 적에게 모두 빼앗길 것이다. 여호와를 배반하고 이방신을 섬겨 얻은 풍요는 이스라엘의 것이 되지 못한다. 수확한 곡식과 포도주를 빼앗기는 것은 심판의 서곡에 불과하다. 가나안 땅이 여호와의 땅임을 잊어버린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아니기에 가나안 땅을 떠나야 한다. 에브라임은 출발지인 애굽(11:1)으로 돌아가야 한다. “애굽으로 돌아감”이라는 표현은 출애굽에서 시작한 이스라엘의 구원사가 끝장났음을 의미한다. 에브라임은 멸망을 하고 사람들은 포로로 사로잡혀 갈 것이다. 에브라임은 조상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였듯이 이제는 앗수르에서 종살이해야 한다.
    
3절 하반절~5절에서는 여호와의 통치권이 가나안을 넘어 민족들에도 미치지만, 제의적인 정결은 “여호와의 땅” 가나안에서만 가능함을 설명한다. 우상을 섬기는 가나안 밖의 지역은 제의적으로 부정하고, 부정한 땅에서 살고 자라는 동식물도 마찬가지로 부정하다. 유배민은 부정한 앗수르에서 부정한 음식을 먹어야 하기에 부정을 피할 수 없고 따라서 거룩하신 여호와께 나아갈 수 없게 된다. 부정한 땅 앗수르에서 생산되는 곡식이나 포도주나 짐승은 모두 초상집 음식과 같아서 여호와께 드릴 수 없다.
    
호세아는 파격적으로 제물을 초상집 음식에 비교한다. 이는 추측하던데 앗수르 유배를 이스라엘 민족의 죽음으로 이해한 듯하다. 내용상으로는 “애굽으로 돌아감”과 유사하다. 이스라엘이 지금 즐기고 있는 축제는 앞으로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쫓겨난 이스라엘은 부장한 이방 땅에서 빼앗긴 초막절의 풍요로움과 기쁨을 고통스럽게 탄식할 것이다.
    
    
    
2. 형벌의 날(6~9절)
일부는 유배를 벗어나 애굽으로 도망하겠지만, 그들에게 애굽은 무덤이 될 뿐이다. 애굽은 그들을 모으고 놉은 그들을 장사할 것이다.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은 구원의 출발점이었던 애굽에서 구원사의 종말을 맞는다. 주민들이 모두 쫓겨난 “여호와의 땅”은 폐허가 된다. 애써 모아놓은 재물은 모두 약탈당하고 찔레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축제의 즐거움이 넘쳤던 장막에는 가시넝쿨이 자란다. 유배민은 유배지 앗수르에서, 피난민은 피난지 애굽에서 멸망하고 여호와의 땅은 찔레와 가시넝쿨이 자라는 황무지가 된다. 출애굽으로 시작된 하나님 백성의 역사가 완전한 죽음으로 끝난다.
    
이스라엘은 자신이 한 짓에 대하여 책임지고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7~9절). 혼합주의에 빠져 음행을 즐기며 기뻐 떠들지만 곧 고통스러운 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서 당신을 생명과 구원의 하나님으로 알 길을 거절한 이스라엘에게 심판을 통해 알게 하실 것이다. 예언자가 형벌의 날을 선포하자 이스라엘은 격렬하게 반응한다. ‘선지자는 어리석다.’, ‘미쳤다’라고 욕설을 퍼붓는다. 예언자에 대한 이스라엘의 적대감은 이들의 죄악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줄 뿐이다.
    
8절을 문맥에 따라 번역하면 “예언자는 나의 하나님과 함께하는 에브라임의 파수꾼이다. 새 잡는 자의 그물이 그의 길에 있고 그의 하나님의 집에(도) 증오가 있다(ESV; NRS; NIV).” 새 잡는 자가 그물을 쳐놓고 새가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대적들은 예언자의 길에 함정을 파고 그가 걸려들기를 기다린다. 여호와는 애굽과 앗수르로 가는 에브라임 위로 그물을 던져 하늘의 새처럼 낚아채시고(7:12), 에브라임은 예언자를 잡으려 그물을 놓는다.
    
“그의 하나님의 전”은 한때 예언자에게 우호적이었던 어떤 성소를 가리키는 듯하다. 전에 예언자를 도와주던 성소마저 그사이에 적대적으로 바뀌어 그를 증오한다. 곳곳에 대적들이 있어 생명마저 위협을 받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알기에 두려워하지 않는다. 거듭된 고발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를 떠나 음행을 즐기는 에브라임은 정욕에 사로잡혀 불의와 불법을 범한 기브아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삿 19~20장). 이는 에브라임의 현재가 사사 시대 말기와 비교되면서 이스라엘의 부패가 호세아 시대의 일시적인 현상이 아님을 보여준다.
    
여호와께서 부패한 에브라임에게 심판으로 응답하실 것이다. 그분은 오래 참으시기는 하지만, 죄악을 마냥 내버려두시지 않는다.
    
    
    
3. 에브라임의 멸망(10~17절)
10절은 고발에 앞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만났을 때의 기쁨을 회고하신다. 광야를 지나는 목마른 여행자가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포도송이를 발견하고 기뻐하듯이, 길을 가다가 우연히 무화과나무에 첫 열매가 열린 것을 보고 즐거워하듯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처음 만나셨을 때 그렇게 황홀해하셨다. 이스라엘은 뜻밖의 장소에서 발견한 값진 보물이었다. 이스라엘의 무엇이 하나님의 가슴에 사랑의 격정을 불러일으켰는지 알 수 없다.
    
10절 하반절부터 14절은 에브라임의 종교적 배반과 심판을 선언한다.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사랑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미 삐걱대기 시작했다. 이스라엘은 바알브올에서 우상에게 몸을 줘 간음을 범했다. “몸을 드리다(나자르)”는 바알브올의 나실인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은 바알과의 처음 접촉부터 자신을 전적으로 바알에게 내맡겼다. 이렇게 부끄러운 우상을 선택한 에브라임에게 여호와께서 생명력과 생산의 박탈로 응답하신다. 에브라임은 자식을 낳지 못할 뿐만 아니라 어렵게 얻어도 전쟁이나 기근이나 질병으로 그마저도 빼앗길 것이다. 후손이 끊어져 완전히 멸망하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엄중한 멸망 선언에 예언자가 개입한다.
    
멸망이 여호와께서 결정하신 에브라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면 심판의 고통이라도 줄여줄 것을 간구한다. 에브라임이 제 자식을 모두 살인자에게로 끌고 가야 한다면, 죽음에 넘겨질 자식이 없는 부모가 덜 고통스럽게 멸망의 심판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15~17절은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의 정치적 배반을 고발하시며 심판을 선언하셨다. 여호와께서는 길갈에서 시작된 왕정을 처음부터 미워하셨다(삼상 11:14~15; 13:7~15; 15:10~33). 왕정은 처음부터 악이었기에 그 뿌리에서 자라는 것도 악행뿐이었다. 우상숭배처럼 정치적 배교도 멸망을 가져온다. 에브라임은 가나안에서 쫓겨나 민족들 가운데 떠도는 자가 된다. 미래의 회복을 기대할 수 없게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을 완전히 끊어버리신다.
    
    
    
나는?
-풍성한 수확을 즐기며 축제를 벌이는 이스라엘에게 재앙이 선포된다. 그들의 풍성은 궁핍으로 바뀌고, 약속의 땅에서 쫓겨나 방황하게 될 것이다.
    
-이스라엘이 기뻐하는 이유는 풍성한 곡식 때문이지 그 결실을 주신 하나님 때문이 아니었다(1~2절). 풍요롭게만 해준다면 하나님이든 바알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즐거워한 것이 아니라 음행의 값을 즐거워한다. 결국 이스라엘은 자신들을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 믿는 것들에게 통렬히 배신당할 것이다. 축복의 기준을 세상의 풍요와 형통에 두지 말고, 오직 구원의 하나님만을 기쁨의 원천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스라엘은 은혜를 저버린 죄를 범했다. 출애굽과 광야의 은혜를 기억하게 하려고 주신 초막절을 이방 종교의 풍요 제사로 변질시킨 이스라엘의 헛된 희락을 심판의 통곡으로 바꾸실 것이다. 부정한 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땅에 거할 자격이 없어서 애굽과 앗수르로 쫓겨날 것이고, 더 이상 약속의 땅에서 수확의 축복을 누리지 못하고 부정한 땅에서 더러운 음식을 먹게 될 것이다.
    
-언약을 깨뜨리고 불순종한 백성은 더 이상 그 땅에서 살 수 없다(3~6절). 이스라엘은 스스로 역 출애굽을 택하여 과거 노예 상태로 돌아간다(15~17절). 그곳은 그들의 무덤이 될 것이고 과거의 영광도 사라질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가 전부였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도록 내가 누구인지 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악을 기억하고 죄를 벌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이스라엘은 심판의 날을 선포하는 선지자를 미친 사람으로 대하고 축제를 망친 자로 비난한다. 선지자의 길에 덫을 놓고 심지어 성전에서도 원한을 품는다(7~9절). 그들은 부패한 과거의 죄를 잊었을지라도 주님은 기억하신다. 이미 용서하신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않으시지만(렘 31:34) 회개하지 않은 은밀한 죄는 절대로 잊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만이 아니라 그들과의 특별한 만남도 기억하고 계신다.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보는 것처럼 흐뭇했던 순간을 잊지 않으신다(10절).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을 특별하게 여기시는 주님을 배반하고 스스로 하찮은 존재로 추락한다. 허망한 우상들을 섬기다가 허망한 존재가 된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사랑하고 섬기는 대상을 닮아간다. 이것이 거룩한 하나님만 섬겨야 할 이유다.
    
-하나님은 불임의 땅 광야에서 포도를 만난 듯이, 무화과나무의 첫 열매를 본 듯이 이스라엘을 끔찍이 사랑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바알브올에게 절했던 조상들처럼 바알에게 절함으로 그 사랑을 저버렸고 그 가증한 우상을 닮은 자들이 돼버렸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불임을 주시고 있는 자녀도 잃게 하시고 아예 그들을 떠나버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저버린 죄는 쓰라리다 못해 참혹하다.
    
-더 이상 자녀들이 없다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미래가 사라진다는 뜻이다. 순종하지 않은 그 세대뿐 아니라 다음 세대에게도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이다(11~14절).
    
-하나님은 선지자의 중재기도도 거절하신다. 하나님께 반역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자신들만의 나라로 만든 지도자들을 쫓아내시고 다시는 사랑하지 않으실 거라고 하신다. 악에 뿌리를 내린 이스라엘은 뿌리가 말라서 열매를 맺지 못한 나무처럼 되고 이미 낳은 태의 열매마저 죽으며, 결국엔 하나님이 그들을 떠나실 것이다. 그들은 떠도는 신세가 될 것이다. 에브라임의 죄가 하나님의 용서 받지 못할 죄가 돼버렸다.
    
-죄를 짓는 자에게 풍요는 축복이 아닌, 착각을 정당화 해주는 재앙과 다름없다. 차라리 뿌린 대로 거두면 이렇게 멀리 가지 않았을 것이다. 에브라임에게 풍요는 독이 되었고 번영은 늪이 되고 말았다. 돌아올 수 있는 기회를 잡지 못하게 하여 한순간에 모두 무너질 위기를 가져왔다. *음행의 값, 선지자를 거절한 죗값, 역사적으로 뿌리 깊은 죄악에 대한 대가는 멸망뿐이었다.
    
    
 
*주님, 하나님을 거역한 축제의 날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의 날이 되었음을 봅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축복의 기준으로 삼았을 때 보이지 않으나 실재하시는 하나님의 진노가 쌓이는 것을 깨닫습니다.
*주님, 하나님과 상관없는 풍요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풍성함이 궁핍으로, 안전과 평안이 유리하는 인생이 되는 것을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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