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장은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을 표현한 감동적인 문장들을 모아놓은 모음 글이다. 호세아서에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언약 관계는 “결혼 은유”를 통해서였다. 그런데 본문은 부모와 자녀라는 관계로 표현한다. 1, 7, 10절을 제외하고 하나님이 일인칭 화자가 되어 백성들에게 직접 말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출애굽 사건을 회고하는 것을 통해 이스라엘을 다시 구원하실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을 표현하신다. 또 반역한 자기 백성을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듯 고통을 감수하며 조건 없이 다시 사랑하겠다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결정을 묘사하고 있다.
여호와께 돌아가지 않은 에브라임의 완악함과 무능력은 여호와의 진노하심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출애굽 이전으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 처한 여호와는 에브라임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는 대신에 자기희생을 선택하신다.
1. 여호와의 사랑과 이스라엘의 배반(1~4절)
1~2절은 아버지이신 여호와께 등을 돌리는 아들인 이스라엘을 묘사한다. 여호와께서 바로의 압제 아래에서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셨다는 고백은 이스라엘의 원초적인 신앙고백이다. 출애굽을 통해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스라엘은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 호세아는 이 출애굽 사건을 가족관계의 시각에서 새롭게 조망한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당신의 아들로 불러내셨다. 이를 통해 여호와는 아버지가 되시고, 이스라엘은 그분의 아들이 된다. “어렸을 때”는 아직 제힘으로 서지 못하고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할 때이다.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남다른 자질이 전혀 없었음에도 여호와의 일방적인 사랑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시작부터 꼬인다. 이스라엘은 아버지의 인도와 보호하심을 거절하고 가나안에서 알게 된 바알을 따른다. 본문을 개역 개정은 모두 과거시제로 옮겼지만, “멀리하다”는 완료형, “제사하다, 분향하다”는 미완료형이다. 즉 이스라엘은 반복적으로 돌아왔다가 다시 떠난 것이 아니다. 한 번 떠난 후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배교는 일시적인 일탈이 아니라 의도적이었고 지속적이었다.
3~4절은 그럼에도 아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표현한다. 여호와의 사랑은 출애굽의 역사에 국한되지 않았다. 여호와께서는 애정과 헌신을 가지고 계속 에브라임을 돌보셨다. 하지만 에브라임은 보호와 인도를 받으면서도 여호와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르치시고 돌보실 뿐만 아니라 고쳐주기도 했다. 여호와는 에브라임의 병을 고쳐주려고 애쓰지만, 에브라임은 거절할 뿐이었다. 에브라임은 자신이 환자임을 알지 못했거나 혹시 알았다고 하더라도 여호와가 아닌 다른 곳에서 치료받으려고 했다. 호세아는 이런 에브라임을 향한 여호와의 애정 어린 돌봄을 “농부”의 이미지로 표현한다.
여호와께서는 “사람의 줄곧 사랑의 줄”로 에브라임을 이끄셨다. 농부가 줄을 당겨 소나 송아지를 제 길로 이끄는 것처럼 여호와는 아직 길에 익숙하지 못한 에브라임이 빗나가지 않고 바른길을 가도록 계속 관심을 두고 이끌어주셨다. “사람의 줄과 사랑의 줄을 “율법과 예언자”로 보기도 하지만, 에브라임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애정이 어린 방법으로 인도하셨음을 시사하기도 할 것이다. 또 여호와는 에브라임을 “그 목에서 멍에를 벗기는 자 같이” 되셨다. 하루 종일 고된 일을 마친 소가 집에 돌아오면 목에서 멍에를 벗겨 편히 쉬면서 꼴을 먹을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을 이렇게 아끼고 사랑해 주셨다.
2. 심판 선고(5~7절)
아버지의 사랑과 호의를 짓밟은 아들 에브라임에게 심판이 선포된다. “애굽 땅으로 돌아가지 못함”은 아마도 애굽에서 도움을 찾으려는 자들에게 주는 경고의 말씀일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오기를 거절하고 애굽으로 돌아가려 한다면, 에브라임은 앗수르의 종살이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돌아오기를 완강하게 거절한 에브라임은 전쟁의 참혹한 재앙에 떨어진다. 성읍들이 여호와께서 보내신 칼로부터 백성들을 안전하게 지켜주지 못한다. 성의 가장 약한 곳이 빗장을 걸어 닫아놓은 성문이었고, 적은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며 성문을 깬다.
에브라임의 맹목적인 거절에 여호와께서 탄식하신다. “내 백성이 끝끝내 내게서 물러나니”를 직역하면 “내 백성은 내게서 떠나려는 일에만 매달린다”이다. 에브라임은 여호와로부터 떠나는 것을 목표로 삼은 것처럼 완강하게 그분으로부터 떠나기만 했다. 이런 에브라임에게 하나님께서는 한 번 더 돌아오라고 호소하시지만 아무도 반응하지 않았다. 에브라임은 높은 곳에 계신 여호와께서 내미는 구원의 손길을 단호하게 뿌리치고 멸망의 길로만 내달린다. 여호와께는 심판하시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이 없어졌다.
3. 진노를 억누르시는 여호와의 사랑(8~9절)
이제 비극적인 멸망만 남았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여호와에 의해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이스라엘이 돌아오는 것은 불가능해졌지만, 그렇다고 멸망의 심판이 여호와의 최종 답변은 아니었다. 은혜를 배반한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공의에 따라 영원한 멸망에 넘겨져야 했지만,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공의의 진노를 억누르고 아들에게 무조건적인 구원 가능성을 열어준다.
“매 마음이 내 속에서 돌이키어 나의 긍휼이 온전히 불붙듯 하도다”라는 여호와의 고민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려는 여호와의 결정이 모든 면에서 정당하지만, 이를 실행하지 않으시고 거둬들이시는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내적 전환을 보여준다. 이는 이스라엘의 태도와 상관없다. 하나님 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자기 극복”이다. 마침내 배반한 에브라임을 진멸하시려는 여호와의 진노가 그의 사랑에 의해 극복된다. 에브라임을 구원하기 위해 여호와께서 자기 심판 의지를 거슬러 행동하신다. 이렇게 하시려는 이유나 배경은 달리 설명되지 않는다. 단지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라는 말씀이 선포된다. 절대주권과 절대 자유의 선언이다.
행위와 보응의 상관관계는 공의의 전제이지만, 여호와는 이러한 윤리적 원칙에 구속당하지 않으신다. 여호와는 공의를 판단하시는 최고의 재판관이시지만, 공의에 종속당하시지 않는다.
4. 흩어진 자들의 귀환(10~11절)
본문은 유배의 심판을 전제하는 말씀이다. 이 구절을 통해 심판 포기 선언은 사랑에 의한 공의의 극복이지, 공의를 무시하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에브라임에 선포된 심판은 무효로 한 것이 아니다. 에브라임과의 관계를 정리하시려는 여호와의 의지가 반영되었을 뿐이다. 여호와께서 포기하신 것은 심판 자체가 아닌 관계의 단절이다. 출애굽에서 시작된 관계가 회복 불능의 파탄에 직면했지만, 그분은 포기하지 않으시고 출발점에서 새롭게 시작하신다.
사자처럼 에브라임을 덮쳐 갈기갈기 찢으셨던(5:14; 13:7) 여호와께서 죽음에 떨어진 자기 백성을 위해 다시 사자처럼 포효하신다. 첫 번째 출애굽 때 기사와 이적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던 여호와가 이번에는 사자의 포효로 유배민들을 구출하신다. 앗수르와 애굽으로부터 자녀들을 인도해 내셔서 다시 제집으로 돌아가 살게 하신다.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저버린 이스라엘은 결국 이방 나라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애끓는 긍휼이 그들을 다시 돌아오게 할 것이다.
-탕자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름이 아닌 바알의 부름을 듣고 따라 한다. 첫걸음마를 뗄 때 기뻐 안아주셨고, 아플 때마다 낫게 해주셨지만 자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다. “사랑의 줄”로 인도해 주신 아버지를 멀리하고 품에 안을수록 더 멀리 달아난다. 간음한 아내처럼, 패륜아처럼 그렇게 하나님의 진실한 사랑을 외면한다(1~4절). 부정한 삶이 주는 잠깐의 쾌락과 부요에 취해 아버지의 영원한 사랑을 잃어버리면 되겠는가? 이 사랑이 나를 살렸고, 이 사랑 때문에 살고 있고, 이 사랑 때문에 살아갈 것인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책임 있고 사랑 많은 아버지 노릇을 하신다. 애굽에서 건져내시고, 광야를 지나는 동안 걸음을 가르치시고, 두 팔로 안아 양육해 주셨다. 사랑의 줄로 이끌어주셨다. 주변 열강들의 정치적인 압박과 침략으로부터 보호하셨다. 몸을 굽혀 먹을 것을 공급해 주셨다. 그러므로 병든 아들을 고칠 수 있는 분도 당연히 하나님뿐이시다. 하나님은 보호하고 치유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이스라엘이 멀리 떠날 때도 기다리신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오기를 싫어하고 애타게 불러도 누구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열강을 공경하며 하나님보다 자신들의 계책을 더 믿었다. 결국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상의 노예가 되고 강대국의 포로가 될 것이다. 그들에게 칼이 임하고 자유가 사라질 것이다(5~7절). 오늘 내 고난과 상실의 아픔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길만이 살길임을 깨닫게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아닐까?
-어떤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을 버리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 마음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불붙는 긍휼이 있고 그분은 사람과는 다른 하나님이시다. 스스로 정한 법(신 21:18~21)을 어기면서까지 부모를 배반한 자녀를 서쪽 앗수르에서부터 그리고 애굽에서부터 새같이, 비둘기같이 돌아오게 하실 것이다. 그들의 집 가나안에 정착하여 살게 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상식을 뛰어넘는 긍휼의 아버지시다.
-비록 이스라엘이 잘못했어도 이방 아드마와 스보임처럼 포기하지 않으신다(신 29:23). 무한한 능력과 진노가 아닌 애끓는 사랑과 자비로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나타내신다. 사람과 구별되고 우상과도 다른 “거룩하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사랑은 일방적이지도, 변덕스럽지도, 세상처럼 조건적이지도 않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8절)”라는 주님의 애끓는 음성이 곧 실수와 허물투성이인 나를 향한 음성이다.
-하나님이 결국 이루실 것이다. 백성들은 새와 비둘기처럼 신속하게 날아 올 것이다. 주님께서 집 떠나 살던 그들을 위해 다시 집을 마련하시고 머물게 하실 것이다. “내가 하리라(11절)”는 말씀에 아버지의 확고한 의지가 느껴진다. 우리는 실패할 수 있어도 하나님은 실패하지 않으신다. 우리는 떠났어도 주님은 돌아오게 하신다. 그 사랑을 믿는 데서 신앙이 시작되고 또 자라난다.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 내가 그들의 집에 머물게 하리라.
*주님, 내가 어찌 너를 버리겠느냐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절규가 마음을 후빕니다. 그 사랑 안에 늘 거하겠습니다.
*주님, 이스라엘처럼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실망스러울지라도 여전히 교회를 버리지 않으시는 주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 사랑 때문에 오늘을 굳건히 믿음으로 살아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