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은 온통 심판 경고로 가득하다.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뛰어난 지파로 이스라엘을 대표한다. 북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 여로보암 1세가 에브라임 출신이기도 하다. 본 장은 네 개의 심판 신탁으로 구성된다. 이 신탁들은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진단하고 그들이 직면할 무서운 미래를 경고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이 음란하게 바알을 숭배하고 자기의 기호에 맞게 우상들을 제작하여 여호와 신앙을 사람의 입맛에 맞게 조잡한 종교로 타락시킨 것을 질책한다. 이 와중에도 하나님은 “나는 여전히 너희 하나님(4절)”임에도 이스라엘이 자신을 잊었다고 분노하신다. 옛적 광야의 삶에서 자기 백성의 필요를 채우시고 돌보셨던 때를 회고하지만, 하나님 은혜를 잊은 백성에게는 심판만이 기다릴 뿐이다.
1. 우상숭배와 심판 경고(1~3절)
첫 신탁은 에브라임의 과거를 회상하고 현재의 상태와 앞으로 닥칠 심판을 경고한다. 호세아는 에브라임 지파가 이스라엘에서 으뜸임을 언급한다(1절).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을 대표하는 명칭이기도 했는데, 이는 초대 왕 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출신이기도 했고 지리적으로도 팔레스타인 땅의 중앙에 위치하고 지파들 사이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한 것에서 북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용어로 유래되었다.
이런 에브라임이 바알 숭배로 망했다고 고발한다(1절 하). 주목할 것은 이 문장은 시제가 완료형이라는 점이다. 이 신탁이 선포되었을 때 북이스라엘은 건재하고 있었다. 하지만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마지막이 도래한 것처럼 완료형으로 선포했다. 바알 숭배의 치명적인 죄상을 강조하려는 의도일 것이다. 바알 숭배가 풍요와 번성을 위한 것이었는데, 역설적으로 이스라엘이 죽는다.
호세아는 계속해서 “지금도” 이스라엘이 죄 위에 죄를 차곡차곡 쌓는 현실을 개탄한다. 이스라엘의 심각한 죄는 세공 업자가 이스라엘 땅 전역에 은으로 정교하게 우상을 만들어 세운 것이다. 그 신상 앞에 제물을 바치는 자는 송아지 신상에 입 맞춘다(2절). 여로보암 1세는 송아지 신상(황소 신상)을 여러 지방 성소에 세웠다. 여호와 신앙이 가나안의 바알 종교와 혼합되면서 황소 신상을 하나님으로 섬긴 것이다. 하나님이 ‘바알’화 된 것이다.
호세아는 바알들에게 제사하여 바치는 것이 사람을 짐승처럼 도살하여 제물로 바치는 극악한 일이며 이것이 얼마나 덧없고 허망한 것인지를 네 가지 직접 비유를 들어 표현했다. 바알 우상을 섬기는 삶은 아침 안개, 아침 이슬, 쭉정이, 연기와 같다(3절). 이 은유의 공통점은 “잠정적이며 지속성 없는 일시성”이다. 이스라엘은 이처럼 먼지처럼, 바람에 흩어지는 연기처럼, 이스라엘의 운명은 사라질 것이라는 경고였다.
2. 하나님의 은혜를 잊은 것에 대한 심판(4~8절)
4~5절은 출애굽기 20:2에 등장하는 여호와의 자기소개(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와 거의 일치한다. 출애굽과 십계명의 결합은 십계명의 준수가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하나님의 명령이자, 새로운 출애굽의 약속임을 시사한다. 십계명의 준수를 통해 이스라엘은 거듭 역사 안에서 여호와를 이스라엘의 구원자로 경험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출애굽 사건을 통해 알게 된 여호와 하나님만 섬기면 보장된다. 이스라엘은 이미 출애굽의 구원자 여호와를 광야에서 경험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선택하셨기에 이스라엘은 오직 그분만을 알아야 한다.
6~8절은 에브라임의 배은망덕과 이에 따른 심판 선언을 다룬다. 역설적으로 여호와의 축복이 에브라임을 교만하게 만들어 파탄에 이르게 한다. 이 단락에서 세 개의 동사(배가 불렀고, 교만하여, 잊었느니라)가 연결되면서 에브라임을 배은망덕으로 고발한다. 에브라임은 여호와께서 주신 가나안의 초장에서 꼴을 먹고 배가 불렀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여호와께서 주신 땅의 축복이 에브라임을 교만하게 만들었다. 척박한 광야에서는 여호와께 순종했지만, 가나안 땅에 들어와 농사를 지으며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자 구원자를 잊어버렸다. 여호와께서 주신 축복을 자기 능력과 힘의 열매로 착각하고 자신을 역사와 삶의 주인으로 만들어버렸다.
이렇게 은혜를 배반한 에브라임에게 엄한 징벌이 선언된다. 굶주린 사자와 표범처럼 에브라임을 덮치실 것이다. 새끼 잃은 곰의 비유는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철저하게 집행될지를 보여준다. 여호와께서는 새끼를 잃고 흥분하여 사납게 날뛰는 암곰처럼 에브라임을 덮쳐 염통 꺼풀(갈비뼈로 감싸 심장을 보호하는 흉곽)을 찢으실 것이다. 에브라임의 가슴을 찢어 숨통을 완전히 끊어 놓으신다.
3. 왕권의 종말(9~11절)
이 단락은 이스라엘의 패망과 하나님의 분노를 다룬다. 유일한 구원자 여호와를 대적하고 왕권에 의존하는 이스라엘에게 멸망이 선포된다. 도우시는 분을 적으로 만들었기에 멸망 외에 다른 길은 없다. 전쟁은 이스라엘이 그처럼 의지한 오아과 재판장들의 무능력만 보여줄 뿐이다. 자기 목숨 보전하기에만 급급할 뿐 이들은 적의 침략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하지 못한다. 한편 “너를 도와주는 나”는 재앙 이후에라도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도움을 구한다면 도와주실 수 있음을 간접적으로 시사한다. 이스라엘의 배반이 여호와의 질투를 유발하나 그럼에도 하나님은 출애굽의 하나님이시다.
“전에 네가 이르기를 내게 왕과 지도자들을 주소서 하였느니라”라는 사무엘상 8장의 왕정 도입과 관련된다. 왕정은 여호와의 선물이기는 하지만, 은총의 선물은 아니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왕권은 하나님의 진노 도구였다. 여호와께서는 권력욕에 사로잡힌 자들의 모반을 허락하여 사회를 폭력과 혼란에 빠뜨리게 하시고, 이를 통해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나님의 진노를 경험하게 하셨다.
4. 어리석은 에브라임의 종말(12~16절)
12~14절은 마지막 기회를 상실해 버린 에브라임을 언급한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 대한 모든 기대를 거두신다. 더 이상의 기다림도, 책망도, 경고도, 위협도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마치 중요하고 값진 물건을 잘 묶어 안전한 곳에 보관해 놓는 것처럼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에 범한 불의와 죄를 잘 싸서 따로 보관하신다.
에브라임의 죄는 재고할 여지가 없어졌다. 많은 죄악이 수집되었기에 또 다른 증거가 불필요해졌다. 저지른 악한 죄에 대한 판결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것은 “출산의 진통(13절)”을 통해 에브라임의 어리석음을 고발한다. 원래는 출산의 진통은 해산하는 여인이 경험하는 고통이지만, 본문은 태아에게 적용된다. 자궁의 문이 열리고 해산의 진통이 시작되었는데도 자궁 안에 있는 아이가 나오려 하지 않는다. 어리석은 에브라임은 목숨을 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마저 놓친다. 죽는 순간까지 여호와의 손을 뿌리치는 에브라임에게 구원의 문이 최종적으로 닫힌다.
14절은 여호와께서 이제 구속자의 역할이 끝났음을 선언하신다. 여호와는 오직 죽음의 길로 내닫는 에브라임을 스올의 권세로부터 속량해야 할 어떤 동기나 이유도 찾지 못하신다. 하나님은 지금까지의 구원 노력을 포기하시고 어리석은 에브라임을 사망에 넘겨 주신다. 사망이 역병으로 에브라임을 멸망시켜 스올로 데려갈 것을 허락하신다. “뉘우침이 내 눈앞에서 숨으리라”라는 표현은 여호와의 심판 결정이 취소될 수 없음을 선언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은 에브라임에게 더 이상 연민을 느끼지 않으실 것이다.
15~16절에서 호세아는 설령 그가 그의 형제 중에서 번성해도 사막에서 동풍이 불어오게 하고, 여호와의 바람이 불어와 샘과 우물을 모두 말려버리고 보물은 약탈당하게 할 것이라 경고한다(15절). 여호와께서 보내신 동풍이 근원과 샘을 말려 에브라임을 죽인다. 보물 창고에 쌓아둔 모든 값진 기구가 약탈당하고 남자나 여자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모두 무자비한 살육에 넘겨진다. 사마리아는 여호와를 배반한 죄의 대가를 혹독하게 치른다.
나는?
-하나님은 하나님을 밀어내고 정교한 우상과 힘 있는 왕으로 자신들의 구원자를 삼은 교만한 이스라엘의 죄악에 분노하신다.
-우상숭배가 가져온 비극의 역사를 잊은 채 우상에 더욱 집착한다(1~3절). 부담스러운 ‘경외의 대상’인 하나님과 달리 그들에게 우상은 언제든 내 맘대로 내 욕망을 위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대상이다. 하지만 헛된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인생은 “연기처럼” 허망해질 것이다. 이 시대가 찬사를 보내는 것들에 무조건 동조하지 말고 그 속에 깃든 우상적 요소를 헤아리는 덕목을 달라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나의 욕구가 탐욕으로 흘러가는 것도 경계해야 한다.
-우상숭배 하는 이스라엘을 아침 구름과 이슬같이, 광풍에 날리는 쭉정이와 굴뚝의 연기같이 쉬 사라지게 하실 것이다. 그들은 교만한 우상숭배로 죽은 조상들의 역사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더욱 범죄하고 있다. 아비와 어미처럼 이스라엘을 낳고 기르셨던 하나님이 이제 그들을 찢고 삼키는 맹수 같은 분이 되기로 하셨다.
-출애굽에서도 광야에서도 풍요의 땅 가나안에서도 여전히 이스라엘의 구원자이자 보호자이시다. 하지만 풍요 속에서 교만해진 그들은 그들의 구원자를 잊어버린다(4~8절). 배고픈 광야보다 배부른 가나안이 그들에게 더 큰 유혹이었을 것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유일한 구원자가 아닌 또 하나의 구원자이고 현재가 아닌 과거의 구원자일 뿐이다. 우리 안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혼합종교의 요소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내가 무엇을 주인 삼고 있는지로 내가 누구인지를 판단하실 것이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공급받고도 이스라엘은 정작 하나님을 불필요하게 여긴다(6절). 왕을 요구하여 세웠더니 왕 때문에 고초를 겪는다. 이를 통해 그들의 기대가 얼마나 허황된지, 누가 그들의 진정한 구원자인지 알기를 바라셨으나(9~11절) ‘지혜 없는 자식(12절)’처럼 깨닫지 못한다. 나의 삶도 다 갖추었는데, 하나님만 빠진 삶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여호와의 왕 되심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달라고 요구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심으로 심판하실 것이다. 그 왕들 때문에 고초를 당하게 하시고 그 지도자들이 결코 구원자가 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들임을 경험하게 하실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밖에는 그들에게 참 왕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구속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에브라임의 죄와 불의는 잊힌 것이 아니라 보관되었다. 심판도 잠시 지연된 듯 보이나 철회된 것이 아니다. 이런 불가피한 심판 속에서도 그러나 희망의 빛이 보인다. 비록 슬픔과 고통의 시간이 이어지지만, 사망 가운데서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12~16절). 반복되는 죄와 실패로 인해 절망하고 있다면 그때가 바로 죄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가 아니겠는가!
*죄는 묵인의 대상이 아니라 심판의 대상이다. 회개하지 않는 죄는 심판을 통해 종결된다. 결국 이스라엘은 구원과 사망 속에서 죄에 상응하는 죽음의 형벌을 받겠지만, 하나님은 죽음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자기 백성에 대한 구속계획은 계속 진행하실 것이다. 긍휼 없는 심판은 또 다른 구원의 시작이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증명한 것처럼 인간의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포기도 멈춤도 없다.
*주님, 주님을 내 편의의 대상이 아니라 경외의 대상임을 잊지 않겠습니다.
*주님, 오직 하나님을 의뢰하는 것이 세상의 어떤 것을 의지하는 마음보다 더 크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