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은 아이 밴 여인의 배가 찢기는 잔인한 장면으로 끝났다. 그리고 14장은 “돌아오라 이스라엘이여(1절)”로 시작한다. 진노 중에도 긍휼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고통스러운 사랑을 담은 호세아의 애절한 목소리이다. 호세아서 전체가 이스라엘의 남편이자 어머니이며 아버지인 하나님의 배신감과 분노, 이에 따른 엄중한 심판과 형벌 선언이 이어진다. 14장 마지막은 절망과 죽음이 깔린 한복판에 희망의 빛이 비친다. 심판 경고와 비난이 멈췄고 호세아는 끝까지 긍휼하신 하나님을 신뢰한다. 돌아오라, 다시 사랑하시겠다는 하나님의 구원 약속에 의지하여 서로의 상처와 아픔이 봉합되고 의인으로 살며 지혜롭기를 바라는 권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스라엘을 향한 비난과 심판 신탁이 마무리됐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향한 회개를 요청하고 여호와께 돌아오라는 마지막 권면을 선포한다. 이스라엘은 호세아의 경고가 현실이 될 때 비로소 뒤늦게 깨닫게 될 것이다. 풍요와 번성을 위해 숭배했던 우상들이 그들을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다. 이스라엘은 죄악으로 넘어졌으나 그렇다고 모든 것이 끝장난 것은 아니다. 살아남은 자들에게는 각자의 결단에 따라 여호와와 새로이 관계를 맺을 가능성이 주어진다. 여호와의 긍휼이 고아 신세로 전락한 이들에게 여호와께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
1. 여호와께 돌아오라_회개의 요청과 입술의 열매(1~3절)
호세아는 거듭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고 외쳤으나 이스라엘은 돌아오지도, 찾지도 않았다. 이스라엘의 완강한 거절이 결국은 하나님의 엄중한 심판을 초래한다. 구원의 하나님을 버리고 헛것인 우상을 좇은 이스라엘은 결국 앗수르에 멸망당한다(주전 722년).
호세아는 이미 엎드러진 이스라엘에게 다시금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한다. 하나님은 심판에도 불구하고 구원이 여호와께 있음을 인정하고 돌아와야 할 것을 강권한다. 이스라엘은 전에도 여러 번 여호와께로 돌아왔지만, 이들의 돌아옴은 제의적인 형식을 넘지 못했다.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성소를 찾아가서 그분께 제사를 드렸다. 하지만 호세아는 짐승 대신에 말(고백)과 입술의 열매(행위), 즉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며 돌아오라고 외친다.
여호와께 드려야 할 입술의 열매는 이스라엘 자신을 멸망으로 이끈 거짓 믿음과 단절을 선언하는 것이다. 먼저 여호와 대신 앗수르를 정치적 구원자로 섬겼던 “불의함”을 인정해야 한다. 또, 이스라엘은 “말”에 의존한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 여호와를 성전에 계신 분으로만 국한 시키고 자신들의 군사적이고 경제적인 능력에 의존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상숭배로부터 떠나야 한다. “우리의 손으로 만든 것”은 우상의 본질을 보여주는 풍자적인 표현이다. 우상이란 존재는 이스라엘이 제 손으로 만든 값비싼 작품에 불과하다.
이렇게 여호와께 돌아옴과 고백은 관계 회복의 필요조건이다. 충분조건은 될 수 없다. “불의함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졌기에(1절)” 이스라엘은 용서를 청할 권리조차 없다. 이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이스라엘이 끊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동의 없이는 돌아올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호세아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을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찾는다. 멸망한 이스라엘은 부모 없는 고아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하나님의 긍휼이 공의로운 심판에 넘겨져 고아가 된 이스라엘에게 다시 기회를 제공해 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긍휼에 매달려 용서와 도움을 구할 수 있다.
2. 여호와의 구원 약속_치유, 회복, 푸른 잣나무(4~8절)
멸망이 하나님께서 결정하신 이스라엘의 마지막 운명은 아니다.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 고아처럼 절망적 처지에 떨어진 이스라엘에게 마찬가지로 긍휼을 베푸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돌아오길 가만히 기다리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움직이신다. 의사가 되셔서 이스라엘의 반역을 고쳐주신다.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돌아올 수 있도록 죄에 사로잡힌 마음을 고쳐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새 마음으로 만들어 주신다.
*이스라엘의 돌아옴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스라엘을 돌아오게 한다. 긍휼에 근거한 하나님의 일방적인 사랑이 이스라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스라엘에게 임하였던 하나님의 진노를 떠나게 한다. 여호와의 진노가 떠남으로써 이스라엘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수 있는 길이 열린다.
5~7절은 여호와께서 반역의 마음을 고쳐주실 뿐만 아니라 풍요로운 삶도 약속해 주심을 보여준다. 죄에 진노하심으로 이스라엘의 생명을 끊으셨던 여호와께서 다시 생명을 허락하신다. 여러 가지 다양한 비유를 풀어 설명하신다.
“쉬 없어지는 이슬” 같은 인애로 여호와를 섬기다가(6:4), 심판으로 “쉬 사라지는 이슬”같이 역사의 무대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이스라엘에게(13:3), 여호와께서 이슬(긍휼과 사랑)같이 되셔서 그에 힘입어 이스라엘은 생명력을 회복하여 꽃을 피운다.
독초가 돋아 못쓰게 된 밭이랑처럼 불법과 무법으로 황폐해진 이스라엘에(10:4) 다시 백합화가 핀다. 이른 봄에 빠르게 성장하여 꽃을 피우는 백합화처럼 이스라엘은 빠르게 생명력을 회복하여 무성하게 자란다.
또 그 뿌리가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땅속 깊이 박힌다. “박히다(나카)”로 번역된 동사는 “때리다, 치다”를 의미한다. ‘매를 맞아 그 뿌리가 말라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된 에브라임이(9:16) 여호와의 축복으로 다시 뿌리를 땅속 깊이 박고 크게 번성한다. 지금은 기둥이 잘려 그루터기만 남아 죽은 나무처럼 보이지만, 여호와께서 주시는 이슬을 먹고 생명이 깨어나 다시 그 뿌리가 뻗고 가지가 사방으로 퍼져 감람나무처럼 아름답게 자란다. 구원의 시대가 시작됨과 더불어 여호와께로 돌아온 자들에게 다시 복을 준다.
그 그늘이 좋아 ‘참나무와 버드나무와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분향하며 음행을 즐겼던(4:13)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그늘로 돌아와서 그분의 보호를 받으며 쉼을 즐긴다. 전쟁과 질병과 폭력과 기근에서 벗어나 샬롬의 삶을 누린다.
구원의 묘사는 즐거움과 풍요로움을 상징하는 포도주에서 그 정점에 도달한다. 이스라엘은 유명한 레바논의 포도주처럼 최고급 포도주를 생산하는 포도나무가 된다.
8절은 에브라임의 고백에 해당한다. 너무 늦어서 심판을 피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마침내 에브라임은 깨달음에 도달한다. 우상숭배가 파국적인 결말을 초래했음을 인정하고 우상과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한다. 주의해야 할 것은 에브라임의 깨달음과 고백은 여호와께서 그들의 반역을 고쳐주신 결과이다. 출발점이 아니다. 여호와의 구원 약속이 에브라임이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며 바르게 반응할 수 있게 한다. 여호와와 에브라임의 관계가 완전하게 회복된다.
이전에는 에브라임의 기도를 거절하셨던 여호와께서 앞으로는 응답하시고 돌아보신다. 여호와께서 에브라임에게 “푸른 잣나무”가 되시고, 에브라임은 “푸른 잣나무” 여호와에게서 열매를 얻는다. 가나안의 신 바알이 아니라 사철 푸름과 싱싱함을 간직한 잣나무인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풍요를 주관하시는 것이다.
3. 호세아의 권면_마음에 새기라(9절)
마지막 구절은 호세아의 권면이다. 권면의 방식은 누가 지혜로 이런 일을 깨닫게 할 수 있겠느냐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 누구도 깨닫지 못한다는 의도로 성경을 읽는 이로 하여금 생각하게 만든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지혜로운 자는 깨닫는다”라는 도전적인 말이 아닌가!
호세아는 마지막으로 여호와의 길(데렉)은 정직하여 의인은 그 길로 다니지만, 죄인은 그 길에 걸려 넘어진다는 조언으로 끝맺는다. 이는 호세아가 독자들에게 “의인들”의 길을 따를 것인지, 악인들의 길을 따를 것인지 물으며 시편 1편의 악인과 의인의 길을 제시하듯 여호와의 길을 따라 걷기를 당부한다.
나는?
-하나님은 다 끝난 듯 보이는 이스라엘에게 구원을 약속하며 소망을 주신다. 또한 진심으로 돌아오는 자에게 풍성한 복과 열매를 약속하신다.
-회개는 “돌이킴”과 “돌아옴”이다(1~2절). 양심의 가책도, 불의하게 살다가 넘어진 자리에서 후회하는 것도 회개가 아니다. 죄의 자리에서 돌이켜 주께로 돌아오는 것이 회개다. 하나님은 속죄의 제물보다 회개의 열매를 바라신다. 말만 바꾸는 회개가 아니라 삶을 바꾸는 회개를 바라신다. 피상적인 회개는 피상적인 관계를 낳는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심판은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고아를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받은 후에라도 불의함을 회개하고 돌아오라고 하신다. 돌아오되 형식적인 더러운 희생제물이 아니라 진실한 회개의 말씀들을 가지고 오라고 하신다. 불의를 제거해달라고 구하고 인애와 공의 같은 선한 삶을 예배로 드리며 나오라고 하신다. 수송아지가 아닌 진실한 입술의 열매를 바치라고 하신다.
-회개는 또한 “결별”과 “결단”이다(3, 8절). 사랑하고 의지하던 대상을 바꾸는 일이다. 우상을 숭배하던 삶과 완전히 결별하는 일이다.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결단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처럼 스스로 거룩한 고립과 소외를 선택한 이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결코 홀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우리는 진정으로 회개하여 의인의 길을 걷고 있는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를 기쁘게 받아주신다(4~7절). 죄도 과거도 묻지 않으신다. 사랑은 돌아오고 진노는 떠날 것이다. 뿌리 뽑힌 나무에서 열매가 맺히듯, 회복 불능의 사망진단을 받은 이들을 고치신다. 상처만 아니라 마음도 고치신다. 간신히 고치시는 정도가 아니라 놀랍도록 아름다운 모습으로 회복하신다. 이슬 같은 은혜를 머금은 인생에 꽃이 피고 그 향기가 온 땅에 퍼지게 할 것이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또 “더 풍성히 얻게(요 10:10)”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이 긍휼이 없었다면 아무도 구원에 이를 수 없었다.
-하나님은 영혼의 의사가 되어 회개하고 돌아온 자들을 고쳐주실 것이다. 그들을 향한 진노를 기꺼이 사랑으로 바꿔주실 것이다. 호세아에게 고멜을 받아주라고 하셨던 그 은총으로 이스라엘도 받아주실 것이다. 그 사랑과 은혜로만 진실한 변화가 시작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다 변화되고 나서 받아주시는 사랑이 아니다. 먼저 사랑을 받고 그때부터 변화되게 하는 사랑이다.
-하나님의 지혜와 은혜의 풍성함이 깊고 넓다(9절). 자신을 배반한 백성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누가 다 헤아릴 수 있을까? 구원을 위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경륜을 누가 다 이해할 수 있을까? 신앙의 걸음은 다 이해하여 걷는 길이 아니다. 항상 똑바로 걷는다고 하지만 의롭지도 못하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자주 넘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포기를 모르는 그 사랑이 우리를 다시 걷게 한다. 그러므로 다 해명되지 않더라도 연약하여 자주 넘어지더라도 포기하지 말고 주의 사랑에 매여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야 하리라.
*죄의 무게에 따라 심판의 무게가 정해진다면, 죄를 범한 기간만큼 하나님과 멀어진다면 하나님 앞에 똑바로 설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하나님은 제대로 된 회개를 통해 누적된 진노를 한 번에 허무신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시 30:5)”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죄를 짓고 비틀거리는 상황을 끝내고 어서 말씀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호소한다. 호세아가 가르치는 회개는 “앗수르도, 군마도 의지하지 않을 것이며, 우상을 섬기지도 않겠노라고 결단하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자기 모습을 자각한다. 이전 것을 먼저 정리해야 본래 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
*본문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고 자기 백성을 기꺼이 사랑하는 성경에서 손꼽히는 명장면 중의 하나다. 하나님은 메마른 대지를 적시는 이슬, 열매가 풍성한 잣나무 같은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회복된 이스라엘은 이슬을 공급받고 자란 백합화와 레바논 백향목, 감람나무에 빗대어 묘사한다. 우상이 주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생명과 풍요를 누리게 된다. 이스라엘의 평안과 열매를 책임지시는 분은 하나님밖에 없으시다.
*지혜로운 사람, 총명한 사람은 호세아가 전한 하나님의 사랑과 분노, 징계와 심판, 치유와 회복의 메시지를 깨닫고 이해할 것이다. 이는 삶을 통해 증명하게 된다. 깊은 죄로 인해 무서운 심판 아래 놓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호세아를 통해 전해진 마지막 메시지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라는 호소다. 이 호소가 선명하게 들리는가? 아직 희망이 있다는 의미다.
*주님,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 붙들고 하나님만 섬기며 살겠습니다.
*주님, 죄책감과 후회의 종교 생활이 아니라 돌이킴과 회복의 은혜가 넘치는 신앙생활을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