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은혜를 저버린 북이스라엘의 최후 [암 2:4-16]
 – 2024년 12월 05일
– 2024년 12월 05일 –
 
여로보암 2세의 통치기는 북이스라엘 역사 이래 가장 넓은 땅과 풍부한 경제적 번영을 자랑하던 시대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에서 나오는 혜택은 일부 기득권층에 편중되었을 뿐이었다. 대부분 백성은 그리 풍요롭지 못했다. 오히려 여러 어려움으로 빚을 져야 했고 부유층들에 의한 횡포와 억압을 참아야만 했다. 아모스의 신탁은 여기에 초점을 맞춘다. 이방을 향한 신탁들은 전쟁 중에 벌어지는 잔혹성을 문제 삼았다면, 이스라엘을 향한 신탁은 일상에서 자행되는 잔혹성, 즉 폭력과 억압을 문제 삼았다. 이스라엘을 향하는 잣대는 이방 나라들보다 훨씬 더 엄격했다.
 
본문은 4~5절의 유다의 죄와 6~16절의 이스라엘의 죄를 언급하는 부분으로 구성된다. 유다에 대한 신탁은 이방 나라들에 대한 심판의 사이클이 동일하게 반복되지만, 이스라엘의 죄를 언급할 때는 심판의 마지막 부분이 등장하지 않은 채 마무리된다. 즉, “불을 보낸다”라는 표현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1. 유다에 대한 심판(4~5절)
열방을 향한 심판 선언에 이어 남 유다와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신탁이 이어진다. 특이한 것은 열방에 대한 심판 사이클과 동일하게 남 유다를 대하신다는 점이다. 유다의 서너 가지 죄로 인하여 벌을 돌이키지 않을 것이며 유다에 불을 보내겠다고 하신다.
 
4절을 통해 유다가 지은 죄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유다의 죄는 하나님 앞에 직접적으로 지은 죄인 율법에 불순종한 죄인 것이다. 따라서 유다의 죄는 더 엄중하게 다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2.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6~16절)
6절에서 남 유다에 이어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예고가 시작된다. 열방과 남 유다에 대한 심판 선언 이후 마지막으로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선언이기에 문맥상 앞선 열방과 남 유다와 같이 북이스라엘도 심판하시겠다는 의지가 드러난 것이다. 아모스서의 1차 청중이었던 북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상당한 충격이었을 것이다.
 
열방에 대한 심판 선언 사이클의 맨 마지막에 반복적으로 “불을 보내리라”라는 선언이 7~9장의 불 심판 환상(7:4~6)에 가서야 등장한다. 이는 심판 사이클 중에서 “~의 서너 가지 죄”가 북이스라엘의 경우에는 3~6장에 걸쳐 매우 자세하게 설명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열방과 유다의 심판 사이클이 2~4구절 정도의 분량이었다면, 북이스라엘에 대한 사이클은 2~6장에 걸친 매우 방대한 분량으로 고발되고 있다. 이로써 아모스 선지자의 중심 메시지는 북이스라엘에 대한 심판 선언임이 분명해진다. 또한 이스라엘이 죄를 떠나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오래 설명하셔야 하는 하나님의 아픔 마음,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뜨거운 마음을 통찰할 수 있어야겠다.
 
6~9절은 북이스라엘의 범죄 사항을 기록한 자세한 목록이다. 열방의 죄는 간략하게 기록됐지만, 이스라엘의 죄는 매우 자세하게 기록했다. 유다의 죄를 기록할 때도 여호와의 율법을 멸시했다고 간략하게 기록한 것과 비교된다. 이스라엘의 죄는 이웃을 향한 경제적인 죄, 힘없는 자들을 압박한 죄, 음란한 죄, 우상을 섬긴 죄 등이다. 하나님은 9절에서 아모리 사람들, 즉 가나안 사람들을 심판하셨던 것을 상기시켜 주시는데, 죄악의 결과는 멸망일 수밖에 없다는 경고다.
 
10~12절에서는 이스라엘의 죄에 대한 설명이 더 깊어진다. 먼저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시며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택하셨다는 것을 상기시키신다. 따라서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민족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사랑해야 했다는 사실을 말씀하시려고 한 듯하다. 11절에서는 이스라엘 중에서 선지자와 나실인이 나오게 하셨다고 언급하신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하는 자이며, 나실인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하나님께 특별하게 구별된 자다. 이들을 언급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거룩하게 살게 하도록 하나님께서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이런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12절은 이스라엘이 나실인과 선지자의 역할을 멸시하여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방해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실인에 포도주를 준 것인데, 포도주를 마시면 나실인의 서약이 깨지게 되고 만다. 또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인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말라고도 했다. 이런 언급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려는 마음이 없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13~16절에서는 여러 가지 반복적 표현 기법을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엄중하게 내려질 것을 경고하고 있다. 13절은 곡식 단을 가득 실은 수레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누르실 것이라고 말하는데, 이는 심판이 엄중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14절부터 16절까지의 내용도 “그 어떤 사람도 심판의 엄중함에서 벗어날 수 없다”라는 사실을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빨리 달음박질 하는 자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은 도망가는 일에 가장 능한 사람조차 도망갈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줌으로써 그 어떤 사람도 심판에서 도망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강한 자도 힘을 낼 수 없고, 용사도 목숨을 구할 수 없고, 활을 가진 자도 설 수 없고, 말 타는 자도 목숨을 구할 수 없고, 심지어 용사 가운데서 마음이 굳은 자도 결국 벌거벗고 도망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목록은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돌아와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 심판의 사이클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속히 돌아와 하나님의 심판이 이르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
 
 
 
나는?
-아모스의 고발과 하나님의 심판은 열방의 이방 나라들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백성인 남 유다에 이어 북이스라엘로 이어지고, 언약 백성인 그들에게 더 큰 책임을 물으신다.
 
-언약 밖에 있는 이방 나라와는 다른 기준으로 유다를 심판하신다. 유다에게는 이방 나라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태도는 물론이고 하나님과 그분이 주신 언약에 대해 신실해야 할 책임을 물으신다(4~5절). 유다의 패역은 단지 윤리적인 죄악일 뿐 아니라 언약을 파기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백성이 율법을 배척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거절하는 행위이다. 또 우상을 숭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결별을 선언하는 것이나 다름 없다. *하나님께서 기록된 말씀과 동일한 기준과 잣대로 지금 우리의 삶에 적용하신다면 나는 어떤 부분이 문제가 될까? 하나님과의 관계(신앙적인 영역)일까? 아니면 사람과의 관계(윤리적 영역)일까?
 
-북이스라엘에는 동족에게 범한 사회 윤리적인 죄를 지적하신다(6~8절). 돈을 쥔 자들과 법을 쥔 자들이 서로 결탁하여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을 짓밟았다. 빚 때문에 가족이 노예로 내몰리고, 저당 잡힌 옷을 되돌려받지 못해 추운 밤을 보내는 자들도 있었다. 빼앗긴 자들은 눈물을 삼키고, 빼앗은 자들은 포도주를 삼키며 밤을 보냈다. 그뿐만 아니라 가족 안에서도 성 윤리가 무너진다. 가난한 자의 복음, 언약 백성다운 삶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하나님을 버린” 마음속에 율법에 대한 존중과 이웃을 향한 자비가 남아 있을 리 있겠는가!
 
-율법을 멸시한 유다와 예루살렘은 더는 거룩한 도성이요, 세상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화염에 휩싸일 것이다. 북이스라엘 역시 사회 약자들을 유린한 범죄와 아버지와 아들이 한 여인에게 드나들 정도로 문란했던 성적인 범죄, 불의와 탐욕에 물든 채 드나들어 성전을 더럽힌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를 치신 권능으로 이스라엘을 치실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오늘이 있게 하신 분이다. 속박과 압제의 그늘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산지로 이끄는 분이시다. 하나님 없는 이스라엘이란 생각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이스라엘은 지난 역사를 통해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잊었다. 더는 빗나가지 않도록 그들 곁에 선지자를 보내시고 나실인을 구별해두셨지만, 이런 안전장치조차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렸다(9~12절). 아…. 이스라엘아…. 어찌할까….
 
-압제 받던 폭정의 땅, 애굽에서 끌어내 위태로운 결핍의 땅 광야를 안전하게 지나서 약속하신 풍요의 땅 가나안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약자들을 압제해서는 안 되었다. 땅이나 땅의 소산으로 자기만 배를 불리거나 다산과 번영을 위해 우상을 숭배해서도 안 되었다. 은혜를 망각할 때 이웃에게 함부로 하게 된다.
 
-심판의 날에는 누구도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 심판의 범위가 이방 나라들처럼 한 도시나 통치자가 아닌 이스라엘 전체에 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심판하시는 강도 높은 심판이 될 것이다(13~16절). 어쩌다 잘 넘어간 죄악이 하나님의 묵인이 아니기에 이제라도 멈추고 돌아서야 할 것이다.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의 참된 통치자임을 일깨우시고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나실인을 통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성별 되고 헌신된 삶의 모범을 보게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신들에게 불편한 소리 하는 선지자의 입을 막았다. 나실인처럼 되기보다는 나실인을 자기들처럼 만들려고 했다.
 
 
 
*주님,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주님의 말씀에 청종하고 거룩한 백성으로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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