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반응이 사라진 시대[마 11:11-19]
 – 2023년 02월 15일
– 2023년 02월 15일 –
세례 요한에 대한 주님의 설명이 이어진다. 주님은 요한을 향하여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그보다 더 큰 이가 없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가 온 것이 구약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매우 직설적으로 묘사하신다. 세례 요한에 대한 하나님 나라에 입각한 역사적 평가였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시작을 알리는 “엘리야”였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가 전하는 “오실 메시아”이시다. 하나님 나라의 역사적인 무대애서 세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는 긴밀하게 묶여 있었다. 하지만 이 세대는 이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했다. 오늘날은 어떨까? 우리는 예수님을 제대로 바라보고 있을까?
 
 
1.세례 요한의 역사성(11-15절)
주님께서는 요한이 바로 “그 선지자(10절)”라고 밝히신 후에 그의 역사적인 위치를 정의하셨다. 그는 “여자가 나은 자 중에 가장 큰 사람이다”. 이미 선지자들보다 더 나은자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그 누구보다 더 큰 자라고 하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정의하신 것일까?
 
이는 하나님 나라의 역사에서 그가 감당한 시대적인 역할 때문이었다. 앞서 주님은 세례 요한의 금욕적인 삶과 메시아 되신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적인 사명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하나님 나라를 가져 옷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지만, 그의 길을 준비한 사람은 요한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시대에 꼭 필요했던 사람이지만, 정작 새 시대가 요한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선지자로서의 역할와 위치가 분명했던 것이다. 그것은 그가 옴으로 옛 시대의 결말을 고한다. 옛 시대가 마감 되어야 새 시대가 열린다. 이와 같은 역사적인 전환점에서 세례 요한은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한 위대한 사명을 맡은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가장 큰 자인 것이다. 
 
*그는 옛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다. 그의 사명은 옛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 시대를 여는 것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런 세례 요한에 대하여 더 충격적인 선언을 하시는데, 이런 위대한 세례 요한도 하나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 보다 못하시다는 것이다(11절). “하나님 나라의 지극히 작은 자”는 옛 시대에 속한 이들이 맛보지 못한 하나님 나라를 경험한 자로서 새 시대 새 나라에 속한 자를 가리킨다. 
 
*설사 믿음이 적거나 역할이 미미한 자라할지라도 그가 하나님 나라에 속해 있다면 옛 시대에 속한 위대한 선지자 요한 보다도 더 크다는 것이다. 아무리 화려한 옛 시대를 풍미한 중심 인물이라할 지라도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속한 것이 겉으로 보기에 초라해도 더 낫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의 때부터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이 오실 길을 예비하는 마지막 선지자였다. 그래서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의 때까지 마무리가 되는 것이다.주님께서는 이렇게 요한이 마지막 선지자임을 밝히시면 우회적으로 주님께서 세례 요한이 예비한 길로 오신 구약에 약속된 메시아 이심을 밝히신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주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님께서는 “귀 있는 자들” 즉 믿음이 있어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음을 강조하신다. 
 
*세례 요한의 상황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옥에 갇혀 있는 상황 가운데 있었다. 이와 같은 상황은 주님의 말씀을 잘 이해 할 수 없도록 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이해하면서 듣는 것이 아니라 “들을 귀” 있는자가 듣는 것이다. 즉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들을 귀가 없어 이후 계속 방황한다. 
 
 
 
2.귀 있는 자(믿음으로 사는 자)가 복이 있다(16-19절)
귀 있는 자 곧 믿음이 있다는 것은 주님의 가르침과 세례 요한의 외침을 듣고서 함께 춤추고 기뻐하기도 하고, 애통하기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세대는 반응하지 않는다(16-17절). 
 
오히려 “이 세대”(이스라엘, 하나님 나라를 수용하지 않는 이들, 세상)는 이렇게 반응을 한다. 요한은 귀신이 들렸다고 하고, 주님은 죄인의 친구라고 비난한다(18-19절).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에 대한 세상의 거절과 핍박에 대해 경고하셨다. 그런데 세례요한과 주님의 사역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장터에서 피리를 불어도(결혼식) 춤추지 않고, 슬피 울어도(장례식) 함께 아파하지 않는다. 친구이면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해야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실제로 세례 요한의 외침에도, 주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강팍한 이 세대는 춤추지 않고 애통하지 않는다. 이 세상은 그저 무반응과 냉담으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세상이다. 
 
단지 반응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모함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요한이 금식하는 것에는 귀신이 들렸다고 가짜 뉴스를 퍼뜨리고, 주님의 귀신이 물러가는 권능은 귀신의 왕의 힘을 입어 일한다고 터무니 없는 “확증편향의 가짜 뉴스들”을 터무니없이 재잘거린다. 
 
또 주님께서 죄인들을 식탁 공동체로 부르셔서 벌어진 하나님 나라의 잔치에 응하지도 않고 오히려 극단적인 표현으로 주님을 비난한다. 잘못된 종교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철저한 무지, 그리고 주님의 그리스도되심을 깨닫지 못하여 주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의 가르침과 선포와 역사를 눈과 귀를 막고 스스로 전통에 얽매이고 갇힌 심각한 모습들을 보여주신다. 
 
 
*그러므로 귀 있는 자로 사는 것이 복이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복이 있다. 
 
 
 
나는?
-진정한 복은 애통해 하는 것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이다. 긍휼히 여기고 주님의 혼인잔치의 초청에 응한 이들이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반응하는 삶이다.
 
-장터 이야기의 본질은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시대“의 전형을 보여준다. 의미가 공유되지 않고 재미를 찾아볼 수 없는 대화로 채운다. 그들은 요한에게도 실망했고, 주님에게서도 만족하지 못했다. 그들은 스스로 진리를 잘 안다고 자부하는만큼 기득권을 수호하는 것에 더 강하게 반응하였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느냐?“를 되풀이 할 뿐이었다. 
 
-구약을 가장 잘 아는 그들이 새 시대를 여신 주님을 가장 강하게 핍박하였다. 그들은 스스로 말씀이 가득하였다고 자부했지만, 정작 말씀이신 주님은 영접하지 않는다. 말씀으로 하나님 나라를 시작하신 주님을 대적한다. 
 
-옛 시대가 종결되었음에도 그 시대를 고수하는 것은 새 시대를 여신 주님에 대한 도전이다. 
 
-새롭게 시작된 하나님 나라에 반응이 사라지다니… 반응이 없다면 어떻게 변화될 수 있을까?
 
 
*오늘은 주님께서 예비하신 더여호수아센터 입당예배릉 진행한다.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주님의 제자들을 세우는 터전으로 허락하여 주신 놀라운 곳이다
 
*이 센터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에 먼저 반응하여 이를 전하는 생동하는 제자들이 세워지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나의 걸음도 이와 같기를 결심해 본다
 
 
 
*주님, 말씀하시는 내내 답답함이 느껴집니다. 이 시대도 이렇게 답답하지 않았으면 좋겠으나 여전해서 속상합니다. 
*주님, 오늘은 주님의 일하심에 올바로 반응하는 하나님 나라 백성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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