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빛이신 예수님, 진리이신 예수님…. [요 1:9-18]
 – 2022년 01월 02일
– 2022년 01월 02일 –
빛이신 예수님이 오셨다. 그 이후…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심을 증언하기 위해 기록했다. 세례요한을 보내신 하나님의 목적은 분명하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분명하게 전하고자 했다. 요한은 일곱가지의 표적 기사에서 “나는 ~이다(에고 에이미)”라는 표현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한다. 출 3:14에서 “나는 스스로 있는 자(에고 에이미)”라고 밝히신 대로 요한은 그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증언한다.

1.참 빛이신 예수님(9절)
출애굽 당시 애굽의 어둠에 억압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빛으로 오셔서 출애굽을 이끄신 하나님께서 이제 죄와 사망의 억압에 갇힌 세상을 구하시려 세상에 오셨다. 흑암의 재앙 가운데 유일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센땅 만은 빛이 비추었던 그 모습을 상기 시키시며 예수님은 세상을 비추는 참(유일한 구원의) 빛이심을 증언한다.

*흑암에 갇혀 있으면서 고샌 땅에 비치는 빛을 보고서도 하나님을 거절한 애굽의 바로와 사람들 처럼 세상은 구원의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을 보면서도 외면한다. 하지만 그 빛을 받아들이고 믿으면(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이주어진다12절).

그러나 이 빛을 정작 자기 백성들(이스라엘)은 외면하였다. 율법 준수의 억압 아래 있으면서도 그것이 구원 받을 유일한 길로 오해하여 “말씀과 빛이신 예수님을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얻게 되는 구원”을 외면했다. 정확히 말하면 율법 준수(준행)의 성취감에서 오는 구원의 느낌을 버리지 못했다. 그저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다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것이 어디있나?…라는 전통과 관습, 문화에 얽매인 고정관념이 참 빛되신 예수님의 빛을 외면하게 하였다.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이런 이스라엘의 모습이 있지 않겠나? 지나친 율법주의, 교회주의, 공로주의 영향은 예수님 안에서 구원의 기쁨을 순식간에 억압과 폭력으로 얼룩지게 한다. 지금 내가 예배, 기도, 헌금, 헌신 등을 일정 기준이상 행하지 못하면 안 되는 것으로 구원의 은혜와 감격, 자유함의 환희가 대치되어 버렸다. 얼마나 안타까운가?

*참 빛을 보고서도 그 빛 안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바라만 보고 있다.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말씀과 참 빛의 하나님되신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있을까?


2.말씀
단순하다. 말씀의 하나님되신 예수님을 더욱 바라보는 것이다. 말씀되신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은 말씀을 바라본다는 의미와 상통한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예수님의 새롭게 창조하심을 기대하면 된다. 신뢰하면 된다.

예수님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1절), 창조시에 함께 일하셨고, 자기를 통해(말씀하심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3절). “은혜와 진리(카리스 카이 알레데이아)”는 하나님의 성품인 “인자와 진리”를 드러내는 말이다.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심이 확실한 것은 그 은혜가 의인과 악인 모두에게 비추는 빛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진리의 하나님이신 것은 진리따라 공의롭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드러내는 말이다. 하지만 진리를 적용하며 공의만으로 판단하면 용서받아 구원받을 죄인은 한 명도 없다. 반대로 사랑만으로 이 세상을 대하시면 하나님의 공의로움이 무너진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는 인자와 진리를 모두 충족시킨다. 상호모ㅜㄴ이 분명하나 그 십자가를 통해 은혜와 진리가 증거 된다.

사람은 십자가를 어리석다고 했지만,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를 세우고 은혜도 완성하는 그야말로 “신의 한수” 이셨다.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였다(고전 1:23,24).

*이 모든 것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다. 말씀으로 창조된 세상을 말씀으로 통치하시는 대로, 말씀의 공의와 사랑이 숨쉬도록 이끄셨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의 말씀을 성취하는 곳이다.


3.그러므로 증언하지 않을 수 있겠나!
요한은 세례요한을 3장까지 빈번하게 등장 시키며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증언하게 하신다. 이는 이 복음서를 읽는 제자들의 삶에서 예수님께서 끝까지 당부하셨던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성취이다. 하나님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구원자로서의 삶을 시작하는 공생애 초기에도, 오직 예수 외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이 없음을 늘 강조하셨다.

증언하는 “증인(말투스)”는 때로 “순교자”로 번역되기도 한다. 빛을 외면하는 저들에게, 말씀으로 날마다 재창조의 역사를 감당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저들에게 “순교자”의 각오로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증언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나는?
-말씀이시고 빛의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예수님을 자기 마음대로 보고,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 마음대로 들으며 산다는 것이다. 즉, 보고 싶은 대로, 듣고 싶은 대로 산다.

-일상에서 이런 결정은 지극히 상식적인 “자기 중심적 대답”이다. 하지만 하나님이신 예수님을 영접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과 제자 된 성도들도 그래야 할까? 아니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대로가 아니라 성경에서 증언하는 대로 바라보고 들을 수 있는 눈과 귀가 필요하다. 영안이 열렸다는 말의 의미는 아무리 인간적인 표현들이 난무한다할 지라도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증언하는 말에 삶을 거는 것을 말한다.

-‘순교자’라는 의미도 “증인”은 빛이 비추어도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며, 영접하지 않는 이들에게 ‘순교자’의 각오로 예수님을 증언하게 하는 것이 옳은 길임을 각성 시킨다.


*주님, 말씀이 나를 아침마다 새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빛 이셔서, 진리 이셔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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