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광야의 외치는 소리라고 밝힌 세례 요한은 자신이 외친 예수님이 누구인지 소개한다. 과연 예수님은 그가 고백한 대로 자신이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할 분이실까? 또 요단강에서 만난 여러 사람들이 예수님을 증언한다. 그들이 증언하는 예수님은 누구신가? 우리는 예수님을 어떻게 증언해야 할까?
1.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 36절)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j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j ‘제거하는’ 또는 ‘치워 없애는’으로 번역할 수도 있음)_(새번역_29절)”
“지다”라는 단어는 “제거한다, 치워 없앤다”는 의미로도 번역 된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제거하는, 혹은 치워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증언하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사명이다. 예수님은 모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어린 양(제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성경에서 어린 양은 한 번의 죄를 일시적으로 없앨 수 있었으나, 하나님에게서 오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시는 “말씀 이시고 참 빛이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게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이 사명이 담긴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주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가까운 친척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친족(눅 1:36)으로 기록하였다. 성경의 기록에는 없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이종사촌’쯤 된다. 마리아의 어미니 안나와 엘리사벳 어머니 소베가 자매란 이야기다.
누가복음에는 마리아가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고서 유대 산골의 엘리사벳을 찾았다고 기록한다. 그때, 복중의 아기가 뛰놀았다고 했는데, 이는 단지 태중에서 움직였다는 의미보다 좀 더 극적이다. 당시 엘리사벳은 임신 6개월차였다. 남편 사가랴는 성전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때 가브리엘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름을 ‘요한’이라고까지 명명 받았다. 이 아이가 엘리야의 심정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될 것을 예고하였다. 이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유대 산골에서 숨어 있던 중 이종사촌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이때 태중의 아기가 갑자기 태동을 하는데, “뛰놀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격하게 반응한다. 임신 6개월차의 태동이 과연 이 정도일까? 그만큼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보고 엘리사벳이 이렇게 소리친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눅 1:42~43)”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기 요한이 인지하고 반가워 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가까운 친척인 예수님과 요한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를 “메시아이신 주님”으로 인식했고 이것을 요한에게 자라는 동안 누누이 가르쳤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30여년이 지난후 예수님과 요한이 요단강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똑같은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입에서 고백 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요단강에서 이제껏 세례를 베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증언한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새번역_31절)”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했던 사역 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었다. “물에 잠기다, 물로 씻는다”라는 의미의 세례는 죄인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이들 가운데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될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시다.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이 세례를 자청 하셨다는 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자신의 온 몸에 스스로 짊어 지셨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3년 후 자신이 받아야 했던 십자가의 수난의 예표인 것이다. 이에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언한 것이다.
2.하나님의 아들
이 기막힌 세례 현장에서 요한은 자신이 행하고 있던 요단강에서의 세례 사역의 의미를 확인 받는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이스라엘 가운데 그의 오심을 알리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자신부터 확인 하게 된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새번역_32-34절).”
세례를 받으신 후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을 때까지도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지 못했다.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 양이라는 것을 자라나는 동안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 예수를 보자 마자 알아 보았던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세례 받기를 자청하셔서 베푼 직후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일은 그가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게 하였다.
*그것은 성령께서 알려 주셨고, 보게 하셔서 증언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고 요한에게 깨우쳐 주셔서 증언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께서 깨우치고 보게 하셔서 순종하여 증언하도록 감당하는 사역이다. 나의 지식, 논리와 주장으로 나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고 보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언하게 하신다. 내가 걸어가야 할 목회의 자세가 이래야 한다.
*성령께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대로 증언하며 이 길을 가야 하리라!
*성령께서 보게 하신 것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는 어린 양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세례요한은 이를 증언하였다. 내가 증언할 예수님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3.첫 만남, 안드레의 증언(35-42절)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제자들과의 첫 만남이다. 사도 요한은 이 만남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 제자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열망하는 기대와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그 사모함을 따라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나아와 새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말씀을 듣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먼저 세례요한이 요단 강가를 거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절)”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른다(37절). 그들은 안드레와 빌립이었다. 이후 안드레를 통해 베드로가, 빌립을 통해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된다.
세례요한의 증언을 듣고 안드레와 빌립이 먼저 예수님과 만나 시간을 보낸 후에 베드로와 나다나엘에게 전한 것이다. 그들의 증언은 어디에서 왔을까? 세례요한의 증언에서 시작되어 예수님과 “그 날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다.
요한은 그렇게 함께 거한 시간 동안의 일을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함께 거한 후 예수님의 증언자로 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그를 증언한다! 증언할 수 밖에 없다!”
그들중 안드레의 증언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41절)”이다. 안드레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낸 후 정확히 그가 누구신지 증언한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대로 예수님과 함께 하며 이를 자기의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신앙은 결국 들은 말씀이 나의 고백을 거쳐, 또 한 명의 증인으로 서는 것이다. 단지 감정적인 믿음의 고백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함께 하게 되면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세례요한의 증언은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말씀하신대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을 듣고 보고, 읽으며 만난다. 그럼에도 증언하지 않는다니….
-예수님은 말씀(창조주), 참 빛(구원자), 어린 양(대속물)이심을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깨닫는 다면 이를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증언자로 선 것이나,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증언하는 모습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도록 돕고 계신다. 사도행전 이후에나 성령의 역사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출생 하실 때, 자라나는 동안, 그리고 성인이 된 예수님과 세례요한에게서도 성령의 도우심은 이미 있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하나님 나라 비밀이 이해된다. 성령께서 보게하고, 듣게 하실 때 증언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성령께서 알게 하시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 되고, 그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풍성할 수록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 하신 것 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의 자리에 “와 보라!”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세상이 혼란할 수록 사람들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들에게 “와 보라!”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만나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제자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와 보라!”고 머뭇거림 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이렇게 증언하도록 도우신다.
*주님, 주님과 늘 함께 하여 주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어린 양이심을 증언하도록 성령께서 이끄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주님과 늘 함께 하여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
1.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29, 36절)
“다음 날 요한은 예수께서 자기에게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시오, 세상 죄를 j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입니다.(j ‘제거하는’ 또는 ‘치워 없애는’으로 번역할 수도 있음)_(새번역_29절)”
“지다”라는 단어는 “제거한다, 치워 없앤다”는 의미로도 번역 된다. 예수님을 세상 죄를 제거하는, 혹은 치워 없애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증언한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증언하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사명이다. 예수님은 모두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어린 양(제물)로 이 땅에 오셨다.
구약성경에서 어린 양은 한 번의 죄를 일시적으로 없앨 수 있었으나, 하나님에게서 오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죄인들의 죄를 단번에 해결하시는 “말씀 이시고 참 빛이신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의 육신의 아버지 요셉에게 하나님의 천사 가브리엘이 이 사명이 담긴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주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가까운 친척이다.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을 친족(눅 1:36)으로 기록하였다. 성경의 기록에는 없지만,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로 ‘이종사촌’쯤 된다. 마리아의 어미니 안나와 엘리사벳 어머니 소베가 자매란 이야기다.
누가복음에는 마리아가 가브리엘로부터 수태고지를 받고서 유대 산골의 엘리사벳을 찾았다고 기록한다. 그때, 복중의 아기가 뛰놀았다고 했는데, 이는 단지 태중에서 움직였다는 의미보다 좀 더 극적이다. 당시 엘리사벳은 임신 6개월차였다. 남편 사가랴는 성전에서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때 가브리엘로부터 잉태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이름을 ‘요한’이라고까지 명명 받았다. 이 아이가 엘리야의 심정으로 메시아의 오심을 예비하는 선구자가 될 것을 예고하였다. 이 기막힌 이야기를 듣고 유대 산골에서 숨어 있던 중 이종사촌 마리아의 방문을 받은 것이다. 이때 태중의 아기가 갑자기 태동을 하는데, “뛰놀다” 라고 표현할 정도로 격하게 반응한다. 임신 6개월차의 태동이 과연 이 정도일까? 그만큼 신기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보고 엘리사벳이 이렇게 소리친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어머니가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가?(눅 1:42~43)”
마리아의 태중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엘리사벳의 태중에 있는 아기 요한이 인지하고 반가워 했다는 의미이다. 이렇게 가까운 친척인 예수님과 요한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태중의 아기를 “메시아이신 주님”으로 인식했고 이것을 요한에게 자라는 동안 누누이 가르쳤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30여년이 지난후 예수님과 요한이 요단강에서 마주했다. 그리고 똑같은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자기에게 나아오는 것을 보며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입에서 고백 되어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요단강에서 이제껏 세례를 베풀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이렇게 증언한다. “나도 이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내가 와서 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이분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하는 것입니다.(새번역_31절)”
자신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에게 알리려고 했던 사역 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실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었다. “물에 잠기다, 물로 씻는다”라는 의미의 세례는 죄인이라면 반드시 받아야 한다. 하지만 모든 이들 가운데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될 분이 있는데 바로 예수님이시다. 죄가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 예수님이 세례를 자청 하셨다는 것은 모든 인류의 죄를 자신의 온 몸에 스스로 짊어 지셨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3년 후 자신이 받아야 했던 십자가의 수난의 예표인 것이다. 이에 요한이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라고 증언한 것이다.
2.하나님의 아들
이 기막힌 세례 현장에서 요한은 자신이 행하고 있던 요단강에서의 세례 사역의 의미를 확인 받는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증언하기 위해, 이스라엘 가운데 그의 오심을 알리기 위해서 였다는 것을 자신부터 확인 하게 된다.
“요한이 또 증언하여 말하였다. “나는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에서 내려와서 이분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도 이분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게 하신 분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성령이 어떤 사람 위에 내려와서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임을 알아라’ 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언하였습니다(새번역_32-34절).”
세례를 받으신 후 하나님의 성령이 예수님 위에 머무는 것을 보았을 때까지도 요한은 예수님이 메시아이심을 확신하지 못했다. 세상 죄를 짊어진 어린 양이라는 것을 자라나는 동안 어머니 엘리사벳에게 들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그 예수를 보자 마자 알아 보았던 신기한 경험을 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푸는 것을 주저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스스로 세례 받기를 자청하셔서 베푼 직후 그의 눈 앞에 펼쳐진 일은 그가 “그리스도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하게 하였다.
*그것은 성령께서 알려 주셨고, 보게 하셔서 증언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증언하는 일에 하나님께서 직접 일하시고 요한에게 깨우쳐 주셔서 증언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은 성령께서 깨우치고 보게 하셔서 순종하여 증언하도록 감당하는 사역이다. 나의 지식, 논리와 주장으로 나의 말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시고 보게 하셔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언하게 하신다. 내가 걸어가야 할 목회의 자세가 이래야 한다.
*성령께서 보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대로 증언하며 이 길을 가야 하리라!
*성령께서 보게 하신 것은 결국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상 죄를 지는 어린 양이시면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세례요한은 이를 증언하였다. 내가 증언할 예수님도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3.첫 만남, 안드레의 증언(35-42절)
요한복음에만 나오는 제자들과의 첫 만남이다. 사도 요한은 이 만남을 매우 비중있게 다루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단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다가 예수님을 만나 제자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열망하는 기대와 열정을 가지고 있었고 이에 그 사모함을 따라 갈릴리에서 요단강으로 나아와 새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말씀을 듣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던 이들이었다.
먼저 세례요한이 요단 강가를 거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36절)”라고 말하는 소리를 듣고 두 제자가 예수님을 따른다(37절). 그들은 안드레와 빌립이었다. 이후 안드레를 통해 베드로가, 빌립을 통해 나다나엘이 예수님께 나아오게 된다.
세례요한의 증언을 듣고 안드레와 빌립이 먼저 예수님과 만나 시간을 보낸 후에 베드로와 나다나엘에게 전한 것이다. 그들의 증언은 어디에서 왔을까? 세례요한의 증언에서 시작되어 예수님과 “그 날 함께 거하면”서 예수님을 직접 경험한다.
요한은 그렇게 함께 거한 시간 동안의 일을 자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함께 거한 후 예수님의 증언자로 선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하면 그를 증언한다! 증언할 수 밖에 없다!”
그들중 안드레의 증언은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41절)”이다. 안드레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낸 후 정확히 그가 누구신지 증언한다. 세례 요한이 증언한 대로 예수님과 함께 하며 이를 자기의 고백으로 받아들였다.
*신앙은 결국 들은 말씀이 나의 고백을 거쳐, 또 한 명의 증인으로 서는 것이다. 단지 감정적인 믿음의 고백에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만나 함께 하게 되면 예수님을 전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세례요한의 증언은 “하나님의 어린 양,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요한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예수님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담대하게 외쳤다. 하지만 우리는 다르다. 말씀하신대로 모든 것을 이루신 예수님을 듣고 보고, 읽으며 만난다. 그럼에도 증언하지 않는다니….
-예수님은 말씀(창조주), 참 빛(구원자), 어린 양(대속물)이심을 예수님과 함께 거하면 반드시 깨달을 수 밖에 없다. 깨닫는 다면 이를 증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세례요한이 증언자로 선 것이나, 안드레가 베드로에게 증언하는 모습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언하도록 돕고 계신다. 사도행전 이후에나 성령의 역사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출생 하실 때, 자라나는 동안, 그리고 성인이 된 예수님과 세례요한에게서도 성령의 도우심은 이미 있었다.
-성령께서 깨닫게 하실 때 하나님 나라 비밀이 이해된다. 성령께서 보게하고, 듣게 하실 때 증언의 자리를 지킬 수 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은 성령께서 알게 하시고 성령께서 깨우쳐 주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증언하는 것이다.
-내가 예수님의 제자 되고, 그의 증인의 삶을 살 수 있는 것은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시간이 풍성할 수록 삶의 자리에서 주님의 증인된 삶을 사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 하신 것 처럼,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거하는 삶의 자리에 “와 보라!” 담대히 말할 수 있다.
-세상이 혼란할 수록 사람들은 의지할 것을 찾는다. 그들에게 “와 보라!” 담대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만나 함께 하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제자는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와 보라!”고 머뭇거림 없이 말하는 사람이다. 그만큼 예수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성령께서 이렇게 증언하도록 도우신다.
*주님, 주님과 늘 함께 하여 주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 어린 양이심을 증언하도록 성령께서 이끄실 것을 믿습니다.
*주님, 주님과 늘 함께 하여 담대하게 하나님 나라 복음을 증언하는 증인의 삶을 살겠습니다.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