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 혼인 잔치의 표적은 “진정한 안식과 기쁨의 시대”가 시작 되었음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포도주가 떨어져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잔치집은 하나님을 떠나 결핍과 수치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이스라엘(세상)의 실제였다. 주님은 이 잔치를 회복하러 오셨다. 잔치가 수치가 될 위기에서 돌항아리에 담긴 정결을 위한 물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말씀 한 마디로 포도주를 담은 돌항아리가 되었다. 말씀이신 주님의 새 창조셨다. 기존의 정결법을 포함한 율법(할례와 안식일 준수)는 잔치(이스라엘)의 수치와 결핍을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포도주는 그 수치를 덮는다. 결핍을 채웠다. 진정한 안식과 기쁨이 잔치집에 넘쳐났다. *율법으로 채울 수 없던 기쁨이 주님의 말씀으로 채워졌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성전청결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 공관복음은 단회로 기록되어 성전청결 사건을 계기로 고난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종교기득권자들에게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모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사건이 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요한복음에서는 그저 소동 쯤으로 여기듯 기록되었다. 물론 두 번째 성전청결 사건은 예수님을 잡아 들이는 과정이 된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신앙의 중심, 존재의 중심이었다. 로마 제국에서의 독립에 대한 열망의 중심에도 성전이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 1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과 오순절(맥추절), 초막절을 지키고 돌아 오는 것이 꿈이었다. 당시 매년 유월절이 되면 평소 15만쯤 되는 예루살렘의 인구는 최소 30만에서 50만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AD 66년의 유월절 기간 동안 드려진 희생제물은 양들만 무려 25만 5,600마리였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은 무려 40년동안 건축 중이었고, AD 63년이 되어서야 완성이 되었다가 AD70년에 완전히 파괴 되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무늬만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인구 이동과 막대한 희생제물의 소비들이 경제적인 이득의 수단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 시대 가야바 대제사장의 일족들은 성전 건너편에 형성되어 있던 희생 제물로 사용될 양들을 공급하는 목자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표식을 통해 다른 곳에서 구입해 오는 양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제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들의 양과 염소만 구입하도록 유도 한 것이다. 여기에 이방인의 뜰(솔로몬의 행각)에 성전세를 드릴 수 있는 환전소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도록 했다. 이곳을 통해 오가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은 불을 보듯 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먼 거리의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까지 오는 과정에서 흠이 날 수 있는 제물들을 현장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다. 이는 가나안 땅 안에 국한된 삶의 토대가 이미 로마의 지배 하에서 아프리카, 소아시아, 유럽 등으로 넓게 흩어진 상황에서 매우 효율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인 대책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제물들을 구입하고 성전세를 각지의 화폐에서 성전에서 규정한 대로 환전하는 장소가 문제였다. 그곳이 성전의 “이방인의 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전은 크게 3부분의 공간으로 구분 되었다. 가장 바깥공간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공안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면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우는 여인들의 기도장소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 성막 앞이 이스라엘이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전 뜰이었다.
*이방인의 뜰에 장사판을 벌여 놓은 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와 간구의 공간을 빼앗은 것이다. 그러면 혹여 이방인들이 여인의 뜰이나 성전 뜰까지 들어와 기도하라고 허락했다면 모를까… 아예 그곳을 기도의 장소에서 난장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며 누구든지(모든 민족들이) 이 전에 나와 하나님께 간구하며 은혜를 구하면 응답하시겠다는 복의 장소를 자신들의 종교적인 이익을 위해 이방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차단 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새번역_16절)”고 외치신 것이다. 마가는 이사야의 외침을 근거로(사 56:7)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 말씀하신 예수님의 절규를 빼놓지 않았다.
*만민, 즉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공간은 그들이 하나님의 긍흉과 은혜를 구할때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은혜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의 공간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이익창출의 공간, 즉 “탐욕의 공간”으로 변질 시켜 버렸다. 하나님의 마음, 뚯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혹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 없는 “난장”들이 서 있지 않는지 늘 살피고 살펴야 겠다. 나의 유익과 만족, 편리함과 합리적 판단이 결코 하나님의 마음과 뜻, 성경의 가르침을 앞서서는 안 된다.
1.예수님의 격노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성전청결 사건 속의 예수님의 모습이다. 얼마나 격노하셨을지 가늠이 간다. 대단한 분노이다. 더구나 공관복음의 기록이라면 성전청결 사건이 단회적이므로 이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③’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③시 69:9(새번역_17절)”을 생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예수님의 행동은 과격했고 단호했다.
요한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내쫓다, 돈을 쏟다, 상을 엎다(15절)” 등으로 표현했다. 그저 마음과 말로 분노를 표현하시지 않으셨다. 소와 양과 염소들을 몰아내기 위해 노끈으로 채찍까지 만드셨다. 채찍을 휘두르며, 상을 엎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로즈업 된다. 그 격노하는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격노”가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전을 청소하신 청결이 아니라 성전을 상대로 전쟁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느껴진다. “성전척결”이다.
포로된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재건하고 율법 중심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고분분투 했던 조상들의 신앙의 몸부림이 무색하게 이미 멸망직전의 유다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다시 그때로 돌아가 버린 모습에 한없는 자괴감까지 든다.
*문제는 이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정작 그저 “소동”쯤으로 보기만 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이 선지자적인 행동이라면 그에 걸맞는 표적을 보이라고 다그친다(18절). 유월절이면 소동이 일어날까 군대를 주둔시킨 로마의 군대가 출동하지 않았고, 성전 경비병과 제사장들 몇이 달려와 ‘이게 무슨 난동인가?’ 그저 소동으로 치부하는 느낌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격노조차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종교지도자들의 안목이 성전이 가져다 주는 탐욕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적어도 성전의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만으로도 이사야의 외침과 솔로몬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즉각 생각났어야 했다. 하지만 겨우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행동에 우려를 보내며,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는 생각에 다윗의 고백만(시 69:9) 겨우 떠올렸을 뿐이다.
*하나님의 격노를 어느 누구도 제대로 절감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이 정도로 무뎌져 버린 것이다. 겉모습의 화려한 성전은 더욱 빛나고 있었고 점점 더 완성되어 가고 있었지만, 정작 참 빛 되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격노를 깨우치지 못한다.
*말씀의 가르침에서 떠난 성전은 이미 겉만 화려한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했던 성전은 불과 20여년이 흐른 후 완전히 파괴 되었다. 하나님이 떠난 하나님의 집은 쇠락할 뿐이다.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예수님께서 회복할 기회를 주시지만, 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어둠에 묻힌 그들은 참 빛이신 예수님의 광명을 거부했다. 이제 어둠에 묻힐 일만 남은 것이다.
2.예수님의 선언(19절)
성전의 목적 중 우선되는 것은 “죄를 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물을 바쳐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성전은 용서가 선언되는 기쁨의 자리이다. 동시에 사죄를 선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바로 이 일을 위해 직접 오셨다. 예수님꼐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만으로도 성전은 이미 그 목적이 다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통해 계속 사람들의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그러니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실상은 성전의 속죄 제사를 통해 벌어 들이는 물질이 끊기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예수님은 성전이셨다. 인간이 만든 성전보다 더 완전한 성전이시다. 그를 구원주로 믿는 누구든지 사죄의 은혜 속에 기쁨의 잔치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스스로 확신하고 계셨다. 선지자된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라고 외치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말씀을 이해 하지 못하고 황당해 하는 유대인들의 반응에 비해 요한은 이에 대한 분명한 해석을 곁들어 놓았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우리는 성전된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흘만의 부활을 믿고 역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 되었다. 이 성전에 난장을 다시 불러 들이느냐,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뜻을 따라 거룩하게 유지하는냐의 싸움이 믿음의 싸움이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편리함과 편암함을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받아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세워 주셔서 나에게 허락된 “성령의 전”에 주님의 말씀과 뜻 외에 다른 난장을 펼치지 말아야 한다. 난장판은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내 삶이 하늘에 속하였음에도 세상의 난장들이 판치지 않도록 거룩하게 구별하며 살아야지…
나는?
-젊었을 때(지금도 무지 젊지만) 이 말씀을 읽으면 통쾌했다! 이야! 역시 예수님이야!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두렵다… 내가 예수님께 노끈 채찍을 맞을 수도 있는 그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의 탐욕을 위해 믿음의 가치, 신앙의 가치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타협 했는지 모른다. 나의 욕심이 언제든 상황과 여건이 되면 나를 그렇게 만들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서 예수님의 노끈 채찍이 두렵다.
-정작 그렇게 당연한 듯 탐욕에 물든 삶을 여전히 차리고 있는 내 모습 일 수 있어서 두렵다. 언젠가 주님께서 나의 탐욕의 상을 엎으시고 쏟으시며, 내 쫓으실 것을 인식도 하지 못한 채 자기만족에 취해 있을 수 있어 두렵다.
-장사치들에게 잠식 당한 기도의 자리… 오늘 나의 목회의 현장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경계해야지.. 조금이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타협하려는 합리성, 이성적인 편리함보다 “조금 더 불편하더라도” 성경의 가르침을 꼭 지켜야지… 노끈 채찍질 당하지 않으려면…
-나의 신앙의 터에 난장을 허락하지 않겠다. 오직 기도가 깊어지고 넓어지도록 경계하고 힘써야 겠다. 거룩함이 세속의 편리성에 위협 받을 때 기꺼이 거룩을 위해 불편하리라!
**주님, 격노하시는 그 모습 앞에 어찌할 바 모르겠습니다.
**주님, 난장을 다시 세우지 않겠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세우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노끈 채찍에 시선이 머뭅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회복해야 할 때 담대하게 손에 들 수 있어야 겠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님을 절감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성경대로”인 것을 다시 고백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방문(성전청결 사건)이 두 번 기록되어 있다. 이에 비해 공관복음은 단회로 기록되어 성전청결 사건을 계기로 고난에 직면하게 된다. 당시 종교기득권자들에게 더 이상 인내할 수 없는 모욕감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는 이 사건이 종교 지도자들의 기득권에 중대한 도전이 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런데 이런 반응이 요한복음에서는 그저 소동 쯤으로 여기듯 기록되었다. 물론 두 번째 성전청결 사건은 예수님을 잡아 들이는 과정이 된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신앙의 중심, 존재의 중심이었다. 로마 제국에서의 독립에 대한 열망의 중심에도 성전이 있었다. 그들은 어디에 있든 1년에 한 번 예루살렘 성전에서 유월절과 오순절(맥추절), 초막절을 지키고 돌아 오는 것이 꿈이었다. 당시 매년 유월절이 되면 평소 15만쯤 되는 예루살렘의 인구는 최소 30만에서 50만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AD 66년의 유월절 기간 동안 드려진 희생제물은 양들만 무려 25만 5,600마리였다. 예수님 당시의 헤롯 성전은 무려 40년동안 건축 중이었고, AD 63년이 되어서야 완성이 되었다가 AD70년에 완전히 파괴 되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무늬만 종교 지도자들은 이런 인구 이동과 막대한 희생제물의 소비들이 경제적인 이득의 수단으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님 시대 가야바 대제사장의 일족들은 성전 건너편에 형성되어 있던 희생 제물로 사용될 양들을 공급하는 목자들을 소유하고 있었고 자신들의 표식을 통해 다른 곳에서 구입해 오는 양들은 이런 저런 이유로 제물로 인정하지 않았다. 결국 자신들의 양과 염소만 구입하도록 유도 한 것이다. 여기에 이방인의 뜰(솔로몬의 행각)에 성전세를 드릴 수 있는 환전소와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판매하도록 했다. 이곳을 통해 오가는 막대한 경제적 이익은 불을 보듯 뻔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먼 거리의 곳곳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까지 오는 과정에서 흠이 날 수 있는 제물들을 현장에서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임에 틀림없다. 이는 가나안 땅 안에 국한된 삶의 토대가 이미 로마의 지배 하에서 아프리카, 소아시아, 유럽 등으로 넓게 흩어진 상황에서 매우 효율적이고 지극히 상식적인 대책 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런 제물들을 구입하고 성전세를 각지의 화폐에서 성전에서 규정한 대로 환전하는 장소가 문제였다. 그곳이 성전의 “이방인의 뜰”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성전은 크게 3부분의 공간으로 구분 되었다. 가장 바깥공간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공안이었다. 그리고 그곳을 지나면 ‘여인의 뜰이라고 불리우는 여인들의 기도장소다. 그리고 성전으로 들어가 성막 앞이 이스라엘이 희생제사를 드리는 성전 뜰이었다.
*이방인의 뜰에 장사판을 벌여 놓은 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와 간구의 공간을 빼앗은 것이다. 그러면 혹여 이방인들이 여인의 뜰이나 성전 뜰까지 들어와 기도하라고 허락했다면 모를까… 아예 그곳을 기도의 장소에서 난장으로 바꿔 버린 것이다.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솔로몬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며 누구든지(모든 민족들이) 이 전에 나와 하나님께 간구하며 은혜를 구하면 응답하시겠다는 복의 장소를 자신들의 종교적인 이익을 위해 이방인들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차단 시켜 버린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것을 걷어치워라.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새번역_16절)”고 외치신 것이다. 마가는 이사야의 외침을 근거로(사 56:7)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 말씀하신 예수님의 절규를 빼놓지 않았다.
*만민, 즉 이방인들이 기도하는 공간은 그들이 하나님의 긍흉과 은혜를 구할때 하나님께서 만나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은혜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의 약속의 공간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막대한 이익창출의 공간, 즉 “탐욕의 공간”으로 변질 시켜 버렸다. 하나님의 마음, 뚯과는 상관없는 것이었다.
*혹시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 성경의 가르침과 상관 없는 “난장”들이 서 있지 않는지 늘 살피고 살펴야 겠다. 나의 유익과 만족, 편리함과 합리적 판단이 결코 하나님의 마음과 뜻, 성경의 가르침을 앞서서는 안 된다.
1.예수님의 격노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에만 기록된 성전청결 사건 속의 예수님의 모습이다. 얼마나 격노하셨을지 가늠이 간다. 대단한 분노이다. 더구나 공관복음의 기록이라면 성전청결 사건이 단회적이므로 이 모습은 매우 충격적이다. 이런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은 ③’주님의 집을 생각하는 열정이 나를 삼킬 것이다’ 하고 기록한 성경 말씀을 기억하였다. / ③시 69:9(새번역_17절)”을 생각할 정도였다. 그만큼 예수님의 행동은 과격했고 단호했다.
요한은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내쫓다, 돈을 쏟다, 상을 엎다(15절)” 등으로 표현했다. 그저 마음과 말로 분노를 표현하시지 않으셨다. 소와 양과 염소들을 몰아내기 위해 노끈으로 채찍까지 만드셨다. 채찍을 휘두르며, 상을 엎는 예수님의 모습이 크로즈업 된다. 그 격노하는 행동 속에서 “하나님의 격노”가 보인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전을 청소하신 청결이 아니라 성전을 상대로 전쟁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느껴진다. “성전척결”이다.
포로된 바벨론에서 돌아와 성전을 다시 재건하고 율법 중심의 삶을 살아가겠다고 고분분투 했던 조상들의 신앙의 몸부림이 무색하게 이미 멸망직전의 유다 모습과 다를 바 없이 다시 그때로 돌아가 버린 모습에 한없는 자괴감까지 든다.
*문제는 이 모습을 지켜보는 이들은 정작 그저 “소동”쯤으로 보기만 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은 네가 이렇게 하는 것이 선지자적인 행동이라면 그에 걸맞는 표적을 보이라고 다그친다(18절). 유월절이면 소동이 일어날까 군대를 주둔시킨 로마의 군대가 출동하지 않았고, 성전 경비병과 제사장들 몇이 달려와 ‘이게 무슨 난동인가?’ 그저 소동으로 치부하는 느낌이다.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격노조차 분별하지 못할 정도로 종교지도자들의 안목이 성전이 가져다 주는 탐욕에 눈이 멀어 버린 것이다. 적어도 성전의 제사장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만으로도 이사야의 외침과 솔로몬에게 약속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이 즉각 생각났어야 했다. 하지만 겨우 제자들만이 예수님의 행동에 우려를 보내며, 이러다가 큰 일 나겠다는 생각에 다윗의 고백만(시 69:9) 겨우 떠올렸을 뿐이다.
*하나님의 격노를 어느 누구도 제대로 절감하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이 정도로 무뎌져 버린 것이다. 겉모습의 화려한 성전은 더욱 빛나고 있었고 점점 더 완성되어 가고 있었지만, 정작 참 빛 되신 예수님은 알아보지 못한다. 하나님의 격노를 깨우치지 못한다.
*말씀의 가르침에서 떠난 성전은 이미 겉만 화려한 건물에 지나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그토록 자랑했던 성전은 불과 20여년이 흐른 후 완전히 파괴 되었다. 하나님이 떠난 하나님의 집은 쇠락할 뿐이다. 무너지는 것은 시간 문제다! 그렇게 되기 전에 예수님께서 회복할 기회를 주시지만, 이를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어둠에 묻힌 그들은 참 빛이신 예수님의 광명을 거부했다. 이제 어둠에 묻힐 일만 남은 것이다.
2.예수님의 선언(19절)
성전의 목적 중 우선되는 것은 “죄를 속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제물을 바쳐 자신의 죄를 속하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 성전은 용서가 선언되는 기쁨의 자리이다. 동시에 사죄를 선포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예수님이 바로 이 일을 위해 직접 오셨다. 예수님꼐서 이 땅에 오셨다는 것 만으로도 성전은 이미 그 목적이 다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통해 계속 사람들의 죄 사함을 선포하셨다. 그러니 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죄목을 씌워 예수님을 죽이려 했지만, 실상은 성전의 속죄 제사를 통해 벌어 들이는 물질이 끊기는 것에 대한 분노였다.
예수님은 성전이셨다. 인간이 만든 성전보다 더 완전한 성전이시다. 그를 구원주로 믿는 누구든지 사죄의 은혜 속에 기쁨의 잔치가 시작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스스로 확신하고 계셨다. 선지자된 표적을 요구하는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19절)”라고 외치신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이 말씀을 이해 하지 못하고 황당해 하는 유대인들의 반응에 비해 요한은 이에 대한 분명한 해석을 곁들어 놓았다.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21절).”
*우리는 성전된 예수님의 죽으심과 사흘만의 부활을 믿고 역시 성령께서 거하시는 성전 되었다. 이 성전에 난장을 다시 불러 들이느냐, 오직 예수님의 말씀대로 그 뜻을 따라 거룩하게 유지하는냐의 싸움이 믿음의 싸움이다.
*나의 만족과 유익을 위해, 편리함과 편암함을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의 고난받아 죽으시고 사흘 만에 살아나셔서 세워 주셔서 나에게 허락된 “성령의 전”에 주님의 말씀과 뜻 외에 다른 난장을 펼치지 말아야 한다. 난장판은 자신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된다. 내 삶이 하늘에 속하였음에도 세상의 난장들이 판치지 않도록 거룩하게 구별하며 살아야지…
나는?
-젊었을 때(지금도 무지 젊지만) 이 말씀을 읽으면 통쾌했다! 이야! 역시 예수님이야!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두렵다… 내가 예수님께 노끈 채찍을 맞을 수도 있는 그들과 다를 바 없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의 탐욕을 위해 믿음의 가치, 신앙의 가치를 얼마나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타협 했는지 모른다. 나의 욕심이 언제든 상황과 여건이 되면 나를 그렇게 만들수 있음을 안다. 그래서서 예수님의 노끈 채찍이 두렵다.
-정작 그렇게 당연한 듯 탐욕에 물든 삶을 여전히 차리고 있는 내 모습 일 수 있어서 두렵다. 언젠가 주님께서 나의 탐욕의 상을 엎으시고 쏟으시며, 내 쫓으실 것을 인식도 하지 못한 채 자기만족에 취해 있을 수 있어 두렵다.
-장사치들에게 잠식 당한 기도의 자리… 오늘 나의 목회의 현장이 이렇게 되지 않도록 경계하고 경계해야지.. 조금이라도 성경의 가르침과 타협하려는 합리성, 이성적인 편리함보다 “조금 더 불편하더라도” 성경의 가르침을 꼭 지켜야지… 노끈 채찍질 당하지 않으려면…
-나의 신앙의 터에 난장을 허락하지 않겠다. 오직 기도가 깊어지고 넓어지도록 경계하고 힘써야 겠다. 거룩함이 세속의 편리성에 위협 받을 때 기꺼이 거룩을 위해 불편하리라!
**주님, 격노하시는 그 모습 앞에 어찌할 바 모르겠습니다.
**주님, 난장을 다시 세우지 않겠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세우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노끈 채찍에 시선이 머뭅니다. 성경의 가르침대로 회복해야 할 때 담대하게 손에 들 수 있어야 겠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 아님을 절감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성경대로”인 것을 다시 고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