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지도자 니고데모가 ‘밤’에 주님을 찾아왔다. 밤중의 깊은 신앙의 대화가 펼쳐졌다. 그는 홀로 찾아왔지만, 주님은 그를 통해 지도자들의 상태에 한탄하신다.
1.밤에(2절)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가 바리새인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이자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산헤드린(공회)의 의원임을 밝혔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외 서기관과 장로 등 70명으로 구성된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의 입법, 사법기구였다. 비록 로마의 지배하에 있어 총독의 동의가 있어야 했으나 사소한 범죄에 대해 체포할 권한과 민사 소송도 함께 감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율법의 최종해석권과 거짓 선지자를 가리는 일, 종교 감독권을 행사하였고, 미약했지만 자체 군대도 있었다. 무엇보다 종신직이어서 그 권한과 명예는 대단한 것이었다. 지방 도시에는 23명의 소산헤드린이, 아주 작은 도시에는 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재판소도 있었다. 산헤드린은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 권위의 꼭지점에 있는 기구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들로부터 재판을 받았다(눅 22:6).
니고데모는 그 산헤드린공회의 의원이었다. 매우 객관적이어서 바리새인들 중에서 매우 드물게 예수님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그가 왜곡된 정보에 좌우 되지 않고 직접 검증하고 판단하는 기질이 분명함을 보여준다. 요즘 흔히 쓰이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이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여 그것 외의 것은 무시하는 ‘확증편향’의 인물은 아니었다.” 주님께서도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10절)”으로 부르셨다. 또 그는 매우 따뜻한 성품의 사람이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주님의 편을 들어 핀잔을 받기도 했고(7:51-52),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 장례물품을 제공하였다(19:39).
그가 “밤에” 주님을 찾아왔다. 자신의 신분에 대낮에 대놓고 찾아 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대낮에 찾아 왔다면 분명 대척점에 서서 비난하거나 꼬투리를 잡아 곤란하게 하려고 찾아 왔을 것이다. 그런데 “밤”에 찾아왔다. 그 안에 주님과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주님께 인사하고 질문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열정, 겸손함”이 보인다.
당대 최고의 율법 석학들의 기구에서 존경받는 선생이었던 그가 주님의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의 소문도 들었을 테고, 성전청결 사건도 들었을 게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표적들(2:23)”을 직접 보면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대낮에 주님을 찾는 용기는 없었다. 그의 지위와 명예가 주님 앞에 나아오는데 분명 걸림돌이 되었다. 눈치를 보기 마련이기에 스스럼 없이 찾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지위와 명예의 걸림돌이 있음에도 “밤”에 찾아왔다. 그럼에도 그 밤에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식을 뒤흔들고 있는 주님의 표적들과 가르침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사람들의 이목과 방해를 받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진지하게 나누는 대화의 힘이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낮에 당당히 찾지 않고 밤에 찾아왔다고 아쉬워 하는 이들의 주장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겠다. “밤에라도” 진리의 열정을 식히지 않고 찾아 나온 것이 더 중요하다. 주변에 니고데모처럼 사회적 지위와 명망 때문에 쉽사리 대낮에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중에 “밤에라도” 주님을 찾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꼭 지위와 명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 낯 부끄러워서 도무지 얼굴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기 어려운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 이들은 꼭 “어두운 밤에라도” 주님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밤에라도” 만나 주셨기 때문이다. 특히 그렇게 찾아온 니고데모의 속 마음을 정확히 끄집어 내어 깊게 진리의 대화로 이끄셨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어쩌면 밤은 더 직접적으로 더 깊게 진리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일런지 모른다.
*어떤 이는 “밤에” 그 어둠의 익명성을 이용하여 죄를 탐닉한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어둠이 가려주는 자신의 얼굴을 주님 앞에 선명히 드러내고 진리 앞에 밝히 직면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과 사명을 듣게 되었다(14-15절). 주님은 “밤에라도”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땅의 이야기가 아닌 하늘의 이야기를 풀어 주셨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진리를 만나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 니고데모의 사회적인 위치, 종교적인 지위, 그가 백성들로 부터 받고 있는 명예가 예수님을 쉽게 만나기 위해 달려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표적과 가르침을 전해 들으며 무수한 시간, 진리를 고민하고, 이 진리를 직접 듣기 위해 “밤에” 찾아온 그의 모습을 마냥 비난해서는 안 된다.
*밤에라도 찾아 온 주님은 그에게 하늘의 비밀을 들려 주셨다. 진리는 밤 새워 이야기 할 때 잘 들린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제자들이 요단강에서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안드레나, 빌립은 밤새워 주님과 진리를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따라 나섰다.
*밤의 진리의 대화가 주는 기막힌 효과가 분명 있다. 밝은 대낮은 다른 것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우두운 밤 촛불 등잔 아래 조곤 조곤 나누는 진리의 대화는 오직 예수님만 보게 했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나는?
-오늘 묵상은 “밤”에 꽂혔다!
-본문의 내용보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밤에라도 만나주신 주님의 모습과 그 밤에 조곤 조곤 말씀해 주시는 “말씀의 하나님”되시는 주님의 모습이 도드라지게 보인다.
-주님은 “밤에라도 만나 주시는 분이시다. 아니.. 꿈에라도 만나 주시는 분이시다. 진리를 간절히 갈망하면 주님은 시간과 상관 없이 가장 적실한 그 때 만나 주신다. “밤에라도” 만나 주시는 주님이 좋다. “밤에” 주님을 찾아가는 니고데모의 진리에 대한 마음도 본 받고 싶다.
-니고데모가 낮에 주님을 찾지 않았다고 아쉬워 하는 의견이 참 많다. 하지만, 밤에라도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더 많다. 여러 상황을 핑계하여 아예 주님을 거절하고 “밤의 어두움”속에서 더 죄를 탐닉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그러니 “밤에라도” 주님을 찾는 것이 더 감사하고, “밤에라도” 만나 주시는 주님이 더욱 감사하다.
-비록, 니고데모는 이 감사한 만남과 진리의 대화를 통해 당시에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갔지만,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장례의 과정에서 환한 낮에 장례물품들을 보내주어 장사를 지내게 함으로서 주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드러냈다.
-밤에 찾아 왔지만, 밤에라도 만나주신 주님이 감사하다.
*주님, 하늘의 지식 앞에 땅의 지식이 한없이 보잘 것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데, 여전이 땅의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대화가 더욱 필요합니다. 날마다 저에게 진리를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 밤에라도 만나주신 모습이 감동입니다. 저도 나의 시간이 아니라 그의 시간을 기꺼이 진리의 대화를 위해 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주님처럼 “밤에라도” 진리를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1.밤에(2절)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 유대인의 지도자였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가 바리새인 사회에서 존경받는 지도자이자 구체적으로 예루살렘 산헤드린(공회)의 의원임을 밝혔다. 산헤드린은 대제사장 외 서기관과 장로 등 70명으로 구성된 당시 유대 사회의 최고의 입법, 사법기구였다. 비록 로마의 지배하에 있어 총독의 동의가 있어야 했으나 사소한 범죄에 대해 체포할 권한과 민사 소송도 함께 감당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율법의 최종해석권과 거짓 선지자를 가리는 일, 종교 감독권을 행사하였고, 미약했지만 자체 군대도 있었다. 무엇보다 종신직이어서 그 권한과 명예는 대단한 것이었다. 지방 도시에는 23명의 소산헤드린이, 아주 작은 도시에는 3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된 재판소도 있었다. 산헤드린은 유대 사회에서 종교적 권위의 꼭지점에 있는 기구였다. 예수님께서도 이들로부터 재판을 받았다(눅 22:6).
니고데모는 그 산헤드린공회의 의원이었다. 매우 객관적이어서 바리새인들 중에서 매우 드물게 예수님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았다. 이는 그가 왜곡된 정보에 좌우 되지 않고 직접 검증하고 판단하는 기질이 분명함을 보여준다. 요즘 흔히 쓰이는 “자신의 가치관과 신념에 따라 이에 맞는 정보만 취사선택하여 그것 외의 것은 무시하는 ‘확증편향’의 인물은 아니었다.” 주님께서도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10절)”으로 부르셨다. 또 그는 매우 따뜻한 성품의 사람이어서 예수님을 체포하려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주님의 편을 들어 핀잔을 받기도 했고(7:51-52),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 장례물품을 제공하였다(19:39).
그가 “밤에” 주님을 찾아왔다. 자신의 신분에 대낮에 대놓고 찾아 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만약 대낮에 찾아 왔다면 분명 대척점에 서서 비난하거나 꼬투리를 잡아 곤란하게 하려고 찾아 왔을 것이다. 그런데 “밤”에 찾아왔다. 그 안에 주님과 진지한 대화를 하고 싶은 열망이 있었다. 주님께 인사하고 질문하는 그의 모습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열정, 겸손함”이 보인다.
당대 최고의 율법 석학들의 기구에서 존경받는 선생이었던 그가 주님의 행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깊은 고민에 빠진 것이다. 가나 혼인 잔치의 소문도 들었을 테고, 성전청결 사건도 들었을 게다. 무엇보다 “예루살렘에서 행하시는 주님의 표적들(2:23)”을 직접 보면서 진지한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대낮에 주님을 찾는 용기는 없었다. 그의 지위와 명예가 주님 앞에 나아오는데 분명 걸림돌이 되었다. 눈치를 보기 마련이기에 스스럼 없이 찾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지위와 명예의 걸림돌이 있음에도 “밤”에 찾아왔다. 그럼에도 그 밤에 니고데모는 자신의 지식을 뒤흔들고 있는 주님의 표적들과 가르침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어찌보면 사람들의 이목과 방해를 받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어둡고 조용한 곳에서 진지하게 나누는 대화의 힘이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기에 낮에 당당히 찾지 않고 밤에 찾아왔다고 아쉬워 하는 이들의 주장에 쉽게 수긍하지 못하겠다. “밤에라도” 진리의 열정을 식히지 않고 찾아 나온 것이 더 중요하다. 주변에 니고데모처럼 사회적 지위와 명망 때문에 쉽사리 대낮에 주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중에 “밤에라도” 주님을 찾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또, 꼭 지위와 명예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죄에 대해 낯 부끄러워서 도무지 얼굴을 들고 주님 앞에 나오기 어려운 이들이 얼마나 많겠는가! 그런 이들은 꼭 “어두운 밤에라도” 주님을 찾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밤에라도” 만나 주셨기 때문이다. 특히 그렇게 찾아온 니고데모의 속 마음을 정확히 끄집어 내어 깊게 진리의 대화로 이끄셨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 어쩌면 밤은 더 직접적으로 더 깊게 진리의 대화를 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일런지 모른다.
*어떤 이는 “밤에” 그 어둠의 익명성을 이용하여 죄를 탐닉한다. 하지만 니고데모는 어둠이 가려주는 자신의 얼굴을 주님 앞에 선명히 드러내고 진리 앞에 밝히 직면했다. 그리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 땅의 오심의 목적과 사명을 듣게 되었다(14-15절). 주님은 “밤에라도”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땅의 이야기가 아닌 하늘의 이야기를 풀어 주셨다.
*진리를 추구하는 이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더라도 진리를 만나기 위해 몸부림 쳐야 한다. 니고데모의 사회적인 위치, 종교적인 지위, 그가 백성들로 부터 받고 있는 명예가 예수님을 쉽게 만나기 위해 달려가지 못하지만, 주님의 표적과 가르침을 전해 들으며 무수한 시간, 진리를 고민하고, 이 진리를 직접 듣기 위해 “밤에” 찾아온 그의 모습을 마냥 비난해서는 안 된다.
*밤에라도 찾아 온 주님은 그에게 하늘의 비밀을 들려 주셨다. 진리는 밤 새워 이야기 할 때 잘 들린다. 그러고 보니 주님의 제자들이 요단강에서 처음 주님을 만났을 때 안드레나, 빌립은 밤새워 주님과 진리를 이야기 했었다. 그리고 주님의 제자로 따라 나섰다.
*밤의 진리의 대화가 주는 기막힌 효과가 분명 있다. 밝은 대낮은 다른 것이 많이 보인다. 하지만 우두운 밤 촛불 등잔 아래 조곤 조곤 나누는 진리의 대화는 오직 예수님만 보게 했을 것이다. 나에게도 이런 시간이 얼마나 중요한가!!
나는?
-오늘 묵상은 “밤”에 꽂혔다!
-본문의 내용보다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를 “밤에라도 만나주신 주님의 모습과 그 밤에 조곤 조곤 말씀해 주시는 “말씀의 하나님”되시는 주님의 모습이 도드라지게 보인다.
-주님은 “밤에라도 만나 주시는 분이시다. 아니.. 꿈에라도 만나 주시는 분이시다. 진리를 간절히 갈망하면 주님은 시간과 상관 없이 가장 적실한 그 때 만나 주신다. “밤에라도” 만나 주시는 주님이 좋다. “밤에” 주님을 찾아가는 니고데모의 진리에 대한 마음도 본 받고 싶다.
-니고데모가 낮에 주님을 찾지 않았다고 아쉬워 하는 의견이 참 많다. 하지만, 밤에라도 주님을 찾지 않는 사람은 더 많다. 여러 상황을 핑계하여 아예 주님을 거절하고 “밤의 어두움”속에서 더 죄를 탐닉하는 이들이 훨씬 많다.
-그러니 “밤에라도” 주님을 찾는 것이 더 감사하고, “밤에라도” 만나 주시는 주님이 더욱 감사하다.
-비록, 니고데모는 이 감사한 만남과 진리의 대화를 통해 당시에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갔지만, 이후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장례의 과정에서 환한 낮에 장례물품들을 보내주어 장사를 지내게 함으로서 주님에 대한 자신의 신앙고백을 드러냈다.
-밤에 찾아 왔지만, 밤에라도 만나주신 주님이 감사하다.
*주님, 하늘의 지식 앞에 땅의 지식이 한없이 보잘 것 없음을 깨달아야 하는데, 여전이 땅의 지식이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진리의 대화가 더욱 필요합니다. 날마다 저에게 진리를 깨우쳐 주십시오.
*주님, 밤에라도 만나주신 모습이 감동입니다. 저도 나의 시간이 아니라 그의 시간을 기꺼이 진리의 대화를 위해 낼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주님처럼 “밤에라도” 진리를 전하는데 주저하지 않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