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고데모와 주님께서 사람들과 구별된 밤에 진리의 대화를 펼친 것처럼, 사마리아 여인과 주님께서 한 낮 우물가에서 하늘의 대화를 나눈다. 주제는 예배이다.
1.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15절)
주님께서 피곤하여 물을 달라 부탁하는데서 시작된 하늘의 대화는 결국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로 대화의 내용이 진행된다. 우물가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놓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이어져서 결국 ‘물 좀 달라’고 하신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고 권하셨다(13-14절).
*목마른 자가 누구인지, 누가 물을 줄 수 있는지가 뒤바꼈다. 주님의 육신의 목마름에서 여인의 해결되지 않았던 영적 목마름으로, 그녀가 마셔야 할 물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다시 목마르지 않을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고백하는 여인의 반응은 “선생님(주)에서 선지자, 그리고 결국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점점 고조되었다. 그 출발이 주님께서 주시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라는 고백이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믿음이 고백이라기 보다 한편으로 냉소적인 대답에 불과 했다. 주님과의 대화가 마땅치 않았던 여인의 기구한 삶이 담겨져 있다. 한 낮에 보통 여인들이 함께 물을 길르기 위해 오는 아침에 그 무리에 끼지 못하는 ‘당당하지 못할’ 기구한 삶이 있었다. 그 정도로 자신을 스스로 공동체에서 소외 시킨 그녀의 마음은 주님과의 대화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마땅찮은 여인의 고백과 마음을 진정한 목마름의 핵심으로 이끄는 계기로 삼아 주셨다. 때로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미더운 반응이 되려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계기가 될 때가 있다. 지금 현실의 삶에 지쳐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나, 간혹 깨우쳐 주시는 말씀의 도전에 미더운 반응으로 서 있어도 주님은 이를 통해 더 깊은 진리의 세계로 이끄실 때가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다른 겉모습 만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주임을 훤히 알고 계시기에 가능한 신비다.
2.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주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을 매우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좀 더 직접적으로 여인의 마음에 도전을 던지셨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이에 남편이 없다하는 여인에게 더 직설적으로 말씀하신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새번역_17하-18절).”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주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였다.
*주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주님은 모든 삶의 중심을 정확히 알고 계신다. 여인과의 대화가 ‘동상이몽’처럼 흐르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여인의 마음을 너무도 훤히 꿰뚫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 어떤 것도 감출 수 없기에 정직하게 서야 한다. 한편 주님은 더욱 정직하게 서도록 “직언”하심으로 도우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인의 문제의 핵심은 육적인 목마름이 아니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그녀의 기구한 삶의 원인이 어떤 것이든 주님은 알고 계셨다.
3.예배(20-26절)
여인은 주님이 선지자(예언자)이심을 깨닫고 “예배”에 대한 질문을 드린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새번역_20절).”
핵심은 어느 장소에서 드려야 맞는가였다. 이 문제는 오랜 사마리아 지역의 아픔이 담긴 질문이다. 사마리아는 본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땅이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고 북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남유다와 애증의 관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이 사마리아의 그리심산과 북쪽의 단에 성전을 짓고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함께 모여 지키는 절기를 거부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후 혼혈 정책에 따라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받게 된다. 무엇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따랐다. 선지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따라 자기들만의 성전, 절기, 율법을 지켰다.
*여인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전제를 먼저 말씀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새번역_21-22절).”
*먼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다. 그래서 22절의 주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과 아는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주님은 여인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다는 것을 먼저 전제 하셨다. 어느 장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예배의 대상, 즉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는가 이다.
*여인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 하였다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를 아예 부인하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배했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지만, 그 대상을 잘 모른다니… 이게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하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자신의 이익에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예배를 받는 분을 잘 알지 못하고 그저 예배의 행위에서 오는 자기만족과 유익만 생각한다면 충분히 모르고 드릴 수 있다. 흔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복을 빌어 주면 좋은 것이니”라는 태도와 다름 없다.
4.때와 앎(23-24절)
그렇다면 아는 분을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두 가지를 선언하신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새번역_23-24절).”
먼저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때”이다. 그 때가 온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이다. 그 “때”란 언제일까? 수가성 여인에게는 바로 지금이다. 곧, 주님을 만난 때이다.
주님을 만나 선생님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메시아로 점진적으로 고백이 변화되는 것은 다른데 이유가 있지 않다. 주님을 만나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 때문이었다. 주님의 말씀이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였다.
*두번째는 주님을 만나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곧 참된 예배의 전제이다. 즉, “앎”이다. 주님께서 참된 영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에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만나 점차 각성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만나는 때 나의 영혼이 각성되고 나의 내면이 참되게 된다. 그리고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알기에 드리는 예배가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아는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주님을 알아가는 데 관심이 없다면 참된 예배는 드릴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장소를 중요하게 여긴다. 참된 예배는 그 장소에서 드려야 한다는 식이다. 나의 어린 시절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참된 예배”라는 말이었다. 주일성수도 본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었다.
*얼마나 무지에 찬 담대함이었는지 참담하다. 참된 예배의 전제를 “장소”에 두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수가성 여인의 인식과 다를 바 없다. 참된 예배는 장소와 아무 상관이 없다. 장소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상의 문제다.
나는?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예배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그 분을 내가 아는지, 내가 그 분과 무슨 관계인지를 알고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매우 강조했다. 요한복음에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 오이다(οἶδα)는 84회,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57회 사용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22절)’ 직접 책망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과 진리로(in spirit and in truth_kjv 23,24)는 “영과 진리 안에서(in)”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임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많은 이들인 자기 욕심과 유익 안에서(in) 예배를 드린다. 자기의 소원이 먼저다. 하나님이 먼저가 아니다. 그런 예배를 우리는 일상적(?)으로 드려왔다. 주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다”는 말씀이 어쩌면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일 수 있다.
-주님과 상관 없는 삶은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 이어져 주님과 상관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정직하게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예배와 일상이 이렇다면 지금 우리는 수가성 여인과 다를 바 없다.
*주님, 수가성 여인과 다를 바 없는 저에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장소가 아니라 “때”와 “앎”임을 깨닫습니다. 늘 함께 해 주시는 이 “때”에 주님을 더욱 “앎”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겠습니다.
1.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15절)
주님께서 피곤하여 물을 달라 부탁하는데서 시작된 하늘의 대화는 결국 “예수님은 누구신가? 그에게 어떻게 할 것인가?”로 대화의 내용이 진행된다. 우물가에서 한 바가지의 물을 놓고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물,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이어져서 결국 ‘물 좀 달라’고 하신 주님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라고 권하셨다(13-14절).
*목마른 자가 누구인지, 누가 물을 줄 수 있는지가 뒤바꼈다. 주님의 육신의 목마름에서 여인의 해결되지 않았던 영적 목마름으로, 그녀가 마셔야 할 물이 무엇인지 정직하게 직면하게 된 것이다.
*다시 목마르지 않을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고백하는 여인의 반응은 “선생님(주)에서 선지자, 그리고 결국 메시야 곧 그리스도”로 점점 고조되었다. 그 출발이 주님께서 주시는 다시 목마르지 않을 그런 물을 내게 주소서 라는 고백이었다.
*그런데 이 고백은 믿음이 고백이라기 보다 한편으로 냉소적인 대답에 불과 했다. 주님과의 대화가 마땅치 않았던 여인의 기구한 삶이 담겨져 있다. 한 낮에 보통 여인들이 함께 물을 길르기 위해 오는 아침에 그 무리에 끼지 못하는 ‘당당하지 못할’ 기구한 삶이 있었다. 그 정도로 자신을 스스로 공동체에서 소외 시킨 그녀의 마음은 주님과의 대화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마땅찮은 여인의 고백과 마음을 진정한 목마름의 핵심으로 이끄는 계기로 삼아 주셨다. 때로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미더운 반응이 되려 더 깊은 은혜를 경험하게 되는 계기가 될 때가 있다. 지금 현실의 삶에 지쳐 주님을 바라보지 못하나, 간혹 깨우쳐 주시는 말씀의 도전에 미더운 반응으로 서 있어도 주님은 이를 통해 더 깊은 진리의 세계로 이끄실 때가 있다.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다른 겉모습 만으로 반응하지 않으시고 주임을 훤히 알고 계시기에 가능한 신비다.
2.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주님께서는 여인의 마음을 매우 잘 알고 계셨다. 그래서 좀 더 직접적으로 여인의 마음에 도전을 던지셨다. “네 남편을 불러오라(16절)” 이에 남편이 없다하는 여인에게 더 직설적으로 말씀하신다. “남편이 없다고 한 말이 옳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바로 말하였다(새번역_17하-18절).” 여인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리고 주님을 “선지자”라고 고백하였다.
*주님 앞에서 감출 수 있는 것은 없다. 주님은 모든 삶의 중심을 정확히 알고 계신다. 여인과의 대화가 ‘동상이몽’처럼 흐르지 않은 것은 주님께서 여인의 마음을 너무도 훤히 꿰뚫고 계셨기 때문이다.
*주님 앞에서 어떤 것도 감출 수 없기에 정직하게 서야 한다. 한편 주님은 더욱 정직하게 서도록 “직언”하심으로 도우시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인의 문제의 핵심은 육적인 목마름이 아니었다.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던 그녀의 기구한 삶의 원인이 어떤 것이든 주님은 알고 계셨다.
3.예배(20-26절)
여인은 주님이 선지자(예언자)이심을 깨닫고 “예배”에 대한 질문을 드린다. “우리 조상은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선생님네 사람들은 예배드려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고 합니다(새번역_20절).”
핵심은 어느 장소에서 드려야 맞는가였다. 이 문제는 오랜 사마리아 지역의 아픔이 담긴 질문이다. 사마리아는 본래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파의 땅이었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리고 북이스라엘은 사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남유다와 애증의 관계를 이어갔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이 사마리아의 그리심산과 북쪽의 단에 성전을 짓고 남유다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함께 모여 지키는 절기를 거부하면서 비극은 시작되었다. 앗수르에게 멸망 당한 후 혼혈 정책에 따라 이방인들과 피가 섞였고,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유다 백성들로부터 멸시를 받게 된다. 무엇보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모세오경”만을 따랐다. 선지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세오경을 따라 자기들만의 성전, 절기, 율법을 지켰다.
*여인의 질문에 주님께서는 매우 중요한 전제를 먼저 말씀하신다. “여자여, 내 말을 믿어라. 너희가 아버지께, 이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거나, 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너희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분을 예배한다. 구원은 유대 사람들에게서 나기 때문이다(새번역_21-22절).”
*먼저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예배의 대상이다. 그래서 22절의 주님의 말씀이 중요하다.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는 것과 아는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주님은 여인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다는 것을 먼저 전제 하셨다. 어느 장소에서 예배 드리는 것이 옳은가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예배의 대상, 즉 누구에게 예배를 드리는가 이다.
*여인에게 너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 하였다는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의 예배를 아예 부인하신 것이다. 왜 그러셨을까?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배를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모르고 예배했다는 것이다. 예배를 드리지만, 그 대상을 잘 모른다니… 이게 가능할까? 충분히 가능하다. 예배를 드리는 이유가 자신의 이익에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
*예배를 드리는 자가 예배를 받는 분을 잘 알지 못하고 그저 예배의 행위에서 오는 자기만족과 유익만 생각한다면 충분히 모르고 드릴 수 있다. 흔히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복을 빌어 주면 좋은 것이니”라는 태도와 다름 없다.
4.때와 앎(23-24절)
그렇다면 아는 분을 예배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주님께서는 분명하게 두 가지를 선언하신다. “참되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 때이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한다(새번역_23-24절).”
먼저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리는 “때”이다. 그 때가 온다고 말씀하신다. 사람의 노력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때”이다. 그 “때”란 언제일까? 수가성 여인에게는 바로 지금이다. 곧, 주님을 만난 때이다.
주님을 만나 선생님에서 선지자로 선지자에서 메시아로 점진적으로 고백이 변화되는 것은 다른데 이유가 있지 않다. 주님을 만나 주님과 대화하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 때문이었다. 주님의 말씀이 주님을 더욱 알아가게 하였다.
*두번째는 주님을 만나 주님을 알아가는 것이 곧 참된 예배의 전제이다. 즉, “앎”이다. 주님께서 참된 영이시고, 진리이시기 때문에 수가성 여인이 주님을 만나 점차 각성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주님을 만나는 때 나의 영혼이 각성되고 나의 내면이 참되게 된다. 그리고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주님을 만나고 주님을 알기에 드리는 예배가 곧 “영과 진리”로 드리는 참된 예배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아는 분”을 예배하는 것이다. 주님을 알아가는 데 관심이 없다면 참된 예배는 드릴 수 없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장소를 중요하게 여긴다. 참된 예배는 그 장소에서 드려야 한다는 식이다. 나의 어린 시절 귀에 인이 박히도록 들었던 것 중의 하나가 “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야 참된 예배”라는 말이었다. 주일성수도 본 교회에서 드려야 한다고 강조하고 또 강조했었다.
*얼마나 무지에 찬 담대함이었는지 참담하다. 참된 예배의 전제를 “장소”에 두는 사마리아 사람들과 수가성 여인의 인식과 다를 바 없다. 참된 예배는 장소와 아무 상관이 없다. 장소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대상의 문제다.
나는?
-예배는 장소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내가 예배 드리는 대상이 누구인지, 그 분을 내가 아는지, 내가 그 분과 무슨 관계인지를 알고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다.
-요한은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매우 강조했다. 요한복음에만 “하나님을 알아가는 의미로 사용된 단어 오이다(οἶδα)는 84회, 기노스코(γινώσκω)는 57회 사용되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매우 중요하다. 주님께서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22절)’ 직접 책망하신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영과 진리로(in spirit and in truth_kjv 23,24)는 “영과 진리 안에서(in)” 드리는 예배가 참된 예배임을 분명히 깨닫게 한다. 많은 이들인 자기 욕심과 유익 안에서(in) 예배를 드린다. 자기의 소원이 먼저다. 하나님이 먼저가 아니다. 그런 예배를 우리는 일상적(?)으로 드려왔다. 주님께서 수가성 여인에게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였다”는 말씀이 어쩌면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일 수 있다.
-주님과 상관 없는 삶은 일상에서 주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사는 것이 이어져 주님과 상관없는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정직하게 주님 앞에서 우리의 예배와 일상이 이렇다면 지금 우리는 수가성 여인과 다를 바 없다.
*주님, 수가성 여인과 다를 바 없는 저에게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님, 장소가 아니라 “때”와 “앎”임을 깨닫습니다. 늘 함께 해 주시는 이 “때”에 주님을 더욱 “앎”으로 드리는 참된 예배자가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