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너희도 가려느냐? [요 6:60-71]
 – 2022년 01월 22일
– 2022년 01월 22일 –
유대인들과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자들이 어려움을 토로한다. 이렇게 어려운 말씀을 누가 이해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주님은 이보다 더한 이해 충돌이 일어나면 어떻게 믿겠느냐며 제자들 중에 주님을 믿지 아니하는 이들이 있다고 말씀하신다(60-64절). 주님은 ‘내쫓거나 잃어버리지 않겠지만’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않으시면 결코 믿음의 길을 따를 수 없음도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이로 인해 주님을 따르던 이들 중에서 많은 이들이 떠나가게 된다(65-66절). 이에 주님께서는 열 두 제자에게 “너희도 가려느냐?”고 반문 하신다.


1.왜 어려워 할까?(60-65절)
믿음이 없으면 말씀을 듣는 것을 어려워 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물 위로 걸어 오시는 주님을 목격했고, 배에 오르자 곧 가버나움에 배가 도착한 것도 경험 했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그들에게 예수님의 하나님 되심으로 깨달아야 했다. 이미 주님께서는 43-47절에서 주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 자이기 때문이다고 말씀 하셨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다(47절)고 하셨고, 유대인들이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충격적인 말씀이셨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것이다. 제자들은 왜 ‘생명의 떡’이 라는 주님의 말씀을 어려워 했을까? “예수께서, 제자들이 자기의 말을 두고 수군거리는 것을 아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말이 너희의 마음에 걸리느냐? 인자가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면, 어떻게 하겠느냐?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다. 육은 아무 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새번역_61-63절)”

제자들은 영적인 의미로 하신 말씀을 육적으로만 생각했기 때문이다. 생명의 떡, 하늘에서 온 살아있는 떡이라는 말씀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하시고 이것이 우리가 먹고 마셔야 할 양식과 음료하고 하시며 그래야만 영생을 얻는다 라는 말씀은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육적으로만, 즉 실제로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들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이야기가 그토록 걸림이 된다면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이후 승천을 바라보며 어떻게 이를 믿을 것이냐?(62절) 며 반문하신다. 그리고 명확하게 제자들이 말씀을 어려워 하는 부분을 이렇게 짚어 주신다. “생명을 주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데도 소용이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이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63절)” 즉 실제로 주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를 사해 주시려고 십자가에 화목제물로 내어 주신 주님을 우리의 구원자(메시아)로 믿고 따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들어야 할 말씀인데, 지식(율법)의 선입견, 전통이라는 거름종이를 거쳐 들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의 살과 피를 먹는 다는 것이 주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것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육신의 빵을 채워줄 왕으로만 바라보고 있으니 “도무지 어려워 이해가 되지” 안았던 것이다.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주님의 모습만을 기대하고 믿으면, 주님께서 말씀하여 주시는 것이 도무지 어렵고 이해되지 않는다. 나의 필요와 소망이 믿음의 재료가 되어 주님을 바라보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은 막막하기 그지 없게 된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듣기를 소망하면 성령께서 밝히 듣리게 하시고 깨닫게 하여 주신다. 이것이 믿음의 신비다.

또한,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게 하신 자가(65절) 아니면 주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는다. 들어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마음이 가지 않는다. 주님께서는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 않느다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고 하셨다. 유대인들에게는 충격적인 말이 연이어 진다. 자신들은 이미 하나님의 백성으로 자부하던 그들은 “누구든지”라는 말에, 또 자신들도 하나님께서 오게 하지 않으면, 이라는 말에 심히 불쾌했을 것이다.

*말씀이 이제껏 익숙하게 신앙생활 하던 삶의 가치들을 도전할 때 이런 충격들이 가끔 일어난다. 자신들이 자부하며 믿고 있던 것이 말씀에 직면토록 하실 때 당혹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때 말씀이 직면하게 하는 껍데기 신앙을 버려야 말씀이 살리는 신비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지금 제자들은 주님의 말씀 때문에 이제껏 유대인으로서 살았던 당연한 어떤 가치들을 도전 받고 있다. 하지만 그것을 버리고 주님의 새롭게 하시는 말씀을 “믿고” 받아 들여야 하늘에서 온 생명을 누릴 수 있다.

*자기 신념, 자기 지식, 자기 경험, 자기 전통을 내려놓지 못하면 주님을 따르지 못한다. 내가 이해되고 용납되지 않더라도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것, 마음을 쏟는 것이 살 길이다.

*주님의 말씀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신앙에 대한 “자기 고집”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 주님께서 오게 하신 것을 거절하고 마귀의 자식으로 남아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2.너희도 가려느냐?(67-71절)
많은 제자들이 주님에게서 떠나갔다. 자기 고집과 신념을 버리지 못했다. 자기 야망과 욕망을 위해 주님을 따르고 있음을 지적하셨다. 제자라는 이름에 걸맞게 주님을 따라야 하지만, 다 믿지도 않고 아버지께서 오게 하지도 않은 그들을 거르신 것이다. 주님은 떠날 줄 알면서도 지리를 왜곡하면서까지 그들을 붙잡지 않았다. 제자들이 많이 떠나고 12제자만 남았다.

그럼에도 12제자들에게는 “너희도 가려느냐?”고 물으신다. 떠나지 않고 남기를 원하시는 마음을 애둘러 표현하신 것이다. 베드로가 담대하게 대답한다. “…. “주님,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겠습니까? 선생님께는 영생의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선생님이 j하나님의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알았습니다(새번역_68-69절).”

놀라운 고백이다. 베드로와 같은 심정으로 12제자들 만이 주님 앞에 남았다. 참으로 기막히다. 불과 어제 벳세다 들녘에서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삼고자 열렬하게 환호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에 직면하자 12제자들만 남고 떠나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남은 12제자 중에서 몸은 남았지만 마음은 이미 떠난 한 명이 있음을 굳이 밝히셨다. 주님께서 직접 택하였던 12제자중에 악마가 하나 있음을 밝히셨다(70절). 회의, 의심, 계산, 욕망과 욕심을 따라 주님을 따르면 “어렵다!”

*주님께서 물으신다. “자기 욕망따라 떠나가려느냐?”


나는?
-본문은 마치 “이래도 예수 믿을래?”라고 질문하시는 듯 하다. 내가 원하고 바라는 주님의 모습을 열광하며 따라가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고 하신다. “하늘로부터 내린 양식, 생명의 떡인 자신을 믿고 의지하며” 따르라고 하신다.

-어떤 말씀에 딱 걸려서 마음은 늘 어렵고, 왜 이래야 하지? 저항심이 생겨도… 사람들이 주님에게서 등을 돌리고, 온갖 조롱과 핍박을 당하여 괴로운 상황이 펼쳐져도… 이래도 예수 믿을래? … 너희도 가려느냐? 물으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오늘 아침 내 앞에 서 계신다.


*주님, 나의 욕망을 따라 주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기에 어떤 길이라도 달게 따라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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