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8:1-14 끈질기게, 절박하게, 낮아지고 낮아져서…
본문은 기도를 소재로 삼는 두 비유로 구성된다. 하나님 나라는 왔지만 완성될 나라이므로(17:20~37), 제자는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처럼 마지막 날에 인자가 올 때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다(1~8절).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겸손하게 긍휼과 은혜를 구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다.
이 두 비유는 17:20~37과 18:5~19:27을 연결하는 기능을 한다. 17:20~18:8은 인자의 날, 즉 종말을 주제로 전개되고 인자의 날을 신실하게 준비할 것을 강조한다. 비유(1~7절)에 이어 나오는 질문(8절)은 17:22~37의 “인자의 오심”과 연결된다. 이 단락에서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 실현되는 동시에 미래에 완성될 것을 알려주셨다. 특히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이 인자로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런데 공의가 실현되지 않는 현실이 길어질수록 기다림에 지쳐 낙심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시대를 살아가는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가져야 할 태도를 가르쳐주기 위해 주어졌다. 본문은 그 태도가 “겸손”임을 기도라는 소재를 통해 가르쳐주신다.
1.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의 비유(1~8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신다(1절).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최악의 교만한 사람) 재판장(어쩌면 그 시대에도 오늘날 볼 수 있는 이런 재판장)이 있었다(2절).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은 태도가 신분이 낮은 사람을 무시하고 공의를 실행하지 않는 태도로 나타났으리라 짐작된다. 재판장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위와 권위를 지닌 사람이었다면, 과부는 가장 신분이 낮은 사람이었다.
당시 여성은 가족의 남자와 연결된 지위였다. 아내는 남편을 의지하고, 딸은 아버지를 의지하며, 과부는 아들을 의지해야 살 수 있는 사회였다. 그런데 과부가 직접 재판장을 찾아왔다면 집안에 남자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과부는 재판관을 자주 찾아가서 “나의 원한”을 풀어달라고 간청했다(3절). “원한(에크디케시스)”으로 번역된 단어의 동사는 “에크디케오”인데, “정의와 공의”를 의미한다. 과부는 자신에게 가해한 가해자에 대한 공의로운 법 집행을 간청한다(3, 5, 7, 8절). “왔다(에르케토)”라는 표현은 계속해서 찾아왔다는 의미다. 그런데 재판장은 과부의 오랫동안의 호소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과부의 끈질김 때문에 겪는 고통을 토로한다(5절).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인권이나 정의에 관심을 두지 않았지만, 과부의 끈질긴 요청에는 응답하지 않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명예를 목숨처럼 생각한 시대에 재판장은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고 수치를 당하지 않으려도 과부의 원한을 풀어주기로 결심한다(5절).
예수님은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내용을 토대로 비유의 의미를 설명해 주신다(6~8절). 불의한 재판장은 공의를 실현할 열정 때문이 아니라 여자의 끈질김 때문에 공의를 실현했다. 이에 비해 하나님은 불의한 재판장과 전혀 다른 성품을 갖고 계신다. 하나님은 자비로운 분이시고(6:35~36), 가장 좋은 선물을 주시며(11:1~13; 12:32), 공의를 실행하시는 분이다. 뿐만 아니라 비유는 간청하는 자와 듣는 자의 관계를 강조하신다. 과부는 재판장의 무시를 받은 신분이지만, “택하신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과 백성이다.
불의한 재판장도 원한을 풀어주었는데 공의와 자비의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품은 과부의 절박함처럼 하나님의 자녀가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을 하나님은 외면하실 수 없다. 하나님은 이들의 문제를 속히 해결해주신다(8절). “속히(엔 타케이)”는 “확실히, 갑자기, 뜻밖에” 등을 의미한다. 택하신 자들의 눈에는 기도가 늦게 응답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은 결코 기도를 잊거나 무관심으로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그런데 비유에 대한 예수님의 해설은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8절)”로 끝난다. 기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이 과연 자신의 기도에 관심을 갖고 계시는지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기도에 반드시 응답하신다.
예수님은 인자가 오실 때 과연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신다. 신자들은 과부가 보였던 끈질김을 유지할 것인가? 예수님의 질문은 앞 단락의 가르침을 배경으로 한다(17:23~37). 이미 왔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갈 때 여로 어려움과 시련을 만난다. 성도들은 예수님이 빨리 와서 공의를 즉각 실현해주지 않으시는 것처럼 생각하고 낙심하기 쉽다. 그러나 시련의 시기일수록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해야 하고 하나님과 제자들의 관계를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제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은 자녀들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고 가장 좋은 것으로 반응하시는 아버지다.
곤궁과 역경은 신자들이 피할 수없는 운명이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확실히 개입하신다. 그러므로 자녀는 낙심하지 말고 끈질기게 기도해야 한다. 특히 자신이 사회-경제-종교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를 기억해야 한다.
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9~14절)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로 기도의 소재를 이어가신다. 비유는 자신을 의롭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이들을 겨냥한다(9절).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10절). 기도는 사람의 내면과 실제 모습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아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태도인지를 드러낸다. 바리새인은 다른 사람들, 특히 세리와 같은 죄인과 분리된 것으로 자긍심을 가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기도한다.
기도는 하나님 앞에 단독자로 서는 순간이므로 인간을 가장 겸허하게 만드는 시간이다. 기도는 자신의 업적이나 성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사 8:17; 고후 1:9; 히 2:13). 그러나 바리새인은 자신이 행하는 경건 행위를 하지 않는 “다른 사람들”을 토색, 불의, 간음을 행하는 사람들로 규정함으로써 모두 죄인 취급해버린다(11절). 자신은 남의 것을 탐내거나, 타인에게 불의를 행하거나, 남의 여자를 간음하는 것으로 피해를 준 적이 없다고 자랑한다.
특히 멀리서 기도하는 세리를 흘깃 쳐다보면서 “이 세리”와 같지 않은 것으로 감사한다. 또한 그는 금식을 위해 정해 놓은 날에는 물론 한 주에 두 번 금식한다. 자신이 생산한 소산의 십일조뿐 아니라 시장에서 구입한 것과 같은 모든 생산물의 십일조를 냈다(12절, 레 27:30~33; 민 18:21~32; 신 14:22~27). 한 주 두 번의 금식과 모든 생산물의 십일조는 “다른 사람들”과 구분하는 기준이었다. 또한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를 자라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것으로 자랑한다. 세리도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기도한다.
세리는 바리새인처럼 다른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기도한다. 세리는 부정한 자로 공인된 사람이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오염시키지 않도록 떨어져 있다. 바리새인의 눈에 세리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강도와 같고 사회를 오염시키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다. 세리는 로마제국의 권위에 의존해 유대인들의 혈세를 거둬 로마에 바치고 상당한 이윤을 챙긴 사람으로, 매국노와 다를 바 없었다. 세리는 법정의 증인으로 인정받지도 못했다. 그래서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한다(13절). 가슴을 치며 죄인인 자신을 용서해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도록 기도한다. 그는 죄에 대한 깊은 자각으로 가슴을 치며 탄식하고 회개한다. 직업상 다른 사람들에게 끼친 피해를 생각하면서 통곡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바리새인은 29개의 헬라어 단어로 자랑했고, 세리는 6개의 단어로 회개했다. 그런데 세리는 말보다 눈을 들지 못하고 가슴을 치는 동작으로 하나님에 대한 마음을 표현했다. 특히 “속량하다(힐라스코마이)”라는 제의적 용어를 사용하여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께서 죄인을 용서해주시고 진노하지 않으시길 기도한다. 마치 시편 51편의 탄식기도를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세리를 평가하신다(14절). “의롭게 하다(디카이오오)”라는 선포를 통해 죄 용서와 긍휼을 구한 세리가 의롭게 된 사실을 선언하신다. 세리는 의인으로 높아지고 바리새인은 죄인으로 낮아진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찾으러 오신 분이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은 죄인으로 예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의 자녀는 끈질기게 기도할 정도로 하나님을 신뢰해야 하는 동시에 긍휼을 구하는 죄인으로서 하나님께 긍휼과 은혜를 간구해야 한다.
겸손한 태도는 하나님 나라 백성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성품과 태도다.
나는?
-인자의 날을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 백성은 불의한 재판장에게 간청하는 과부처럼 낙심하지 않고 지치지도 않고 신뢰 속에서 기도하는 자들이다. 하나님은 과부의 원한에 무관심하고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은 불의한 재판장과는 달리, 자기 백성의 원한을 풀어주시는 의롭고 신실하신 분이다.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가 자주 찾아가도 듣지 않다가 번거로움이 싫어서 마지못해 들어주었지만, 하나님은 밤낮 부르짖는 과부의 원한을 속히 풀어주실 것이다. 아들을 살리신 권능으로 자기 백성의 억울한 고난을 해결해주실 날이 올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하나님의 무관심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믿음 없음이 아닐까? 신뢰와 인내로 드리는 중단 없는 기도만이 종말의 때에 하나님 나라 백성이 살 길이다. 과부의 포기하지 않는 기도를 본받아 행할 때다.
-바리새인은 하나님을 만나기에는 지나치게 스스로 의로웠다. 하나님이 필요 없을 만큼 부족함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에는 지나치게 거룩했다. 그의 기도에는 일말의 회개도 없었고 하나님께 대한 간구도 없었다. 자기 자랑 일색일 뿐 하나님께 대한 찬양은 없었다. 하나님께 해드린 것만 기억했고 하나님이 자격 없는 그를 위해 행하신 것은 기억조차 못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전혀 해주신 것 없는 분이 되어버렸고 앞으로도 할 일이 없으신 분으로 전락했다.
-하나님은 그런 바리새인을 의롭다 여기지 않으셨고, 스스로 자신을 높인 그를 낮추셨다. 하나님을 향한 겸손한 간구와 찬양이 그칠 때, 생명의 생기도 멈춘다. 바리새인의 기도는 교만하기 그지없어서 마치 하나님이 필요 없는 존재로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렇게 완벽한 바리새인에게 하나님이 필요나 한 것일까?
-반면 부끄러워 하늘을 쳐다보지 못한 채 가슴을 치며 한 말이라고는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밖에 없는 세리의 기도를 기쁘게 받으셨다. 주님은 자신을 한없이 낮춘 세리의 기도가 자신을 드높일 대로 드높인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더 의롭다고 하셨다.
-세리는 자신이 한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했고, 자신이 하나님께 해드리지 못한 것만 기억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자신의 의지로 했던 과오만 기억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지 않으시면 단 한 가지도 의미 있고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했다. 주의해야 한다. 지나치게 장황하고 화려한 기도는 나를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지체도 모르며 배려하지 않은 몹쓸 자기 자랑일 뿐이다.
*기도는 낮고 낮은 자리에서 높고 높으신 하나님을 우러르는 믿음의 구체적인 행동이다. 나의 신분이나 자기 의를 자랑하는 기회의 자리가 아니다.
*끈질기게, 절박하게, 낮아지고 낮아져서… 하나님 나라 제자의 걸음을 기도로 채우며 걸으리라…
*주님, 간청하는 과부처럼 끈질기게 의롭고 신실하신 하나님의 성품을 의지하며 간구를 멈추지 않겠습니다. 은혜 베푸시기를 기뻐하시는 아버지의 성품을 의심하지 않겠습니다.
*주님, 세리의 간절하고 절박한 자기부인의 기도가 제 안에서 메마르지 않기를 노력하겠습니다. 늘 겸손하게 하늘의 인자하심을 소망하며 고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