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9:28-48 예루살렘 입성, 성전청결과 말씀을 가르치심
말씀하신대로 예루살렘 경계에 도착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보내 나귀 새끼를 가져오게 하고, 제자들은 예수님을 나귀에 태우고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신다. 무리는 환호하며 맞아 들인다.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여정에서 바리새인들의 방해가 심심찮게 있었지만, 예수님은 성경의 예언을 성취하신다. 그런데 예루살렘이 한 눈에 들어왔을 때 예수님은 그의 운명을 예견하며 눈물을 흘리신다. 그리고 성전에 들어가 청결하게 하고 날마다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르치신다.
본문부터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이 마무리되고 본격적인 예루살렘 사역이 시작된다. 예수님은 성경의 다양한 예언들을 성취하시고 평화와 겸손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다. 본문은 예수님의 입성을 네 장면으로 묘사한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실 때 제자들과 무리는 환호한다(28~38절).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환호성을 침묵시키려 하고(39~40절),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운명을 생각하시며 우신다(41~44절). 그렇게 들어가신 성전을 청결케 정화하신다(45~48절). 본문은 이와 같은 각각의 장면들을 통해 예수님의 왕 되심을 묘사하고 예수님을 통한 하나님의 방문을 거부한 예루살렘의 운명을 경고한다.
한편 누가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 경로를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본문에서는 감람산, 벳바게, 베다니와 같은 이동 경로를 구체적으로 언급한다. 이 길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도성에 이르는 짧은 거리를 예수님이 나귀 타고 이동하는 장면을 상세하게 설명한 것이다(28~40절). 감람산은 기드론 골자기를 지나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해 있고, 요세푸스는 감람산과 예루살렘의 거리를 약 925m(유대전쟁사)와 약 1,110m(유대고대사)로 설명한다.
1.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28~38절)
예수님은 므나 비유를 전하고 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다(28절). 누가는 예루살렘을 예수님이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실 목적지로 반복해서 언급했다(9:31, 51: 13:31~35; 18:31~34). 예수님은 드디어 감람산에 이르셨다(29, 37절). 감람산은 구약에서 종말에 메시아가 이르는 장소로 지목된 곳이다. “그 날에 그의 발이 예루살렘 앞 곧 동쪽 감람산에 서실 것이요(슥 14:4).” 감람산 근처 벳바게와 베다니에 도착했을 때, 예수님이 두 명의 제자를 보내 나귀를 풀어 오게 하신다(29절). 나귀는 맞은편 마을에 있고 아무도 타지 않은 새끼 나귀다(30절). 만일 제자들에게 나귀를 풀어가는 이유를 누군가 물으면 “주가 쓰신다”고 말하면 된다(31절).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로 새끼 나귀를 풀어 왔다. 나귀의 주인들이 새끼 나귀를 풀어가는 이유를 물었고, 제자들은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했다(33~34절).
누가는 왜 예수님이 나귀를 준비시키는 장면을 자세하게 서술할까? 이것은 나귀를 데리고 오는 것이 예수님의 정체와 밀접하게 관련되기 때문이다. 먼저, 나귀를 풀어 오는 내용은 예수님을 통치자(왕)로 암시한다. 누가는 다섯 차례에 걸쳐 나귀를 풀어 오는 것을 언급한다. 창세기 49:10~11(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 그의 암나귀 새끼를 아름다운 포도나무에 맬 것이며… )은 통치자의 나귀가 묶여 있다고 묘사한다. 이제 왕으로 오신 이가 교통수단으로 사용하도록 나무에 묶여 있는 나귀를 풀어 와야 한다. 이 부분에서도 왕의 겸손이 내포된다. 창세기 49장에 예고된 통치자는 영광스런 모습을 지닌 반면에 예수님은 남의 소유인 나귀 새끼를 잠시 빌려 사용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주(퀴리오스, 31, 34절)”로서 나귀 “주인들(퀴리오이, 33절)”에게 나귀를 요구하는 것은 왕의 소유권을 의미한다. 이어서 제자들에게 주인들의 질문과 행동을 예고한 장면은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지식을 강조한다. 또한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은 스가랴 9:9에서 예고한 왕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스가랴는 시온(예루살렘)에 오는 왕이 겸손하기 때문에 나귀를 탄다고 선언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슥 9:9).” 짐승을 타고 가는 모습은 다윗의 아들(솔로몬)이 왕으로 세움받기 위해 노새를 타고 가는 장면과 연결된다(왕상 1:33).
제자들은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놓고 예수님을 그 위에 올려 드림으로 예수님을 존귀하게 섬긴다(35절). 길에 겉옷을 펼치는 행위도 예후가 왕으로 입성한 전통을 상기시키므로(왕하 9:13) 왕을 맞이할 때의 행동이다(36절). 예수님은 걸어서 예루살렘에 오셨지만 이 순간은 나귀를 타고 입성하믕로써 왕의 신분을 암시하신다. 이렇게 나귀를 탄 예수님은 감람산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에 이르셨다(37절). 그때 제자들의 무리가 기뻐하며 큰 소리로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 복되다고 외친다(38절).
이 노래는 시편 118:26의 인용이다. 이 시편은 유월절과 장막절과 오순절과 같은 큰 절기를 맞아 성전에서 예배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을 환영할 때 부른 노래였다. 제자들의 무리는 예루살렘과 성전으로 향하는 예수님에게 “왕(바실류스)”의 칭호를 붙인다. 2:14에서는 천사들이 합창하며 하늘의 영광과 땅의 평화를 노래했으나, 본문은 제자들의 무리가 “하늘에는 평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을 노래한다. 평화는 전통적으로 왕이 주는 선물이었다. 하늘의 평화는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의 보좌 우편에 앉아 우주를 통치하실 것을 예고하는, 다시 말해 하늘의 대관식을 알리는 표현이었다(엡 2:14~18).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2. 제자들의 환호를 침묵시키려는 바리새인들(39~40절)
제자들의 무리가 환호성을 지르자 이를 들은 어떤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제자들을 꾸짖어 달라고 요청한다(39절).그들은 제자들의 환호성이 하나님을 모욕하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므나 비유에서 귀인이 왕위를 받고 오는 것을 반대하는 자들과 같이 행동한다(14절).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를 지를 것이라고 대답하신다(40절). 이는 사람이 진실을 알지 못하면 돌과 같은 자연이 진리를 외친다는 뜻이다. 하박국 2:11에서 “담에서 돌들이 부르짖고 집에서 들보가 응답하리라”고 밝힌다.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의 입을 막아버리면, 생명이 없고 말이 없는 물체인 돌들이 예수님의 정체와 하나님의 계획을 알릴 것이다.
이것은 제자의 무리가 예수님에 대해 외친 내용이 그의 정체를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3. 예루살렘을 보고 통곡하시는 예수님(41~44절)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까이 왔지만, 백성은 그를 왕으로 영접하지 못한다. 예수님은 자신들의 왕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는 예루살렘의 운명을 생각하고 우셨다(41절).
42~44절은 예루살렘에 대해 탄식하는 내용이다. 예루살렘은 두 가지를 알지 못한다. 첫째, 예루살렘은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한다. 예수님은 진정한 왕으로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선물인 평화를 선사하실 수 있다. 평화는 지금 예루살렘에 입성하는 예수님을 통해 주어지는 구원의 선물이지만, 백성은 구원자를 곁에 두고도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예루살렘, 즉 이스라엘 백성을 방문하지만(예, 1:68; 7:16), 예루살렘은 깨닫지 못한다,
하나님의 방문을 알지 못하는 예루살렘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심판의 비극이 닥쳐올것이다. 심판의 날이 이르러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도성을 둘러싸고 포위할 것이다(43절). 원수들은 예루살렘과 그곳에 있는 자녀들을 땅에 메어칠 것이다(44절).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않고 무너질 것이다.
4. 성전을 청결케 하시는 예수님(45~48절)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곧바로 성전에 들어가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으셨다(45절). 이스라엘의 왕(예수님)은 예루살렘 도성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우주의 중심인 성전에 들어간다. 특히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에게 성전은 아버지의 집이다(2:41~51).하나님은 ‘내 집’이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으나(사 56:7), 예루살렘 성전은 강도의 소굴(렘 7:11)이 되고 말았다(46절).
강도들은 유대 지도자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구축한 자들에 의해 하나님의 집은 이권을 챙기는 종교 강도들의 보물 저장소가 되고 말았다. 본래 성전은 하나님의 뜻이 선포되는 곳이기에 예수님은 매일 성전에서 가르치셨다(47절); 21:37; 22:53). 성전은 종교 기득권자들의 안전지대가 아니라 가난하고 곤궁에 처한 자들의 피난처여야 하므로(4:16~30),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에서처럼 기쁜 소식을 성전에서도 선포하셨다(20:1).
그러나 종교적-정치적 기득권 세력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죽일 음모를 꾸민다. 다만 백성이 예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기 때문에 그를 죽일 방법을 찾지 못했다(48절).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하지 않는 종교지도자들은 하나님의 집을 이득 수단으로 사용하고 백성은 평화를 얻지 못했다. 예수님의 왕 되심을 인정하고 그의 가르침이 충만한 공동체가 평화를 누린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가 메시아라면 다윗이나 모세 같이 백마를 타고 영웅적으로 입성하시리라 기대했다. 하지만 예수님은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정복자가 아니라 스가랴 선지자가 예언한 겸손과 평화의 왕이심을 보여주신다(슥 9:9). 이 왕은 군림이 아닌 죽음을, 영광이 아닌 수치의 십자가를, 선동이 아닌 섬김을 통해 이 평화를 이룬다.
-하나님 나라의 평화는 로마의 평화처럼 힘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물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참 평화는 로마가 무너지고 이스라엘이 독립을 얻는 정치적인 전복을 통해서가 아니라 메시아가 가져온 하나님 나라에서 임할 것이다.
-예수님은 자신이 왕 되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가시면서도 조금도 주저함이 없으시다. 자신이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타고 가실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친히 주권적으로 준비하심으로써 수동적으로 순종하지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미래를 감당하신다.
-예수님은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 나라의 왕이시지만, 동시에 수난 받는 종이라는 정체를 잊지 않으신 것이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식을 능동적으로 선택하여 사는 삶이 예수님처럼 예수를 뒤따르는 제자의 삶이다.
-갈릴리에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들을 본 제자들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향하여 호산나 찬양을 드린다. 하늘의 평화와 영광을 이 땅에 임하게 하는 메시아의 역할을 그에게 기대한 것이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을 온전하게 이해한 것은 아니지만, 그 찬양은 예수님께 합당한 것이었다.
-반면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향한 메시아적 찬양을 중단시키라고 요청한다. 하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신다. 무리의 기대대로 이제 곧 유월절이 되면 자신을 통해 새로운 영적 출애굽이 전개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돌들이라도 일어나서 찬양해야 할 일이었다. 오늘도 예수님은 우리에게 왕으로 대접받기 원하신다. 우리가 침묵하면 우리가 돌들 취급하던 자들이 그 찬양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하실 것이다.
-심판이 임박한 평화의 성, 예루살렘…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찬송하며 맞이하는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보면서 우신다. 천사가 말한 평화의 왕(2:14)이 도착했지만, 예루살렘은 로마가 약속한 거짓 평화에 취해 있거나 군사적인 힘과 혁명으로 이룰 평화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예수 자신을 배반하거나 배척하며 죽일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는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을 만큼 참혹한 파멸과 파괴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예수님에게 예루살렘은 자신을 죽일 도성이었지만, 사랑하기를 포기할 수 없는 도시였다. 뜨거운 눈물의 선포 없는 차가운 심판의 선포는 선포자 자신을 망가뜨린다. 첫 사랑을 잃은 에베소 교회의 전철을 밟을 수 있다. 주님은 위를 보고 우실 것 같은가?, 웃으실 것 같은가?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 예루살렘은 심판을 선고받을 만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성전을 사적인 이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돌아가야 할 영광과 재물을 가로채는 강도의 소굴로 변질시켰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그 기능이 정지될 것을 보여주기 위해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아버리신다.
-이미 성전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소통과 교제의 장이 아니라 힘 있는 자들의 탐욕과 무의미한 종교행위만 무성한 우상숭배의 공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유대교 신앙의 핵심을 흔드는 일이요 기득권의 본령에 도전하는 위험한 행위였다. 오늘날 한국의 교회가 “관계보다 공간을 숭배하고, 마음보다 물질을 중시하며, 낮은 곳이 아니라 힘 있는 곳을 지향”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볼 일이다.
-예수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데,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백성의 지도자들은 그 가르침에는 관심이 없었다. 도리어 백성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귀 기울여 듣는 것을 싫어하여 예수님을 죽일 궁리만 하는 “강도들”이었다. 그들은 만민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집을 만민을 구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죽일 기도(모의)를 하는 공간으로 변질시켰다. 또 주의 말씀이 선포되어야 할 성전이 말씀을 침묵시키는 곳이 되게 하였다.
-성전인 내 안에서는 돈과 권력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있는가? 죄된 내 자아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죽이고 예수님을 죽이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이다.
*주님, 평화의 왕으로 이미 오셨고, 심판주로서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합니다. 그 주님의 이름을 드높이는 삶을 살아내다, 만왕의 왕으로 다시 오실 주님을 뵙겠습니다.
*주님, 강도의 소굴이 된 성전을 깨끗케하시고 말씀이 사라진 성전에 다시 하나님 나라 말씀을 풍성하게 공급하시는 주님을 봅니다. 저에게 맡겨주신 사역의 현장에서도 거룩하게하고 말씀이 넘쳐나도록 충성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