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삭개오 [눅 19:1-10]
 – 2025년 04월 04일
– 2025년 04월 04일 –
눅 19:1-10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삭개오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직전에 통과해야 하는 여리고에서 예수님은 삭개오의 집에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구원이 임했음을 선언하신다. 
 
삭개오 이야기는 부자 관리(18:18~34)와 거지 맹인(18:35~43) 이야기 다음에 배열되고 의미도 연결된다. 먼저 삭개오와 부자 관리는 비슷하면서 다르다. 둘 다 부자인 지도자다. 그런데 부자 관리는 의인이라고 공인된 반면, 삭개오는 죄인이라고 공인된 인물이다. 부자가 구원을 얻는 데 장벽이 돈이었다면, 삭개오에게는 사람이었다. 부자는 돈 때문에 예수님을 환대하지 못한 반면, 삭개오는 예수님을 환대한 결과로 부를 나눈다. 특히 부자 관리 이야기에서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는 질문은 삭개오 이야기에서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9절)”는 예수님의 답으로 해결된다. 
 
또한 삭개오와 맹인은 다르면서도 비슷하다. 맹인은 구걸하는 거지고 삭개오는 부자 세리장이다. 맹인에게 장벽은 사람이었고 삭개오에게도 사람이었다. 맹인과 삭개오는 예수님을 “보기” 원했고(18:41; 19:3) 결국 보았다. 둘 다 구원을 얻었다. 각각 다윗의 자손과 인자를 만난다. 예수님을 만난 맹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43절), 삭개오는 재산을 나누고 선하게 직무를 수행하기로 결단한다. 삭개오의 이야기는 앞의 두 이야기와 더불어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태도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1. 예수님을 보기 원하는 삭개오(1~4절)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고 있을 때였다(1절). 세리장이자 부자인 키 작은 삭개오가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다. 누가는 “원하다” 또는 “찾다”의 뜻인 단어(제테오)를 사용하여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원했다(3절)고 표현한다. 하지만 그는 세리라는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혐오감과 키 작은 사람이라는 존중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길을 터주지 않자 대로변에 있는 돌무화과나무에 재빨리 올라갔다. 그 나무 위에서 그곳을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려고 기다렸다(4절). 
 
앞 단락에서 부자 관리도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지만, 돈을 더 의존했기에 예수님을 환대하지 못했다(18:18, 23). 반면 거지 맹인은 사람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통해 보기 원했고 구원을 얻었다. 삭개오는 사람의 장벽을 뚫고 예수님을 기필코 보려했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신 예수님을 만난다.
 
 
 
2. 삭개오를 찾으시는 예수님(5~6절)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몸을 의지한(숨긴) 채 예수님이 지나가실 길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흥미롭게도 삭개오가 예수님을 보기 원했으나 예수님은 이미 삭개오의 이름을 아시고 나위 위를 올려다보셨다(5절). “오늘”, “해야 한다”와 같은 표현을 통해 지금 당장 잃은 자를 찾아서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을 드러낸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나무에서 빨리 내려오라고 지시하신다.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말씀에 삭개오는 즉시 내려와 즐거워하며 예수님을 환영한다. 앞 단락의 부자 관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근심하며 떠나버렸지만(18:23), 삭개오는 예수님의 명령에 즉시 기쁨으로 반응한다. 
 
 
 
3. 삭개오의 집에 임한 구원(7~10절)
사람들은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숙박하러 들어간 것 때문에 수군거린다(7절). 이들의 시각에서 부정과 정결은 유대인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표시 중 하나였기에,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숙박하는 행위는 유대 공동체의 정결과 결속력을 훼손하는 문제였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이라고 칭하는데, 당시 “죄인”이라고 규정당한 사람들은 도덕적인 잣대에 따른 평가뿐 아니라 종교-사회적인 관점에 따라 규정되었다. 삭개오의 경우 유대 공동체의 관습이나 규범에서 벗어난 직업을 가졌다는 이유로 정죄했을 것이다. 사람들은 삭개오를 죄인으로 무시했으나 그는 죄인의 행동과 전혀 다른 결심을 사람들 앞에서 표명한다. 자신의 소유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소유”는 삭개오의 임금이 아니라 재산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기를 결심했다. 그리고 만일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일이 생기면 네 배를 갚겠다고 약속한다. 그는 회개의 반응으로 세례 요한의 지시(3:10~14)처럼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직무를 새롭게 수행하는 방향을 택한 것이다. 또 가난한 자들을 위해 부를 분배하고 약자를 착취하지 않는 태도는 “가난한 자들” 즉 갚을 것 없는 자들을 환대하라는 예수님의 명령(14:13~14)을 실천하는 것이었다. 삭개오는 9절과 연결하여 보면 구원을 받은 반응으로 긍휼을 베풀고 있는 것이다. 
 
삭개오의 말을 들은 예수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왔다!”고 선언하신다. 삭개오는 예수님이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 복음이 경험되는 순간을 “오늘” 경험한다. 가난하고 약한 자를 위한 삭개오의 선한 행위는 예수님의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방문 이후에 일어난 구원의 은혜에 대한 반응이었다. 예수님의 방문이 한 사람을 변화시킨 것이다. 예수님의 환대가 삭개오의 환대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예수님은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부르신다. 구원받은 자의 반응은 회개로 나타나며 회개는 실제 행위로 나타난다. 세례 요한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을 아브라함의 자녀로 정의했다(3:8). 또 요한은 회개하는 세리에게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3:13)”고 지시했는데, 삭개오는 요한의 요구를 훨씬 뛰어넘는 결단을 내린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만남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는 은혜를 얻었다. 이로써 예수님이 죄인의 집에 머문다는 비판에 대한 답을 하셨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기 위해 온 인자이기 때문에 죄인의 집에 머무셨다(10절). 잃어버린 양을 찾고 모으는 목자로(15:1~7) 에스겔 34장에서 예고한 다윗 곧 약속된 목자다(34:15~16, 23~24). 삭개오 이야기는 유대인의 시각에서 부정한 자로서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불릴 자격이 없었고, 사회적으로 수용하기 힘든 그를 예수님이 찾아 오셨다는 것 자체만으로 유대 사회에서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삭개오 이야기는 이런 측면에서 부자 관리 이야기와 비교된다. 사람들이 부자 관리가 돈이 많아서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18:23)을 보며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까?”라며 구원의 가능성에 대해 제기한 의문(18:26)에 대답하신다. 삭개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즉 구원을 얻은 부자다. 그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였다.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부자의 반응은 궁핍한 자들을 돌보고 부에 근거한 권위를 부당하게 행사하지 않는 것으로 표현된다(12:33; 14:33; 18:22). 
 
 
 
나는?
-사람이 모든 것을 얻을 수 없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내어주기 마련이다. 삭개오는 부자로 살기 위해 민족과 양심을 바려야 했다. 로마 식민지 시대의 세리가 그런 자리였다. 먹고 살기 위해 감수한다고 했지만, 삭개오의 고뇌와 아픔, 가시지 않는 내면의 갈등이 이런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갈등과 고민 없이 사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까? 그렇게 고뇌하다 예수님을 만난 것이다.
 
-삭개오는 마음이 가난한 부자였다. 소유를 포기하지 못해 근심하며 떠난 부자 관리와 달리 그는 불의한 재물 때문에 괴로운 세리장이었다. 또 그는 예수님을 보려고 나무 위에까지 올라가는 “어린아이”였다. 지위 높고 아마도 악명(?)높은 세리장이었지만, 가슴을 치며 불쌍히 여겨달라고 간구한 성전의 세리처럼(18:13), 그리고 예수님을 향해 사람들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쌍히 여겨 주소서”라고 외친 맹인처럼, 그는 자기 삶에 대한 불만과 새로운 삶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부자 관리와 달리 높은 지위가 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의 처소를 마련한 사람이었다. 
 
-나무 위에 올라갈 정도로 삭개오의 공허와 갈망을 아신 예수님은 그에게 다가와 이름을 불러 주셨다. 귀향하는 탕자 아들을 향해 한걸음에 내달려가 맞아주던 아버지처럼, 주님은 그가 이미 오래전부터 돌아오고 있었음을 알고 계셨다. 흔한 신앙고백이나 회개 한마디 없었는데도 먼저 그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셨다. 죄인의 친구라는 조롱을 무릅쓰셨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고, 그의 집은 천국이 되었고, 성전이 되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요구가 있기 전에 먼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갱신된 삶을 약속한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구원을 선포하신다. 이제 그는 유대인들을 착취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더불어 사는 이웃으로, 그의 주인은 로마제국의 황제가 아니라 예수님으로 받아들였다. 
 
-신앙은 내가 예수님을 영접하는 일이기 보다는 그분의 초대에 내가 응답하는 일이다. 잃은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손내밈이 먼저다. 자기를 부인하고 세상보다 예수님을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한 믿음의 사람들을 영적인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부르러 오셨다. 
 
-삭개오는 즉시 나무에서 내려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영접한다. 예수님이 요구하시기 전에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에게 내놓고 토색한 것은 네 배나 갚겠다고 결단한다. 자기 집만이 아니라 자신의 직장까지 예수님의 통치가 임하는 곳이 되게 하겠다는 뜻이다. 입술로만이 아니라 마음과 손발로, 삶 전체로 예수님을 영접하겠다는 뜻이다. 죄인 친구들도 이 예수께 초대한다. 죄로 인해 소외된 자기 친구들에게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는 보기 드문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였다. 
 
 
*본문을 통해 두 가지를 결심해 본다. 삭개오가 주님을 보기 위한 간절함으로 돌무화과 나무에 주저하지 않고 오른 것처럼, 나도 주님의 은혜를 바라보기 위해 할수만 있다면 사회적 체면이나 지위와 상관 없이 “어린아이”처럼 주님의 은혜를 사모해야지.. 바라보아야지… 하는 마음이다. 또, 삭개오의 회개가 마음에 새겨진다. 그의 회개는 단지 자신이 가진 부를 나누어주겠다는 것 만으로도 대단한 것이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세리”라는 직업의 터를 예수님의 통치 아래 두겠다는 의지이다.
 
*회개했으니 사람들이 죄인이라 수군거리는 직업을 바꾸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그 직업이 예수님의 통치 아래 가져와 하나님의 정의와 사랑이 드러나는 것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삭개오에게 “하나님 나라”는 새로운 직업, 새로운 환경으로 전환하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삶의 터전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한 것이다. 예수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어느 곳이든 하나님 나라라고 했으니, 정직하게 세리의 업무를 감당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삭개오는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였다. 구원이 그에게 임한 것은 주님의 통치에 온전히 그 삶을 순종했기에 가능했다. “어린아이”처럼 주님을 바라고, 집이든 직장이든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는 삶은 “구원이 임한 삶이며, 그곳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나의 삶이 어느 곳에서든지 주님을 향한 ‘어린아이’같은 순전한 마음으로 주님을 갈망하고,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기를 결심해 본다.
 
*”뜻밖의” 찾아오심, “뜻밖의” 구원 선언… 주님은 이렇게 사람들의 관습의 틀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 찾아오셨다. 나에게도 그렇게 오셨다. 그렇기에 삭개오와 같이 어린아이와 같이 주님을 사모함… 어느 곳에든 주님의 통치에 순종함… 오늘도 이렇게 주님과 동행하기를 원한다.
 
 
 
 
*주님, 삭개오가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전에 먼저 삭개오의 이름을 불러주신 은혜가 저에게도 임하였었음을 돌아봅니다. 그 부르심이 없었다면 지금, 여기에 있을 수 있을까요?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주님, 주님을 맞아들이는 것은 입술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임을 또 확인하게 됩니다. 이 땅의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삶으로 주님의 주님되심을 드러낼 때 반드시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이루어짐을 세상을 알게 될 것을 압니다. 삶으로 주님을 따라 살아내겠습니다. 
*주님, 삭개오의 변화가 놀랍습니다. 그저 말만 무성한 변화가 아니라 구체적인 삶의 변화이기에 더 도전이 됩니다. 저도 삶의 변화를 구체적으로 추구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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