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8:31-43 예수님의 길, 그 길을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
본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의 마지막 수난 예고(31~34절)와 거지 맹인의 치유 사건(35~43절)으로 구성된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표를 실현할 목적지 예루살렘의 문턱인 여리고에 이르셨고 그곳에서 거지 맹인을 구원하신다.
1. 예루살렘에서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는 예수님(31~34절)
부자 관리와 대화를 마치신 후 예수님은 열 두 제자를 데리고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신다. 변화산에서(9:31), 그리고 예루살렘으로의 여행을 출발하시면서(9:51, 53) 밝히셨듯 다시 한 번 예루살렘에서 수난을 예고하신다.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해 예고하신 모든 것이 인자를 통해 성취될 것임을 더 구체적으로 알리신다(31절; 24:25, 27).
예수님은 수난과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구약 전체의 초점으로 이해하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그의 죽음과 부활을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예수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24:44)”이 성취된 사건으로 설명하실 것이다. 32~34절은 인자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될 것을 구체적으로 밝힌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듣고서 이 내용을 이미 예고 하셨고, 본문은 누가복음에서 마지막 수난 예고다.
구체적으로 인자는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조롱당하고 능욕당하고 침 뱉음을 당할 것이다(32절).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이방인들에게 넘길 것이며, 이방인들이 그의 죽음을 집행할 것이다. 조롱과 능욕과 침 뱉음은 십자가 형벌의 목적이 당사자에게 수치와 고통을 안기는 것임을 암시한다. 모욕하자는 자들은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다(33절). 이와 같은 수치와 고통은 여호와의 종이 겪는 운명으로 이미 예고된 것이다(사 50:6). (여호와의 종의 운명은 고난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때문에) 수난 받은 인자는 3일 만에 살아날 것이다(33절).
한편 제자들은 예수님의 예고를 전혀 깨닫지 못한다(34절). 즉, 예수님이 이루실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 어떻게 목적을 성취할 것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함께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으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목표는 서로 달랐다. 누가는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를 “그 말씀이 감취었다”로 표현한다. 메시아가 수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성취한다는 관점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없었다. 그런 세계관에서 살았던 제자들 역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으나 그의 죽음과 부활을 받아들이지는 못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세워질 영광의 나라를 고대한 제자들에게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이해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후에 그의 고난과 부활이 성경에 예고된 진리임을 때달을 것이다(24:45; 행 2:1~4).
2. 여리고에서 거지 맹인을 치유하시는 예수님(35~43절)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 일어난 사건이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사람들이 잠시 머물러 쉬는 곳이었다. 예루살렘에서 약 20~30km떨어진 곳이었으므로, 예수님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직전이었다. 그곳에서 맹인 한 명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었다(35절).
그는 자기 힘으로는 생존할 수 없어 타인의 자비에 기대어 살았다. 무리가 지나가는 소리를 듣고 맹인이 무슨 일인지 묻는다(36절). 무리가 나사렛 예수가 지나가신다고 알려주고 그 말을 듣자마자 맹인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38절). 그는 나사렛 출신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 알고 있었다. 마치 예수님이 나사렛 회당에서 자신의 정체와 사명을 선언하실 때 현장에 있었던 사람처럼 예수님이 수행하시는 사명의 핵심을 간파하고 있었다.
거지 맹인은 예수님을 왕을 뜻하는 “다윗의 자손”으로 부른다. 맹인의 관점에서 다윗의 자손은 하나님 나라의 왕이므로 왕의 도성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사야의 예언에 의하면 다윗의 자손이 통치할 나라는 맹인이 눈을 뜨는 긍휼의 나라다. 지혜와 지식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영적인 눈이 멀었지만, 거지 맹인은 예수님의 정체를 정확하게 보고 있었다.
앞서 가는 사람들(마가는 “많은 사람(막 10:48)”)이 조용히 하도록 맹인을 꾸짖는다(39절). 이들은 거지 맹인의 간청이 새로운 나라의 건설을 위한 행진을 가로막는다고 여긴 것이다. “꾸짖다(에피티마오)”는 제자들이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오는 것을 막고 꾸짖을 때 사용된 동사다(18:15). 제자들과 사람들은 사회에서 가장 나은 신분이었던 어린아이처럼 거지 맹인도 예수님의 복을 받지 못하도록 소외시킨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가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처럼, 거지 맹인과 같이 비참하게 낮아진 인생에게 예수님의 구원이 선물로 주어진다.
사람들의 책망에도 거지 맹인은 더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외친다(39~40절). 예수님이 앞선 비유에서 말씀하신 끈질기게 간청하는 과부처럼, 맹인은 물러서지 않는다. 그의 소리를 들은 예수님은 멈춰서서 그를 데리고 오도록 지시하신다(40절). 예수님은 거지 맹인처럼 은총을 받을 대상이 아니라고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사람을 위해 오셨고 곤궁에 처한 자의 간청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예수님은 맹인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신다(40~41절).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던 맹인은 더 강한 권위를 의미하는 “주”로 예수님을 부르며 보기를 원한다고 고백한다(41절). 그는 부와 명예가 아닌 보기를 원한다. 주님의 긍휼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든 원인을 해결할 수 있음을 믿는다.
예수님은 맹인의 믿음이 그를 구원하였다고 선언하신다(42절). 예수님의 능력에 대한 믿음은 간청하는 과부처럼(18:8), 사람들의 반대에도 포기하지 않고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태도로 드러났다. 예수님은 맹인을 향해 ‘치유하다’가 아니라 ‘구원하다’라는 동사를 사용하신다(7:50; 8:48; 17:19). 부자 관원의 이야기와 연결하여 보면, 부와 권력을 확보한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실에 당황한 사람들은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18:26)”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대답이 거지 맹인처럼 예수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 그의 능력에 의존하는 자가 구원을 얻을 것임을 말씀해주신 것이다.
구원의 특징은 반전이다. 거지 맹인은 하나님의 영광과 전혀 상관이 없던 인물이었으나 예수님의 긍휼을 얻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생으로 변했다(43절).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다. 이 광경을 본 백성이 모두 하나님을 찬송한다(44절). 부와 권력을 가진 사람의 변화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나, 누가는 거지 맹인과 같이 사회적으로 낮은 자들의 반전을 통해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증거한다. 성공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하고 외면당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나는?
-예수님께서 자신이 어떤 메시아인지를 또 드러내셨다. 온갖 고난과 수치를 당한 후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실 자신의 운명을 예고하신다. 이는 구약 성경에서 이미 예고된 일이며 자신의 예루살렘 행은 그 사명을 순종하기 위한 여정임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길임을 알리시고 이런 길이라도 따르겠냐고 도전하시고 계신다.
-제자들에게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신 예수님께서 손수 십자가의 길을 앞서 가신다. 갈릴리에서 펼쳐 보이셨던 권능을 자기 죽음을 막는 데 사용하지 않으신다. 갈릴리의 기적이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였듯이 십자가를 지는 기적도 순종을 받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 이것이 순종을 가능하게 하는 신앙의 핵심이다. 하지만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예고에 제자들은 당황한다. 제자들은 왜 십자가가 승리의 길이고 생명의 길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말해도 못 알아들을 만큼 자기 기대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런 제자들이 영적인 맹인이었다.
-여리고의 한 맹인이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사력을 다해 자비를 구한다.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 메시아로 부르면서 메시아 시대에 일어나리라고 약속된 기적을 베풀어달라고 간청한다. 힘과 권력, 정치와 경제적 의미의 하나님 나라를 기다렸던 제자들과 달리 그는 치유와 회복의 나라를 기다렸던 것이다.
-육신의 눈은 어두웠지만, 영의 눈은 제자들보다 더 좋았고, 당대의 종교지도자들보다 더 밝았다.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예수님 아니면 소망 없다고 여길 만큼 겸손한 어린아이 같은 사람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인식, 그 인식에 자신을 걸 만큼 간절하고 투철한 확신,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 하셨던 바로 그와 같은 사람이었다.
-맹인은 믿음대로 눈을 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러고는 예수님께서 걸어가시는 “그 길”을 따른다. 그는 몰랐겠지만,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었다. 지식적으로 제자들보다 아는 게 모자랐지만, 그는 제자들보다 오히려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바로 알고 더 알았다. 더 간절하게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렸다고 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자기 자신은 버리지 않고 따르고 있었지만, 맹인은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수님께 걸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수난 예고에 전혀 반응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말씀이 감취었”기 때문이다. “감취었다(크륍토)”는 의미는 “하나를 다른 것 위에 놓다”, “덮다”, “숨기다”는 기본의미를 가진 동사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사실을 알려주셨지만, 제자들은 이 사실에 담긴 의미를 깨닫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자신들이 기대하고 바라는 영광의 메시아 나라라는 환상과 소망에 덮였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제자들의 모습과 다를 바 없지 않을까? 진리의 말씀이 주어지지만, 내가 원하고 바라는 것에 덮여 “이미 임한 말씀(하나님 나라)”을 깨닫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일까? 말씀을 전하고 가르치는 삶으로 부름 받았건만, 정작 말씀을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다니… 그야말로 맹인이 맹인을 인도하는 꼴이다. 그래서 늘상 간절히 바란다. 성령께서 내 눈과 마음의 욕망에 덮여 있어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수 있는 말씀을 깨닫게 해주시기를, 덮혀 있는 것을 거둬주시기를, 그래서 선명한 진리의 말씀을 제게 맡겨주신 성도에게 분명하게 전하고 가르칠 수 있기를 말이다.
*여리고의 맹인 거지 바디매오의 예수님에 대한 태도가 눈에 들어온다. 불의한 재판관에게 강청하는 과부처럼, 가슴을 치며 하나님의 자비만을 구하는 세리처럼, 예수님 아니면 소망 없다는 어린아이의 부모들 처럼 그렇게 주님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른다. 나에게 이런 간절한 외침이 사그라지지 않기를…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에 반응하시는 주님의 사랑과 긍휼의 마음을 본받으리라. 성도의 외침에 귀를 막는 삭꾼 목자가 아니라, 어디에 있든 내게 맡기신 양의 음성을 알아채고 반응하는 선한 목자가 되리라.
*바디매오의 간절한 외침을 “꾸짖고 잠잠하라”는 사람들의 모습과 어린아이를 데려오는 부모들을 “꾸짖는”(15절) 제자들의 모습이 묘하게 겹친다. 제자들이나 무리들이나 하나님 나라 가치가 아니라 찌들고 찌든 인습과 문화에 여전히 머물러 있다. 특히 제자들은 주님의 가르침을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바디매오를 꾸짖는 사람들을 제지하지 않는다. 아… 가르침을 받고 변화하는 것이 이리도 어렵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제자들은 주님의 부활 이후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성령이 임하여는 주님의 마음과 뜻이 완전히 제자들의 마음과 뜻이 되었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성급하게 성숙함을 추구하면 되려 탈 난다.
*한땀한땀, 차근차근…. 나아가다 보면 어느새 도착해 있을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가시는 길을 함께 걸으면서도 그 길이 어떤 길인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과 달리 거지 맹인은 이미 주님의 길을 확고하게 알고 있어 치유함을 받은 후에 주저함 없이 주님을 따름을 봅니다. 저의 눈이 주님의 주님 되심을 늘 바라보며 깨달아 뒤따르는 길이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