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0:1-18 포도원 악한 농부들 비유
본문은 성전에서 복음을 전하시던 예수님이 성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대제사장들, 서기관들, 장로들)과 나눈 대화(논쟁)를 소개한다. 기득권의 위협을 느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질문하고 그를 죽일 기회를 얻으려 한다(1~8절). 예수님은 포도원 농부 비유(9~15절)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아들을 배척한 지도자들이 심판을 피할 수 없음(16~18절)을 경고하신다.
1. 예수님의 권위에 대해 질문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1~8절)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성전에서 백성을 가르치고 복음을 전하실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장로들과 함께 왔다(1절).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정화하고 그곳에서 가르치는 모습을 보고 나서 그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기 때문에(19:47), 악의를 품고 찾아온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무슨 권위로 ‘이것들(타우타)”을 행하고 누가 이런 권위를 주었는지 말하라고 요구한다(2절). “이것들”은 앞 단락의 ‘성전 정화 사건(19:45~46)’을 가리키고 그들이 목격하거나 보고받은 다른 사건들도 포함할 것이다. 특히 백성의 환영을 받고(19:36~40) 성전의 운명을 경고하고(41~44절) 성전을 정화하고(45~46절) 가르치는(47절) 장면은 종교지도자들의 기득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권위(엑수시아)의 출처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그를 거짓 선지자로 또는 신성모독자로 정죄하려는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잡힐 시점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은 우회적으로 답변하신다.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고 도리어 요한의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지신다(3절). 요한의 세례가 하늘에서 온 것이지 사람에게서 온 것인지 물어보신다(4절). 요한과 예수님의 권위와 사명은 밀접하게 연결된다.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을 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리를 들으셨고, 구원 사역을 실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받으셨다. 만일 요한의 세례가 하늘, 즉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라면 예수님의 권위도 하나님에게서 왔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이렇게 예수님은 종교지도자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신다.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그들은 만약 요한의 세례가 사람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한다면 그를 선지자로 믿는 백성이 돌로 칠 것이다(6절). 백성은 요한을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로 믿었기 때문에 그를 만나러 광야로 나갔다(7:24~26). 종교지도자들은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한다고 대답한다(7절). 그러자 예수님도 자신이 무슨 권위로 ‘이것들’을 행했는지 말하지 않겠다고 하신다(8절). 예수님은 명시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그들에게 알리지 않지만, 다음 비유와 성전 강화의 마지막 부분(41~44절)에서 암시하신다.
먼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암시는 이어지는 비유에 드러난다. 예수님은 41~44절에서 자신의 권위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은 “주”의 권위, 즉 하늘로부터 온 권위임을 말씀하실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 아들의 권위로 아버지의 집을 청소하셨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뜻을 가르치셨다. 본문에 등장하는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과 장로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기득권을 형성해왔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성전의 관습을 뒤흔든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다. 그들이 영적으로 깨어 있었다면 예수님의 행위가 구약에 예고된 하나님의 경고와 심판과 관련이 있음을 파악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득권에 집착하는 마음이 그들의 눈을 가렸다. 그래서 자신들의 권위를 위협하는 잠재적 권위를 제거하는 데만 혈안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을 섬기도록 부름받은 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통해 이익을 추구하고 소유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나님과 정면으로 맞서는 아이러니가 생긴다. 영적인 눈이 흐려지면 하나님이 돌보도록 맡기신 사람들을 권위주의로 대하고 예수님의 정체를 볼 수도 없다.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부름받은 사람일수록 예수님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의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
2. 악한 포도원 농부들_하나님께 신실하지 않은 예루살렘의 지도자들(9~18절)
이제 예수님은 자신의 권위에 대해 질문한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겨냥한 비유를 전하신다. 1~8절은 예수님의 권위를 소재로다루었다면, 본문의 비유는 “소유권”에 초점을 맞춘다.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절대적인 권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도 자신들의 절대적인 권위를 근거로 하나님의 백성도 자신들이 소유한 것으로 착각했다.
비유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을 농부들에게 맡기고 타국에 가서 오래 머물렀다(9절). 포도원을 준 것이 아니라 경작을 맡긴 것이며, 농부들은 계약에 따라 세를 내야 한다. 추수를 마치는 시기에 주인은 포도원의 소출을 받으려고 종을 보냈다(10절). 그런데 농부들이 종을 심하게 때리고 빈손으로 보냈다. 주인이 다른 종을 보내자 이번에도 종을 심하게 때리고 모욕하고 빈손으로 돌려보냈다(11절). 주인이 세 번째 종을 보냈으나 농부들은 마찬가지로 종을 상하게 해서 내쫓았다(12절). 세 명의 종들이 겪은 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겪은 ‘거절’과 ‘치욕’과 ‘고통’을 의미한다.
이에 포도원 주인은 ‘사랑하는 아들’을 보내면 농부들이 아들을 존중할 거라고 생각한다(13절). 살기가 가득하고 굶주린 늑대 같은 농부들에게 소중한 아들을 보내기로 결정하는 것은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신 사건은 인간의 시각에서는 낭비와 어리석음이다.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을 보고 그가 상속자이기 때문에 죽여서 유산을 가로채자고 논의한다(14절). 드디어 농부들의 숨은 의도가 드러났다. 그들이 원했던 것은 포도원에 대한 “소유권”이다. 포도원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었고, 아들은 상속자의 법적 권한을 갖고 있다. 농부들은 상속자만 없애면 소유권을 확보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들을 포도원 밖으로 내쫓아 죽인다(15절).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포도원 주인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하겠느냐?” 소유권을 얻으려는 욕심에 눈이 멀어 주인의 사랑하는 아들을 죽인 대가가 무엇일지 분별하지 못했다. 주인은 돌아와서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길 것이다(16절). 주인이 징벌하는 대상은 농부들이다. 포도원은 그대로 유지한다. 만일 포도원을 이스라엘 또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이해하고 있다면, 비유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징벌을 받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예수님의 답을 듣던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16b절).
비유의 의미를 파악한 자들은 자신들의 기득권과 권위가 무너질 수 있다는 두려움으로 격렬히 비유의 내용을 부정한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시편 118:22을 인용하신다.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본문의 돌은 두 벽을 연결하는 모퉁잇돌이다. 이 돌 위에 떨어지는 자는 깨어지고 이 돌이 사람 위에 떨어지면 그 사람은 가루가 되고 흩어지고 말 것이다(18절). 예수님에 대한 반응에 따라 상이한 운명으로 귀결되는 것은 시므온이 이미 예고했었다.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2:34)”.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고 그를 따르는 그를 따르는 자들을 배척하겠지만, 아들이 건축물의 기초석이 되고 아들을 거부한 자들이 벌을 받는 반전의 결과가 나타날 것이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이 유대인들에게 배척받고 죽음에 넘겨진 이유를 알 수 있다. 예수님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새롭게 건설될 공동체의 기초가 된다. 소유권을 확보해 기득권을 영구화하려던 종교지도자들은 아들을 죽인 대가로 진멸당할 것이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새로운 종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을 맡기신다.
교회는 소작인들의 비극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영적인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지 소유권을 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일을 맡았다고 해서 심판을 면제받는 것은 아니다. 기득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려고 소유권을 주장한 결과가 예수님에 의한 심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나는?
-성전 권력자들은 성전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몰라보고, 그분이 장사하는 자들을 내쫓고 복음을 전하신 권위가 어디서 났는지를 묻는다. 몰라서 물은 것이 아니라 그의 자격 없음을 드러내기 위하여 질문한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을 “강도의소굴”이라고 한 것을 성전에 대한 모독으로 고소하기 위해 시비를 걸었을 것이다. 그 권위가 하나님으로부터 라고 하면 곧바로 신성모독과 성전모독 혐의를 부여할 참이었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신의 거처를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실 리 없다고 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성찰하지 않는 자들은 형식이나 태도를 문제 삼아 공격하여 자신의 문제를 외면하려 한다.
-예수님은 몰라서 묻는 질문에는 질문 이상으로 대답해 주신다. 하지만 시험하기 위한 질문에는 질문의 의도를 폭로하는 역질문으로 응수하신다. 성전 권력자들은 예수께 장사하는 자들을 내어 쫓고 복음을 전한 권위가 어디서 났는지를 묻는다. 예수님은 직접적인 대답을 피하신 채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푼 권위는 어디에서 기원하는지를 되물으신다. 요한이 예수 자신을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는 존재로 전파하였기 때문이다. 헤롯에게 참수를 당하였지만, 요한은 여전히 백성들의 인정을 받고 있었기에 종교지도자들은 그를 불편하게 여기기는 했지만, 요한의 권위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예수님은 역질문을 통해 그들이 얼마나 일관성 없이 요한과 예수님을 상대하고 있는지를 드러내셨다.
-종교지도자들은 요한의 권세가 어디서 왔는지 묻는 예수님의 질문에 침묵한다. 하나님으로부터든지 사람으로든지 어떤 대답도 곤란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진리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진리보다 실리를 따라 움직였고 살았기 때문이다. 내가 바라는 것을 위해 진리를 바꾸지 말고, 진리가 가리키는 대로 내 가치관을 바꾸고 있는지 돌아보자. 겸손한 침묵이 아니라 비겁한 침묵이 되지 않도록….
-예수님은 권위의 출처를 묻는 종교지도자들의 힐문에 은혜를 저버리고 주인을 배반한 악한 종들의 비유로 응수하신다. 농부들은 마땅한 의무인 소출을 바치기는커녕 주인이 세를 받아오도록 보낸 종들을 때리고 능욕하며 쫓아버렸다. 다른 종들도 거듭 보냈지만 마찬가지였다. 이는 종들을 보낸 포도원 주인에 대한 능욕이며 반역이다.
-이런 반역의 역사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끊이지 않았고, 아담 이후 인간의 역사에서 지금껏 계속되고 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 인간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런 그들을 용납하시고 새로운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놀라울 뿐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이 보내신 “사랑하는 아들(13절)”임을 완곡하게 밝히신다. 종교지도자들(악한 농부)에 의해 포도원(예루살렘) 밖에서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을 예고하시고, 그들의 악한 음모를 드러내신다. 누구든 다 알수 있는 비유였다. 하지만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보다는 포도원을 차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아들을 공경하리라는 주인의 기대가 농부들의 악행으로 무너진 것처럼, 아들만은 영접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기대도 예수의 죽음으로 물거품이 될 것이다.
-포도원을 차지하려던 악한 농부들은 주인의 아들마저 죽임으로써 주인의 마지막 호의까지 짓밟아 돌이킬 수 없는 응징(심판)을 자초하였다. 하나님은 악한 농부들에게 배척받고 죽임을 당한 아들을 새 성전의 모퉁이돌이되게 하실 것이다. 비유 속 농부들이 아들을 죽이면 주인인 아버지의 모든 것을 빼앗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듯이, 종교지도자들이나 그 배후의 사탄 역시 예수의 죽음은 자신들의 치부를 감추고 기득권을 연장해주는 걸림돌 제거로 여기고 하나님 나라의 실패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자신들의 파멸을 앞당기는 자멸의 죄악이라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아들을 의지하면 영원한 구원의 반석이 되겠지만, 아들을 거절하면 영원한 심판의 걸림돌(롬 9:33)이 될 것이다.
*진리를 따르는가, 기득권을 지키려 하는가? 종교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진리에 관심이 없었고,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만 몰두했다. 그들은 실리를 따르느라 진리를 외면했다. 우리는 반대로 살아야 한다. 내 가치관을 진리에 맞춰야지, 진리를 내 입맛에 맞게 바꾸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가? 성전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을 몰라본 지도자들은 그분의 권위를 공격했다. 오늘날 교회도 예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인간적인 논리로 교회를 운영하려 할 때가 있다. 예수님의 권위에 온전히 순종해야 한다.
*하나님의 일을 소유하려 하지 말라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우리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포도원의 주인이 아니라 맡겨진 종들일 뿐이다. 지도자의 역할은 하나님의 백성을 돌보는 것이지,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을 잊지 말라 악한 농부들은 아들을 죽이고 포도원을 차지하려 했지만, 결국 주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구속의 계획을 이루신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자는 걸림돌에 부딪혀 넘어지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자는 구원의 반석 위에 설 것이다.
*주님, 자기 기득권 때문에 하나님께 받은 사명을 거절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그들의 모습에서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의 모습이 보이는 것이 아닌지 돌아봅니다. 죄송합니다. 주님, 늘 나의 주권자 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사역하겠습니다. 나에게 맡겨주신 포도원을 성실하게 가꾸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