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 묵상
끈질기게, 절박하게, 낮아지고 어린아이처럼, 부자 관리의 착각, 베드로의 착각 [눅 18:15-30]
 – 2025년 04월 02일
– 2025년 04월 02일 –
눅 18:15-30 어린아이처럼, 부자 관리의 착각, 베드로의 착각
 
어린 아이들과 부자 관리의 이야기를 병치시킨다(15~17, 18~30절). 의존하는 성격의 어린아이와 달리 부자 관리처럼 소유와 권력을 놓지 않아 예수를 따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26절)”는 예수님의 명령에 대한 부자 관리의 반응과 제자들의 반응 사이에 들어간다. 
 
 
 
1. 어린아이를 영접하라(15~17절)
사람들이 어린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안수해주시길 원했다(15절). “어린아이”는 “어린이”보다 갓난아기에 가깝다. 부모들은 복과 치유를 위해 어린아이들을 데려왔을 것이다. 특히 당시에는 유아 사망률이 매우 높았다. 제자들은 이 모습을 보고 부모들을 꾸짖었다. “꾸짖다(에피티마오)”는 매우 강한 어조의 책망이다. 이런 모습을 통해 당시 제자들뿐 아니라 백성들의 어린아이들에 대한 하찮게 생각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또한 신체뿐 아니라 사회적인 관점에서도 어린아이는 가장 낮은 위치의 사람을 상징한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불러 어린아이들이 자신에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금하지 않도록 하신다(16절). 하나님 나라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어린아이의 특징은 “낮은 위치와 의존성”이다. 하나님 나라도 낮아져서 하나님의 구원에 의존함으로 얻는 나라이다. 세리의 기도처럼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 의지하는 태도가 어린아이의 속성과 같다(18:9~14; 마 18:4).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어린아이처럼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나라에 결코 들어갈 수 없다고 경고하신다(17절). 
 
“받아 들이다(17절)”는 말의 뜻은 “의심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 아기가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를 ‘전적으로, 의심없이’ 받아 들이는 이들이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초점은 “그대로”이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여 주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는 주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바라보며 자신들의 지식과 관점으로 해석하는 ‘교만한’ 마음이 아닌, 의심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겸손한 마음’을 의미 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상속을 받는 사람은 자신의 능력이나 소유나 지위가 아니라 거저 받는 은혜의 선물이다. 자신에게 내세울 것이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에 반응하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 
 
 
 
2. 부자 관리와 제자들의 선택(18~30절)
어린아이의 특징과는 상반되는 부자 관리가 등장한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내용에 자극을 받은 어떤 관리가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묻는다(18절). 그는 엄청난 부자라고 소개된다(23절). 영생에 대한 부자 관리의 질문의 진정성은 의심하지 않아도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 말미에 그의 말씀을 듣고 나서 “매우 슬퍼하는(페릴뤼포스)” 모습이 그 증거다. 그럼에도 부자 관리의 세계관은 확고했다. 그는 “행위와 지위”를 근거로 영생과 복을 확보할 수 있다는 세계관에 머물러 있다. 추측하기로는 어린아이처럼 낮아져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을 듣고 자신과 같이 많은 재산과 높은 지위에 있는 신분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을지 고민한 듯하다. 한편으로는 영생의 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을 알고 싶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건과 업적을 드러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자신을 선하다고 평가하는 점을 문제로 삼으신다. 부자 관리는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정점에 이른 사람으로, 철저히 신분 중심으로 상대방을 대한다. 예수님을 선하다고 칭찬하고 자신을 향한 그에 상응하는 칭찬과 평가를 기대했다. 예수님은 그런 관리에게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19절; 신 6:4)고 말씀하신다. 이어서 계명의 일부를 언급하신다(20절). 이 계명들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 가운데 사람들과 관련된 여섯 계명 중에서 탐심의 계명을 제외한 다섯 가지다. 다섯 계명에서 중앙에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계명이 배열된다. 일부 학자들은 이와 같은 배열을 통해 부자 관리의 부가 다른 사람들의 희생을 도둑질한 결과임을 암시한다고 해석한다. 
 
관리는 어릴 때부터 이런 계명을 모두 지켰다고 자부한다(21절). 그런데 예수님은 다섯 계명을 영생의 조건으로 제시하시는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 부자 관리가 걸어온 가치관과 삶의 방식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 없음을 드러내신 것이다. 부자 관리는 부과 권력은 계명을 지키는 경건의 결과로, 가난과 낮은 지위는 게으름과 같은 문제에 따른 결과로 이해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는 증거로 부와 권력의 복을 누린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그에게 아직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지적하신다(22절). 자신의 모든 소유를 처분해야 한다. 그러면 하늘에 그를 위한 보화가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소유를 모두 팔아 나누어주고 나서 “와서 나를 따르라”고 명령하신다.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를 영생을 얻는 길로 암시하신다. 소유를 움켜쥔 상태로 예수를 따를 수 없다. 
 
맘몬과 하나님이 대립하듯 부자 관리에게는 소유와 예수가 대립한다. 관리는 큰 부자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매우 슬퍼한다(23절). 그런 부자 관리를 보면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너무 어렵다고 평가하신다(24절).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25절). 예수님이 과장법을 사용하시지만 독자들은 예수님이 낙타의 비유로 경고한 내용을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 나라는 세상의 가치를 여전히 붙잡지 않고 오직 예수님께 가치를 두어 주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는 이들이 들어갈 수 있다는 의미다. 이런 의미에서 부자 관원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재물은 최고의 가치였다. 주님께서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을까? 질문하는 그에게 재물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했을 때 근심하며 “재물이 있는 자기 집으로” 다시 돌아갔다.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가 아니라 부자는 하나님 나라보다 재물에 더 가치를 두고 있기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어렵다는 의미다.
 
“재물”이라는 헬라어는 “크레마”이다. 이 단어는 단지 “돈”만 의미하는 단어가 아니다. “가치”라는 의미로도 더 많이 쓰인다. 돈을 주로 의미하는 단어는 “맘몬”이다. 그러므로 본문의 “재물”이라는 단어는 돈을 의미하기 보다는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다. 부자 관원은 돈에 가장 큰 가치를 둔 사람이라는 의미다. 하나님 나라보다 재물에 더 큰 가치를 두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당시 많은 부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 증거 혹은 하나님의 진정한 복으로 여긴다면 심각한 오판이다. 부자는 안전을 보장하는 견고한 수단을 확보했다고 믿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존하기 쉽지 않다. 그가 물질에 얼마나 종속된 상태인지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가진 소유를 나누는 정도를 보면 알 수 있다. 많은 재산을 영생의 증거로 확신하는 사람은 착각 속에서 살다가 영생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길을 많은 부를 쌓을 수 있는 기회로 둔갑시키는 누룩을 조심해야 한다. 부를 하나님의 복을 받고 하나님과 좋은 관계에 있는 증거로 둔갑시키는 이들이나 교회는 하나님 나라에서 대단히 멀어져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은 부자 관리가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지 항의한다(26절). 이들은 부자 관리와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의 질문은 영생과 부에 대한 당시 유대인들의 관점을 반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고 단호히 말씀하신다(27절). 이는 구원을 얻는 데 있어서 인간의 능력과 하나님의 능력을 대조한다. 인간은 계명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을 뿐 아니라 완전히 지킨다고 해도 그런 행위로 구언에 이를 수 없다. 최고의 부와 권력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자랑하여도 그런 능력으로는 영생에 이를 수 없다.
 
베드로는 제자들이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말한다(28절).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다고 선언하신다(29~30절). 초대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최고로 여기는 것 때문에 가족의 배척을 받을 것이다. 반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위해 귀하게 여기던 것, 즉 집과 가족을 버린 사람은 여러 배의 가족을 얻고 내세에는 영생을 얻게 된다.
 
이처럼 구원의 속성은 “반전과 역전”이다. 소유를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으로 선택하여 명예와 복을 누린 자들은 내세에 얻을 것이 없고, 예수를 위해 낮아진 자들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얻고 영생을 누릴 것이다. 제자들은 돈이 아니라 예수님을 의존하는 생애를 살았다. 이런 선택과 삶이 구원과 영생의 증거다. 
 
 
 
나는?
-제자들은 예수님의 축복을 바라며 아이들을 데려오는 이들을 꾸짖었지만, 예수님은 어린아이가 어른보다 더 하나님 나라에 가깝다고 하시며 맞아 주신다. 제자가 꿈꾸는 나라에서 어린아이는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존재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어린아이의 겸손한 수용의 자세를 다른 어떤 능력과 조건보다 앞세운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을 전부로 여기고 그분만 전적으로 의존하는 자들의 나라다. 그분만이 높임을 받고 그분만으로 자족하며 기뻐하는 아이들의 나라다.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는 외적인 조건보다 내적인 조건이 더 중요하다. 하나님 아니면 아무 소망이 없다고 여기는 자들, 이 세상 모든 것보다 하나님 한 분을 바꿀 수 없는 자들, 그렇게 자신의 취약성과 죄악성을 인정하는 자가 들어간다. 
 
-부자 관리는 영생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재물에 대한 갈증도 있었다. 율법의 계명은 잘 지켰다지만, 그 율법의 완성인 예수님의 명령은 지킬 수 없었다. 재물을 축복으로 여기는 율법만 알았지, 그 재물과 재산과 목숨까지 버려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 참 말씀은 새까맣게 몰랐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듯이, 부자가 부자인 채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자기 것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어떻게 쓸지를 묻고 고민하는 부자만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돈 없고 힘없고 지식 없어도 예수만 의지하는 사람들로 세워진다. 
 
-세상과 하나님 나라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세상 재물과 가족보다 더 주를 따른 자들은 훗날의 영광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나라를 누릴 것이다. 제자는 이 세상 것을 더 많이 누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누리려고 이 세상 것을 포기한다. 부자 관원은 다 버릴 수 없어 떠났지만, 베드로는 다 버렸다고 착각하면서 따랐다. 하지만 베드로는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따랐다. 베드로는 부자 관원의 또 다른 얼굴 아닐까?
 
-부자가 부자인 채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형제사랑도 아니고 하나님 사랑도 아닌 소유를 의지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율법을 잘 지킨들 그것을 참된 순종으로 받지 않으신다. 부자는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서 따르라는 예수님의 요구에 심히 근심한다. 당연하다. 그에게 예수님은 소유만큼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는 말은 착각이다. 소유 사랑과 하나님 사랑은 같이 갈 수 없다. 
 
-예수님은 가장 자격 있을 것 같은 부자는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고 하시고 가장 자격 없는 아이들이 합당하다고 하셨다. 제자들의 기준을 뒤엎고 뒤집었다. 베드로가 자신은 다 버리고 따랐으니 자격 있지 않느냐고 말하자 주님은 긍정하시면서도 그가 더 큰 부자가 되고 싶은 마음을 버리지 못한 채 따르고 있음을 알고 계셨다. 
 
-부자는 자신이 계명을 다 지켰기에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충분하다고 착각했고, 베드로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따르고 있다고 스스로 속고 있었다. 그렇게 자부하던 베드로는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한다. 
 
 
-나에게 가장 큰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바라기는 어린 아이나, 제자들처럼 하나님 나라에 가장 큰 가치를 두는 삶이길 바란다. 내가 가진 “돈”을 하나님 나라 “가치”에 마음을 다해, 기꺼이, 의심 없이, 배운 대로, 들은 대로 사용하는 하나님 나라에 더 가치를 두는 삶 이기를 바란다. 주님께서 내게 혹, 많은 재물을 주신다면, 말씀대로 담대하게 사용할 수 있는 용기가 하나님 나라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있기에 발휘 되는 삶 이기를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린 아이 처럼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삶이고도 싶다. 그대로 받아 들이기에 자연스레 계산하게 되는 너무 많은 세상의 지식, 경험, 법칙, 가치등의 계산법이 발동되기 전에 “오직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신뢰로 그저 받아들이는 은혜 안에 살기를 원한다.
 
-이미 나에게 임한 하나님 나라가 나에게 최고의 가치가 되어, 최선을 다해 하나님 나라 안에 살다, 완전하게 이루어질 주님의 재림에 날에 하나님 나라에 영원히 거할것을 믿는다.
 
-비교불가, 최고의 가치 하나님 나라…. 그대로 살아내는 오늘 나의 삶 이기를…
 
 
 
*주님, 날마다 나의 약함과 죄성을 인정하며 그렇기에 더욱 예수님을 붙잡을 것 외에 다른 것을 바라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유지하겠습니다. 
*주님, 소유를 사랑하고 집착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음을 단호하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붙잡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되 더욱 사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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